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간의 일본 기차 여행 – 도쿄, 센다이

호텔 토에이 유자와의 오래된 객실 창문으로 햇살이 강하게 들어온다. 언덕배기에 위치한 호텔은 산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을 마을에서 처음 맞이한다. 아무리 기억해도 조식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먹었더라면 어제와 같은 것이 나왔을 것이다. 석식은 주지만 조식을 안주는 패키지라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일년이 지나 흐려진 내 기억은 체크아웃 후 호텔에서 역으로 향하는 내리막 길부터 시작된다. 길 양쪽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가 올라와 한증막 터널을 이루고 있다. 놀랍도록 덥다. 아침부터 이리 더운 것은 후끈 달아오르는 하룻밤 사이에 여름이 빨리 찾아와서가 아니라 호텔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온천물 탓이다. 일년 내내 이렇게 따뜻한 온천물이 흐르니 겨울에는 스키와 온천이라는 훌륭한 관광 상품이 완성될 수 있다.

이 마을에서는 더 할일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스키장이 위치한 고원을 보고 왔어야 된다는 아쉬움이 조금 남지만, 아마 그랬다가는 무언가를 포기했어야 했다. 500엔의 사케 시음회를 한번 더 가져볼까 하다가 허리의 건강을 염려한다. 탈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의 기차를 타고 도쿄로 향한다. 에치고 유자와 역에서 우에노 역까지 가는 열차다. 어제 신칸센에서 신칸센으로 갈아탔던 다카하시를 지나 사이타마를 뚫고 간다. 대전에서 부산 정도의 거리로 중간에 정차하는 역이 많지 않아 우에노까지는 금방 닿을 수 있다. 도쿄 와이드 에어리어 패스라는 철도 패스를 사면 올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에치고 유자와 역 까지이다. 도쿄에 단기 방문하는 관광객이 올 수 있는 가장 먼 거리라는 의미이다.

도쿄 근교, 근교지만 우리나라의 경기도보다 훨씬 넓다, 에 들어서자 끝없이 펼쳐진 나트막한 건물의 바다가 창밖으로 보인다. 도쿄 북쪽의 이타바시 구 옆을 지나갈 때 괜히 15년 전에 잠시 살았던 위클리 맨션의 위치를 찾기도 한다. 중년의 나이가 되니 청춘의 기억과 그 기억이 때를 묻힌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립고 애틋하다. 그리고 그 것을 15년만에 볼 때는 더욱 그렇다.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러려면 도쿄 일정 전체를 그 곳에 써야 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으로 미뤄둔다. 7개월의 휴직 기간에는 하고 싶은 것을 많이 하며 지냈다. 일년이 지나 다시 해야할 것으로만 빡빡한 인생이 되었다. 다시 공수교대 되어버린 나의 인생은 이대로 괜찮은가.

도쿄에서는 숙박을 하지 못한다. 도쿄 이후 이어지는 북쪽의 일정은 지금까지의 일정보다 한층 빡빡하다. 오늘은 센다이까지 올라가 숙박을 한 후 이후 홋카이도까지 쾌속 직진이다. 따라서 도쿄의 관광 명소를 가지 못하고 신칸센이 정차하는 우에노와 도쿄 역만 잠시 들른다. 국립 서양 미술관을 보고 싶었지만, 마침 월요일이라 휴관일이다. 대신 도쿄 국립 박물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다섯 주 동안 도쿄 살이를 할때는 박물관, 미술관 같은 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귀국 직전 들른 나라 국립 박물관을 살펴보고 크게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 여행 중 들를 수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은 모두 가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우에노역을 처음 와본적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지하철인 야마노테센을 타고 오고 갔었다. 신칸센 정류장에서 지하철 정류장으로, 또 지하철 정류장에서 실제 우에노 공원 입구와 복합 쇼핑몰로 이어지는 길은 한참을 걸어도 끝이 없다. 다만 우에노 역으로 나가는 길은 고속도로 톨게이트 처럼 좁은 계단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있어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다. 신칸센 정류장을 빠져나오자마자 등장하는 코인 락커에 짐을 맡긴다. 조금이라도 짐을 매고 걷는 걸음 수를 줄여야 한다. 박물관을 관람하는 일은 허리디스크 환자에겐 다소 모험이다.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에치고 유자와에서 두 시간을 달려 좁은 계단을 올라와 마주친 우에노 공원은 다른 우주 같다. 산책 나온 할아버지 할머니, 도쿄 관광에 나선 외국(특히 서양) 관광객, 시끌 벅적한 학생들 무리로 난리법석이다. 동쪽 입구는 역과 붙어있어서 단체 관광의 집합 장소로 많이 이용되는 것 같다. 입구로 들어서 중앙 광장까지 간 후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면 가운데 커다란 분수를 지나 2차선 도로를 건너 미술관이다. 해가 나진 않았지만 높은 습도와 기온이 축 젖은 옷처럼 체력을 갉아 먹는다. 길을 건너기 전 벤치에 앉아 아침 겸 점심으로 가방에 든 빵을 먹었다. 앉을 벤치가 넉넉하지 않아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다. 물도 숙소에서 한 병 챙겨왔다.

