노고의 대가

도저히 읽기 어려운 번역서들이 있다.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읽고 있는데 이 것도 그렇다.

이 안에는 주어와 동사가 일치하지 않는 문장도 있다. 아예 동사가 존재하지 않는 문장도 있다. 번역한 사람도 내용을 모르고 장황하게 직역해놓은 문장도 있다. 문제는 그런 문장이 아주 많다.

750 쪽이나 되는 책을 몇 번이나 문장을 곱씹으며 더듬더듬 절반이나 읽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읽어서는 원저자가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1/10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책읽기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고는 냉큼 번역을 업으로 삼는 아내에게 불만을 이야기 했다.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번역이 이래서야 되겠느냐고. 출판사는 검수도 제대로 안한것 같다고.

아내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장당 만원짜리 번역이 그 정도 일 수 밖에 없다 했다. 만원을 받고 8시간을 번역할 수 있겠느냐고. 그러고는 나처럼 매번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며 번역한 사람에 1원도 보태준 적 없는 사람은 불만을 말할 자격이 없다 했다.

그렇다, 속으로 뜨끔했다.

사람이 오랜동안 시간을 들여 값어치 있는 것을 만들 때에는 그만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 만원을 내고 왜 8시간만큼의 일을 하지 않느냐고 왜 결과가 이렇다고 말하기에 앞서 그 결과를 누릴 만한 충분한 값을 치루었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지금은 스피커로 음악을 듣고, 책으로 글을 읽고, 컴퓨터로 영화를 보고, 대량 생산된 옷을 입는다. 무생물의 미디어(Medium)과 닿아있는 우리는 그 속에 숨겨진 인간의 노력은 잘 살펴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여기에 가치를 두고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인간성 또는 인간미는 극 소수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고상한 취향이 되어버릴 것이다.

종교가 필요하다

종교가 아니고서는 무엇인가를 100%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고 꾸준히 우직하게 나가야 하는데 계속 마음이 조급하고 생각이 바뀐다. 어제 잘 때 생각이 다르고, 오늘 밥 먹을 때 생각이 다른 것을 보니, 사실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나의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 확신이란 것이 경험이나 근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이 나에게 믿으라고 시키는 섭리 같은 것이고 그에 순응하는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종교에 미친 사람들은 나름대로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러한 종교 같은 것이 필요하다. 내가 운동을 못해서 살이찌고 배가 나오는 한이 있어도 무엇인가를 해야 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이러한 열렬한 맹신이 없기 때문이다. 90%에서 10%를 더 끌어올려 전력투구하기는 정말 힘들지만, 이 정도 레벨에 오면 그 10%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앞으로 조금 씩 나간다.

그렇게 미쳐서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부럽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Complex

  우리 동네 초등학교 뒷쪽에, 굵은 철사줄로 칭칭 동여맨 을씨년스러운 녹슨 대문과 마당에 수북히 쌓인 낙엽 가득한 낡은 집 한채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미당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노래했다. 나는 그처럼 홀연히 살지 못했기에 뒤돌아보면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컴플렉스라고 노래 해야겠다. ‘바람’처럼 닿은듯 닿지않게 너울너울 살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며 나를 키워온 것이다.


  근래의 김연아아사다 마오를 보면 승부를 초월한 승자와 처절한 패자를 보게된다. 승자는 이미 여유로운 입장이고 아래에 위치한 옛 라이벌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경쟁이라고는 생각치 않을 것이고, 오히려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할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는 태연히 “나 자신과의 싸움이 남았다.”라는 인터뷰도 할 수 있다. 뭐 어떠리, 내가 최고인걸. 패자는 아마 눈을 감으면 승자의 얼굴이 보일 것이고 눈을 뜨면 눈물이 흐를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 자신이 예전에 있었다면 더욱 더 그럴 것이다. 경쟁과 컴플렉스는 온전히 패자의 것이 된다. 영원히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할지,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가서 언젠가는 왕좌를 탈환할지 하는 것은 순전히 패자의 태도에 달려있다.


  경쟁이 상호 발전을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이기도 하다. 물론 공정한 경쟁일때 그렇다. 대부분은 승자는 자신의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 패자를 더 찍어 누르려고 한다. 패자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어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컴플렉스다. 컴플렉스는 패자를 위한 Cheer-up이자 승자에게 대한 Panelty이다. 카 레이싱에서는 앞서 달리는 차의 뒤를 바짝 따라붙어 공기 저항을 줄이는 방법이 있다. 비록 2등이지만, 나는 무언가를 더 지니고 있다. 컴플렉스는 상호 발전이 아니라, 느끼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하나의 에너지다. 마음을 쿡쿡 찌르는 듯한 아픔을 어떻게 이용할지, 어떻게 치유할지에 대한 선택은 중요한 일이다.


  컴플렉스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다고 술로 푸는 것은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을 잠시 세상의 현실과 괴리시키는 것이다. 좋은 방법은 1등의 발자국을 하나 하나 따라가면서 언젠가 있을 과거의 내가 패배한 경쟁과 다른 변수를 대비하는 것이다. 물론 손쉬운 방법은 아니다. (세상에 손쉬우면서 효과적인 방법은 그렇게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있다 해도, 대부분은 ‘더’ 손쉬운 방법이 있거나,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현재 위치에서는 내가 1등이 될 수 없지만, 경기의 규칙이 바뀌거나, 나는 더 오랫동안 무엇을 할 수 있다거나, 나는 더 심리적으로 강한 사람이거나 하는 장점을 하나 갖추면 언젠가는 그 요소가 당신에게 승리자 라는 타이틀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인정하기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나도 타이틀과 같이 수많은 컴플렉스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 중에 하나다. 공부나, 운동이나, 영어나, 외모나, 화술이나. 지금 생각해보면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앞선 출발점에서 스타트를 끊은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는 항상 다른 사람보다 뒤쳐져 있었고, 등을 보고 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컴플렉스를 이용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배웠다고 생각한다. 다른이의 장점에서 자신의 단점을 보고 이를 바꾸기 위해서 뭘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쉬운일이다. 하지만, 이 마음에 컴플렉스라는 연료를 붓는 것은, 그리고 이 불이 꺼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은 내 경험상, 그리고 주위를 관찰한 결과 쉬운일은 아니다.


  이 외연기관의 엔진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해서 미장이가 벽돌을 쌓듯 조금씩 조금씩 차곡차곡 나를 쌓아나가는 작업은 내가 기쁨을 느끼는 유일하지는 않지만 가장 큰 하나의 방법이다. 매일같이 달리는 런닝머신 위에서 나는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을 뿐이지만, 더 나은 미래의 무언가를 볼 수 있는 눈을 키웠으니 미래로는 달려가고 있는 꼴이다. 조금이라도 나를 바꾸어 보겠다고 아무것도 아닌 발버둥을 치는 모습은 측은해 보이기도 하지만, 삶과 죽음의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의미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