국립 도쿄 박물관은 여러 개의 관으로 나뉘어 있는데, 커다란 중앙 건물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이 동양관이고 동양관의 높은 층에 중국관, 한국관이 포함되어 있다. 사실 다른 곳 보다는 한국관을 보기 위해 방문했다. 한국보다 한국의 국보급 유물이 더 많다는 일본. 내 생각이지만 소장한 것은 어머 더 많을 테지만 유물 반환 문제 등 복잡한 이슈가 되는 것이 싫어 한국관에 많은 것을 전시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국관부터 시작해서 높은 층부터 하나하나 내려오면서 전시를 관람한다. 한국, 중국, 그리고 중동, 페르시아 등 점점 서쪽의 유물들이 나타난다. 기증 받은 실제 미라도 전시하고 있다.

한국에서 태어났을 많은 유물들이 대한 해협을 건너 이곳에서 전시되고 있다. 어떤 유물은 임진왜란때 약탈되거나, 어떤 유물은 1800년대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거나 (안타깝게 한국 지리와 전설에 밝은 한국인 도굴꾼이 많았다고 한다), 어떤 유물은 일제시대 한성에서 번화한 외국인 대상의 골동품상에서 은밀하게 팔려 이 곳에 왔을 것이다.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사람과 유물 모두 많이 건너갔지만 유물은 먹먹하게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본식 이름을 달고, 그 유래와 발굴 부분의 설명이 생략된채 놓여 있다.

동양관에서 본관으로 이동하니 사람이 한층 더 많아졌다. 일본의 유물을 중심으로 근대 일본 미술 전시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아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 하나하나 꼼꼼하게 둘러봤다.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어느 사이에 점심 시간을 넘었다. 내 허리 디스크 시계 (세 시간을 넘으면 서 있을 수 없다)는 이제 그만 둘러보라고 신호를 준다. 앉아서 쉴 공간이 실내에는 마땅치 않다. 덥고 습하지만 건물 밖으로 나가 정원의 벤치에 잠시 앉아 사람들을 둘러보며 쉬었다. 놀라운 다양성이 보였다. 인종, 연령과 같은 것은 물론이고 헤어스타일, 패션, 소지품, 신발까지 다르다. 아마 하고 있는 이야기도 다르고, 방금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까지 다를 것이다.

얼마전 청와대 관람을 다녀왔다. 멀리 비행기를 타고 오신 서양인도 몇 명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국인이고, 아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긴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다양성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문화, 인종적 다양성이 크게 확대 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일본이나 혹은 미국이 겪는 문제와 잠재력을 동시에 가지게 될 것이다. 나에게 문제와 잠재력은 기회와 폭발적 사회 변화와 동의어로 들린다. 정확히 150년 전 한국과 일본이 당면한 변화, 그리고 다른 선택을 다시 떠올린다.

식사는 멀리 갈 수 없어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우에노 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식당을 검색했다. 우에노 역에 있는 유명한 오므라이스 전문점에서 먹기로 한다. 타이메이켄이라는 집이다. 평소에는 대기가 많기로 유명하지만 이미 2시가 넘은 시간인지라 별다른 대기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다. 한국의 중국집에서 먹는 노른자를 터뜨린 계란 후라이 오무라이스와는 다른 정성을 다한 보기 좋은 요리가 나오는데, 문제는 너무 양이 적어서 하나를 다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같이 먹을 반찬도 전혀 없다.

주어진 시간이 한 시간 밖에 없다. 일단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우에노 역에서 한 시간 동안 둘러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JR패스를 이용해 방문 가능한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둘 중 하나다. 야마노테센을 타고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내려가거나. 센소지, 도쿄타워, 롯폰기, 긴자, 토라노몬(예전에 다녔던 회사가 있다), 스카이트리, 오다이바의 대강 위치를 머리 속에 넣고 가늠해보았다. 다 어렵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신칸센 열차를 놓칠 수 있다. 그럴 경우 규정 상 내가 예약한 열차가 센다이역에 도착한 시간 이후 열차를 다시 예약해야 한다.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모험을 하지 않기도 했다. 야마노테센을 타고 유라쿠초역까지 내려와서 도쿄역까지 걸어오기로 한다.

유라쿠초 역까지 야마노테센을 탔다. 그렇게 붐비진 않았다. 드문드문 솎아낸 빈자리가 있어 체면이고 뭐고 얼른 앉았다. 한국에서는 어지간해서 자리에 잘 앉지 않는다. 18년 전 놀랍도록 똑같은 풍경의 야마노테센 열차를 탓던 일이 떠올랐다. 여성 전용칸에 타지 않도록 조심했던 일, 할머니들이 뽀글이 파마를 안한다고 신기해했던 일 들이 생각난다. 야스쿠니 신사를 보고 무도관을 거쳐 황거 공원을 지나 도쿄역까지, 그리고 조금만 더 힘내보고자 긴자까지 걸어왔던 기억이 있다. 지하철 기본 요금이 2천원에 가깝다며 말도 안되는 물가라고 생각했다. 지하철 요금을 아끼기 위해 정말 말도 안되는 거리를 걸어다녔다. 도쿄역에서 롯뽄기까지, 롯뽄기에서 신주쿠까지. 지금은 일본의 지하철 요금이 비싸보이지 않는다. 그 때 걸어왔던 그 길을 지나간다. 도쿄역에서 황거까지의 마루노우치, 그리고 철로를 건너 긴자는 현대 일본의 심장이다. 비싼 부띠끄 샵, 명품 상점가, 고급 외제차들과 세련된 옷차림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일본에서 가장 비싼 땅이다.

나는 많이 변했다. 직장과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던 젊은이에서 어느 덧 15년 동안 근속한 중역?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아이와 같이 일본 여행을 하고,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때는 전재산이 3천만원이었지만, 지금은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대신 걱정거리는 3배 쯤 늘었고, 온전한 내 시간은 5배 쯤 줄었다. 체력은 10배쯤 줄었다. 앞으로 무엇이 늘어나고 무엇이 줄어들지를 생각해보면 약간의 우울감에 빠진다.

옛날 서울역과 똑같이 생긴 도쿄역에서 다시 야마노테센을 타고 우에노 역으로 간다. 기차를 놓칠까봐 서둘렀다. 야마노테센이 왜 이리 늦게 오나 배차 간격에 불평 했다. 다시 올때와 똑같은 풍경의 기차를 타고 올라간다. 같은 사람들이 타고 뱅뱅도는 순환선인가 하는 생각이 들정도다. 다행히 시간에 맞춰 우에노 역에 도착했다. 우에노 역에 맡겨 놓았던 배낭을 찾는다. 오무라이스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달래려 편의점에서 빵을 한 개 샀다. 딱 편의점에서 빵을 한 개 살 시간이 남았다. 플랫폼에 도착하자 마자 정시에 들어오는 신칸센을 타고 다시 센다이로 달려간다. 짧은 도쿄 나들이의 마무리다.

센다이는 중간 기착지이다. 동북권에서 가장 큰 도시이므로 고를 수 있는 숙소가 많고 쌀 것이라 생각했다. 근처의 관광지로 야마데라 릿샤쿠지, 히라이즈미 주손지 등을 살펴봤는데, 신칸센 라인에서 한참들어가야 한다. 1박을 빼서 이런 것들을 둘러보기보다는 하코다테까지 올라가서 홋카이도 내에서 2박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아오모리, 아키타, 이와테, 센다이는 시간이 나면 렌터카 여행을 해봐도 좋겠다. 젊어서는 지구를 반바퀴 쯤 돌아 먼 곳을 가보고, 이곳은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 올 생각이다. 체력 빼고 여행에 불편함은 전혀 없는 나라니까.

센다이까지는 한시간 반 정도 걸린다. 300km 가 넘는 거리를 한시간 반이라니, 비싼 기차 가격이 아니라면 통근을 해도 될 것 같다. 도쿄에서 4시 넘어 기차를 탔고, 센다이에 도착하니 해가 저물어 간다. 후쿠오카에 첫 날 묵었던 숙소였던 캡슐호텔 체인이 마음에 들어 동일 체인의 센다이점을 예약했다. 역에서 먼 거리에 위치했다. 걸어서 금방 가리라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먼 거리다. 역에서 나와 넓은 육교를 건너고 출구가 보이지 않도록 펼쳐진 아케이드 거리 한참을 걸어간 후에 다시 횡단보도를 여러번 건넌 후에 도착했다. 중간에 고쿠분쵸라는 유흥가를 지난다. 밤에 걷기 좋은 거리가 아니다. 이렇게 멀리 있을 줄 알았으면 역 근처의 숙소를 예약할 걸.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체크인을 위해 카운터로 갔다. 후쿠오카점은 체크인부터 무인이었는데 여긴 카운터를 운영한다. 오늘의 입실 손님들의 목록을 출력해 놓은 종이가 놓여 있다. 내가 누군지 알려준다. 생각보다 한국인들이 많았다. 관광객이라고는 잘 찾아오지 않는 이 곳에 무엇을 위해 온 것일까? 그래, 일년에 2500만명이 찾는 일본인데, 누군가는 이 곳까지 와서 우설을 먹고 가지 않겠나.

사전 조사에 따르면 센다이는 우설과 다테 마사무네, 라쿠텐의 도시이다. 우설은 소의 혓바닥으로 규동 처럼 밥 위에 올려 먹거나 그 자체로 구워서 먹는 것 같았다. 센다이 역 내 식당에서도 우설 덮밥?을 잔뜩 팔고 있었다. 다테 마사무네는 센다이 번의 영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이자 임진왜란에 참여했다. 두 달 전 코레일의 내일로 티켓을 이용해 방문한 진주성 전투에 그도 참전했다. 라쿠텐 이글스에서는 김병현이 잠시 뛰었다. 걸어오는 아케이드에는 라쿠텐 이글스의 선수들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깃발에 인쇄되어 걸려있었다.

간단히 씻고 침대에 누웠다. 박물관 투어, 그리고 숙소까지 걸어온 탓에 나갈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다. 원래는 우설을 먹고 싶었으나 근처에 우설을 파는 적당한 곳을 찾기 어려웠다. 특히 혼자 먹을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소 혓바닥과 내 혓바닥이 닿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늘 안전한 선택을 하는 나는 걸어오는 길에 입구 옆에서 본 스키야를 가기로 했다. 들어가서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고 앉아 있었더니, 직원이 오더니 여기서 앉아서 먹는지 물어봤다. 그렇다고 했더니 음식을 가져다 주겠다고 했다. 알고보니 키오스크는 테이크아웃 전용이고 앉아서 먹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리마다 주문 테블릿이 부착되어 있었다.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있으니 의아해서 물어봤나보다.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온다. 오른쪽으로 대형 환락가 고쿠분초 입구가 있었다. 유흥가에 적절한 옷차림을 한 여성들이 건물 입구마다 서 있다. 신기한 것은 우리나라처럼 돌아다니거나 걸어다니는 사람에게 접근하여 호객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나름대로 규칙이 있는 것 같다. 일본 답게 절대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 것. 그 것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차라리 이런 대형 환락가에 유흥 업소를 밀집시켜 놓고, 다른 곳에 허가를 내주지 않는 것이 좋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풍경을 원하지 않으면 이곳에 오지 않으면 된다. 나처럼 싼 숙소를 찾아다니는 여행객은 항상 이런 풍경을 지나게 된다. 후쿠오카에서도, 센다이에서도, 삿뽀로에서도.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누워서 넷플릭스를 뒤적뒤적하며 영화를 보다 잠들었다. 오늘은 에치고 유자와에서 센다이까지 이동하고, 도쿄 국립 박물관과 도쿄역 일대를 돌아본 것이 관광의 전부였다. 박물관과 신칸센이 하루를 다 빨아들였다. 내일은 센다이 성 유적을 둘러볼 계획이다. 그리고 홋카이도로 건너간다. 여행의 끝이 보인다.

12일 간의 일본 기차 여행 – 마츠야마, 에치고 유자와

오랜만에 쾌적하게 잘 잤다. 캡슐호텔의 시설도 좋았을 뿐더러 사람이 많지 않아 잠을 깨우는 부산한 움직임이 덜했다. 걸어서 마츠야마 성을 보러가기로 한다. 나는 아침을 먹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굳이 조식을 찾아 먹지 않아도 된다. 마츠야마는 어제 묵었던 나고야에 비해 훨씬 고지대이고, 주위가 모두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신선한 공기가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 멀리 보이는 산이 아름답다. 제네바에서 보이던 알프스의 고봉들이 생각났다. 여기서 보이는 산들도 일본 알프스라고 불린다.

역 근처의 숙소에서 성 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 8시 30분에 관람이 시작된다고 하여 8시 쯤 출발하기로 한다. 걸어가는 길은 대부분의 일본 시가지가 그런 것 처럼 깨끗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출근하는 사람, 등교하는 사람이 없다. 여행 내내 늘 시간에 쫓겨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했는데, 8시 30분 도착을 목표로 느긋하게 걸어가본다. 여행의 한가로움을 뽑내며 걸어가는 길에 꽤 커다란 하천을 마주친다. 물이 맑고 수량이 많다. 꽤나 깊은 산에서 내려온 물인 것 같다. 어제 굽이굽이 기차를 타고 지나온 높디 높은 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 인 것 같다. 물을 만져보려 내려가 본다. 햇살과 청량한 물, 이 물이 시작한 산과의 거리감, 그리고 일요일 아침의 여유로움이 합쳐서 행복감을 준다.

다리를 건너가니 개구리일지, 두꺼비일지 모르는 사무라이 동상이 보인다. 이 도시의 마스코트라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코로나 시절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진이 나온다. 자그마한 신사를 마주쳤다. 10대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붉은 빛 치마를 입은 무녀 둘이 청소를 하고 있다. 아침 산책을 나온 나이 많은 부부가 합장을 하고 소원을 빌고 있다. 무슨 소원을 빌고 있을까. 신사 앞에서 시작하여 하천과 나란히 이어지는 좁은 골목과 상점가가 관광 명소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문을 열지 않았다. 이 길을 이용해 다시 숙소로 돌아와야 하니 오는 길에 들러보기로 한다.

마츠야마 성은 일본에 몇 개 없는 천수가 온전히 보존된 성이다. 구마모토, 나고야, 오사카 성이 겉만 그럴듯한 현대 콘크리트 건축물인데 비해 이 곳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처마와 각 층의 대들보가 온전히 보존된 드문 성이다. 물론 수십년에 한 번 씩 나무를 교체하고 기와를 교체하는 대규모 보수 공사가 지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천천히 걷는다고 했는데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입구를 막아 놓았길래 왼쪽으로 조금 이동해서 성 전체를 조망하는 벤치에 잠시 앉아 있었다. 해자 건너편의 성채가 단정하고 반듯하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입장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겉으로 보면 5층 건물인데, 실제로는 6층이다. 이는 틀림없이 침입자와 수비자 간 수비자가 유리하도록 정보의 비대칭을 만들기 위한 설계일 것이다.

시간에 맞춰 입장이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서양 관광객들이 많았다. 연령대가 다양한 그룹이라 학회 같은 행사에 참석하고 주말 관광차 들린 것 같기도 하다. 히메지 성처럼 성 외곽이나 성문 등을 겹겹이 통과해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문 하나를 지난 후 바로 성 내로 입장할 수 있다. 좁고 좁은 복도와 실내를 통과해서 최상층을 통해 올라간다. ‘총’, ‘대포’ 같은 화기 위주의 전시가 많았다. 기차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천천히 둘러봐도 되겠다 싶었다. 성의 유래나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나무 조각까지 꼼꼼하게 둘러본다. 일본어로는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는데, 영어로는 중요한 한두 문장만 번역해 놓았다. 어느 사이에 바글바글하던 서양인들은 흥미가 사라졌는지 먼저 올라가버렸다.

일본의 총은 포르투갈을 통해 전해졌다. 1500년대 우연히 표류하던 포르투갈 무역선에서 총의 위력을 발견했다. 일본인들은 이를 구입하여 국산화 함과 동시에 화약을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된다. 1년 안에 자체 개발 할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 서로 치열하게 대립하던 지역의 영주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앞 다투어 이를 도입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인이 쉽게 소지할 수 있는 짧은 길이의 총에서 부터 두 명 이상이 운용하는 거대한 총신의 총까지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성에서 외부를 향해 발사하는 사구 들도 처음에는 위 아래가 긴 형태로 활을 쏘도록 만들어졌다가, 이후에는 총을 쏠 수 있는 작은 구멍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렇게 발달한 개인 화기들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무자비한 인명 살상에 이용된다.

천수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니 사방 풍경이 모두 내려다보였다. 산 속에 있는 마을이지만 분지 지형 안쪽은 꽤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분화구 속에 있는 것 같은 모습은 아소산에서도 봤던 풍경이고 내 기억에 우리나라에는 쉽게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사방에 하천을 이루고 있다. 마츠야마는 일본 최고의 고추냉이 산지로 유명한데, 사시사철 흐르는 깨끗한 물이 있어 좋은 품질의 고추냉이를 기를 수 있다고 한다. 이 천수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내려오는 길에 달맞이 별관?을 볼 수 있다. 한국어로 정확히 어떻게 지칭하는지 모르겠으나, 영어로는 Moon-viewing Wing으로 번역해 놓았다. 하늘에 떠 있는 달, 해자에 비친 달, 삼면의 열린 창에서 들어오는 바람, 좋은 술이라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되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에 일부러 오면서 들렀던 상점가 거리를 지난다. 여기서는 타이야키, 한국의 붕어빵이 유명하다고 하여 먹어본다. 일요일 이른 시간이라 사람도 별로 없고 이제 막 가게 문을 열고 계셨다. 슈크림과 팥 두 종류를 팔고 있다. 한국보다 훨씬 비싼 값을 받았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걸려 막상 받아 든 붕어빵에 오히려 한국 가격이 비싸게 느껴졌다.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양재천을 연상시키는 천변에 앉아 맛있게 다 먹었다. 여전히 관광객은 몇 없었고 물이 흘러가는 소리만 청량하게 들렸다.

11시 퇴실 시간에 맞춰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딱히 마주치는 사람도 없다. 일요일이라 출장 차 방문한 사람도 없어 보인다. 혹시 다음에 오게되면 다시 숙박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비넷에 넣어 둔 가방을 꺼내어 매고 역으로 걸어간다. 숙소는 고층에 위치하고 저층은 상가로 쓰고 있는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인데, 1층에는 서점과 문구점이 절반 정도를 쓰고 그 외에는 생활 잡화나 전자기기를 파는 상점이 입점해 있다. 어제 늦은 시간, 그리고 오늘 아침의 이른 시간에는 모두 닫혀 있어 들어가보진 못했다. 바로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음에도 호기심에 상가들을 뚫고 반대편으로 나가본다.

서점은 마치 내가 사는 동네의 아주 오래된 상가 건물 1층에 입점 해 있는 것 같은 진열과 광고, 그리고 고객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번 여행을 다니면서 종종 느끼는 순간이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른 풍경 속에 문득 익숙함을 느끼는 미국이나 유럽 여행과 달리 (예를 들면 프랑스 시골에서 기아 자동차를 만난다거나) 일본의 풍경은 대부분 우리나라와 같은데 한 두 부분만 다른 (서점의 신간 서적 안내가 일본어로 되어 있다거나) 점을 포착하게 될 때이다. 서로 상반된 매력이 있다. 전체와 부분, 모든 것과 하나의 차이이다.

점심은 여전히 역전의 마츠야를 먹기로 했다. 간단하게 혼자 먹을 수 있는 식당은 여기 뿐이다. 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먹을 만한 곳을 검색해보았지만 어제의 맥도널드와 마츠야 두 가지 뿐이다. 역사 내의 아케이드에도 식당이 있는 것 같았지만 적당한 먹을 거리가 있을지, 기차시간에 맞춰 빠르게 먹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마츠야에서의 식사 시간은 20분을 넘지 않으니까. 키오스크를 이용해 익숙하게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메뉴는 1분 안에 나왔다. 촘촘하게 움직이는 배낭여행자에게는 시간의 예측 가능성이 중요하다.

점심을 먹고 다시 기차에 올라탄다. 어제에 이어 특급 시나노를 타고 나가노까지 간다. 오늘은 운이 좋게 가장 앞 자리를 예약할 수 있었다. 아침이라 선명하게 보이는 계곡이 아름답다. 철길이 대부분 단선 구간이고 중간중간 지나가는 기차역에서 복선 구간이 있다. 따라서 완행 열차들은 잠시 이곳에 멈춰서서 반대편이나 혹은 추월해가는 특급 열차가 지나갈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내가 탄 기차는 거의 멈춰서는 일 없이 모두의 양보를 받으며 질주한다. 왜냐하면 나는 ‘특급’이고 비싼 값을 지불했다. 워낙 산이 깊어 복선으로 철로를 놓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일본은 협궤, 우리나라는 표준궤를 쓴다. 협궤는 표준궤보다 40cm가량 폭이 좁다. 우리나라 철도의 시작도 일본이 부설한 것이므로 자국과는 다르게 표준궤를 선택했다. 이는 당연히 향후 중국과 러시아와의 철도 연결을 고려했을 것이다. 반면 일본은 외부와 철도 연결이 필요 없고 싼 부설 비용으로 산악 지형을 넘나들어야 했으므로 협궤가 적당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대신 객차를 크게 만들지 못해 운송량에 제약이 있고, 곡선 구간에서 일정 속도 이상을 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계곡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는 시나노 특급을 보면서 협궤 말고는 산택지가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칸센은 모두 표준궤로 새로 놓은 철로이다.

나가노에서 다시 다카사키까지 간 후 다시 열차를 갈아타고 에치고 유자와 역까지 달린다. 나가노에서 갈아타는 기차가 도착하기까지 15분의 시간이 있길래 역사 밖 육교까지 나가 사진만 찍고 왔다. 동계 올림픽이 열린 도시이고 여름을 앞둔 한 낮의 시간인데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멀리 있는 산들이 깨끗하게 잘 보인다. 호핑 투어는 이럴 때 쓰는 말 같다. 복잡해보이지만 특급 시나노 이후 나가노부터는 모두 신칸센 1등석을 타고 이동하기 때문에 빠르고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다. 지겨울 정도로 신칸센을 탔다. 어제, 오늘, 내일의 이동으로 이미 JR패스 구매 비용 이상의 탑승료에 맞먹는다.

에치고 유자와를 방문하기로 한 이유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 때문이다. 일본인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이 두 명 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먼저 수상했다. 나는 그의 소설은 설국만 읽어보았지만 그 하얀 풍경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가 참 좋았다. 책을 읽으면서 그 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내가 기록하는 ‘방문 희망 리스트’에 추가 해 놓았었다. 신칸센 자유 이용권이 없다면 꽤나 돈을 들여 와야하는 곳이기에 이 기회에 방문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다만 설국이 아니라 파릇파릇한 푸른 나라 였다는 점은 아쉽다. 다른 한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오에 겐자부로이고 그의 책을 초등학생 때 샀다가 100 페이지도 못 읽고 포기했다.

에치고 유자와를 향해 달려가는 신칸센 내에서 숙소를 예약했다. 여름은 비수기라 숙소가 저렴했다. 또 니가타현에서는 방문 외국인을 대상으로 숙소 쿠폰을 뿌리고 있었는데 이 캠페인으로 예약하니 조식/석식이 포함된 다다미방을 5만원 안되는 가격에 예약할 수 있었다. 가장 원했던 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장기간 머무르며 설국을 구상했다는 다카한 여관이었지만 이 곳은 그 유명세 때문인지 이 비수기에도 비싼 가격을 받고 있고 별다른 캠페인도 없었다.

에치고 유자와 역에 내리니 6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서늘했다. 숙소로 가다가 설국 기념관을 관광하고 체크인 하기로 한다. 구글 맵에서는 가까워 보였는데, 숙소까지는 꽤 먼 거리를 걸어가야 했다.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니 오히려 ‘없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정확하겠다. 이 곳에 신칸센이 처음 놓이고 경제가 부흥할 1980년 초반에는 스키리조트가 개발되고 숙소가 우후죽순 생긴 것 같다. 지금은 우리나라처럼 스키의 인기도 많이 줄어들고, 그 때 지어졌던 리조트들이 많이 낙후되고 다른 지역의 경쟁자들도 많이 생겨서 그 때만큼의 호황은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것 같다.

아뿔싸, 설국 기념관이 보수 공사로 문을 닫았다. 비수기인 여름에 맞춰 내부 공사를 진행하고 겨울에 다시 문을 여는 것 같았다. 걸어오느라 발이 화끈거려 건물 앞 족욕 탕에 잠시 짐을 내려놓고 족욕을 했다. 족욕을 하는 사람도 물론 없다. 물에 떠있는 하얀 각질로 사람들의 흔적을 느꼈다. 가끔 일본 특유의 박스형 경차가 몇 번 지나쳐 갈 뿐이다. 산지 지형이라 숙소로 올라가는 길도 꽤나 오르막이다. 알고보니 내가 예약한 숙소 (유자와 토에이 호텔) 바로 옆에 스키 리프트가 있었다. 겨울에 스키를 타러 온 관광객들은 숙소에서 바로 스키를 들고 나와 탈 수 있게 편리해보였다. 호텔 주차장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단체 관광객을 태우고 역을 오가는 대형 버스들이 몇 대 서있었다.

로비는 꽤 넓었지만 오랫동안 리모델링 하지 않은 색바랜 모습이었다. 우리나라의 가야산이나 거제 등 예전에 인기가 있을 법한 관광지에, 마이카 붐을 타고 지어진 건물 내부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중년의 아주머니 직원과 그 보다는 약간 젊어 보이는 남자 직원이 있었다. 역시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영어로 체크인을 하겠고 아고다에서 할인 캠페인을 통해 예약했다고 이야기했다. 알겠다고 하고 여권을 달라고 한다. 잠시 뒤 직원이 조식과 석식은 포함되지 않는 숙박 플랜이라고 이야기 했다. 내가 아고다에서 확인한 것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예약한 아고다 예약 기록에는 니가타현에서 진행하는 특별 캠페인으로 조식과 석식을 포함한 플랜이라고 나와있었다. 스마트폰을 들이 밀었고, 영어 대신 일본어를 썼다. 아마 이 호텔에 이 플랜으로 숙박한 사람이 나 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한참을 서류를 뒤적뒤적하더니 알겠다며 조식과 석식을 포함한 숙박이라고 이야기했다. 정말 그들의 실수 인지, 아니면 내가 이야기하고 증거를 들이미니 마지못해 해준 것인지는 모르겠다.

숙소로 올라가 다다미 방에 잠깐 누워있었다. TV를 틀었더니 일본 아이돌이 한국 여행을 하는 프로그램이 하고 있었다. 아침에 김포공항으로 입국해서 그날 저녁에 김포공항으로 출국하는 당일 치기 여행이라고 한다. 나도 힘든 여행을 하고 있지만, 그 여자 아이돌은 하루 종일 저 텐션을 유지하는 것이 나보다 더 힘들 것 같았다. 오늘이 여행 중 유일하게 나만의 TV와 화장실이 있는 숙소였다. 사실 저녁 먹을 시간까지 별로 할 것이 없기에 동네를 한바퀴 둘러보고 오기로 했다. 방금 역에서 관광객이 걸을 만한 ‘설국’ 길이 있다는 것을 지도에서 찾았었다.

설국 길은 여관 다카한으로 가는 길부터 시작한다. 여관 로비에는 설국 관련 전시가 있는 듯 하나, 왠지 투숙객이 아닌데 들어가기 뻘쭘하여 건물만 한바퀴를 돌아보았다. 여관을 지나 신칸센 철로를 거쳐 굽이굽이 동네를 살펴보다보면 여주인공이 일하던 여관이나 설국의 유명한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가 새겨진 기념비도 찾아볼 수 있다. 마을 한바퀴를 돌아 다시 기차역으로 왔다.

기차역으로 온 이유는 이 지방의 사케를 시음할 수 있는 폰슈칸이라는 상점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5백엔을 내면 코인 5개를 주는데 수십개의 사케 자판기 중 원하는 것을 코인 넣어 시음해볼 수 있다. 사케 가격에 따라 코인 한개 부터 세개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마음에 드는 사케는 병으로 구입할 수도 있는데 한 병 사고 싶었지만 이를 남은 여행 기간 내내 배낭에 짊어지고 다닐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든 기념품은 삿뽀로에서 사기로 한다. 네 종류의 사케를 나름대로 다른 것들로 골라 먹어보았는데 정말 맛이 달라서 모두 쌀을 기본으로 한 것이라고 믿겨지지 않았다. 어떤 사케는 상큼한 귤 향이 진하게 느껴지는데, 귤을 진짜 넣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향을 귤로 착각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 곳 니가타는 쌀이 유명하고 따라서 쌀로 만드는 사케가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름있는 양조장만 수십 곳이라는 듯.

사케를 병으로 하는 것은 포기하고, 편의점에서 맥주와 몇 가지 간식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오니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저녁은 아래 층에 있는 연회장에서 준다고 해서 내려갔다. 간단하게 숙박 호수를 말하고 들어갔는데, 대부분 단체 관광으로 버스를 타고 오신 정말 나이드신 할아버지, 할머니 뿐이었다. 아, 이 숙소는 비수기에 이런 영업을 하는 구나 싶었다. 거기 앉아있는 유일한 혼자, 젊은이(?)로 일본식 코스요리를 준다고 하여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접객하시는 분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다. 식사는 철저히 와쇼쿠 스타일로 생선, 조림, 된장국, 나베, 흰 쌀밥이 꽤 길게 이어져서 나왔다. 사실 건강식이긴 하겠으나 별로 자극적이지 않은 요리의 끊임 없는 행렬에 금방 질려서 그만 먹고 나갈 수 있는 시간을 노리고 있었다. 결국 후식은 패스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사 후 올라와서 조금 쉬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호텔이 조금 높은 지대에 위치해있어 마을 전경이 잘 보였다. 기대했던 설국의 풍경은 아니었다. 빌려주는 유카타를 입고 대욕장에 온천을 하러 갔다. 호텔의 다른 곳은 낡고 오래된 느낌이었지만 탈의실부터 잘 관리되고 있었다. 노천탕으로 나가보았다. 한 명이 있었지만 이윽고 나가버렸다. 배트민턴 코드 정도 넓이의 노천탕에 나 혼자 누워 있었다. 산에서 이름모를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린다. 밤 하늘의 별이 선명하게 보였다. 초 여름이지만 밤에 산에서 내려오는 쌀쌀한 바람이 느껴졌다. 일주일 넘게 진행된 오랜 여행의 피로가 풀린다. 나름 일본 대중 목욕탕을 다녀봐서 그런지 제법 익숙하게 씻을 수 있었다.

숙소로 올라와 다다미 방에서 TV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일본의 새우깡 에비센을 먹으면서 내일의 계획을 조금 생각했다. 문득 깜깜한 밤, 사람이 안보이는 호텔, 4인용 객실에 혼자 잠을 청하는 나. 약간 으시시한 느낌이 들어서 TV를 오랫동안 켜놓고 잠을 청했다. 캡슐 속에서 잠을 자는게 익숙해져서 일까.

내일은 정말 오랜만에 도쿄로 향한다. 정확히 15년 만이다.

12일 간의 일본 기차 여행 – 이세, 나고야, 마츠야마

‘성지’는 어느 곳일까? 종교라면 명동성당과 같은 각자의 ‘성지’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성지는 어디인가? 고조선과 단군 신화를 믿는 분들은 마니산 참성단일 수 있다. 현대사를 중요하게 보는 사람들은 경복궁이나 서울시청, 광화문 광장 등을 꼽을 수도 있겠다. 또 서울시 동작구 현충원도 근처에서는 경적도 울리지 말라는 안내가 있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다. 조선시대의 왕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종묘도 중요 사적이다. 내가 가본 곳 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지 답다’ 느낀 곳은 아산 현충사이다.

그러면 일본의 성지는 어디일까? 일본은 왕이 있는 나라고 이것도 하나의 종교라고 간주하면, 그 최고의 성지는 아마 이세신궁이 될 것이다. 이 곳에는 일본 천황가의 시조라고 여겨지는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신사이자, 전국 신사들의 최고 정점에 있는 황대신궁이 위치해있다. 바로 그 위치에, 나고야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남짓 가야하는 이 곳 이세시에 최고신 아마테라스가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따라서 이 곳은 천황가를 신성시하는 일본 보수의 심장이자 총 본산이다. 이 곳은 천황 만이 공물을 바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일본 왕가에 내려오는 청동검, 거울, 옥 구슬인 삼종신기를 아마테라스가 천황가문에 수여했다는 전설도 있다. 그리고 이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거울이 이세신궁에 있다.

아침 일찍 다시 짐을 싸들고 숙소에서 나왔다. 이세신궁에 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나마 가까운 오사카, 교토, 나고야에서 모두 상당히 거리가 있다. 나고야에서는 JR 미에 특급을 타면 1시간 40분이 걸린다. JR패스로는 대부분 무료이지만 중간에 사철을 이용하는 일부 구간이 있어 400엔 정도를 징수한다. 사철 구간이 시작되면 JR 승무원이 돌아다니면서 검표하는데 JR패스를 보여주면 돈을 더 내라고 한다. 가기 어려운 만큼 이 곳이야 말로 내가 생각한 방문 원칙에 부합한다. 이번 여행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며, 한국인이 거의 방문하지 않는 곳이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방문기가 몇 올라오긴 하지만, 에베레스트를 트래킹하는 한국사람보다 훨씬 적은 것 같다.

나고야역에서 7시 40분 출발하는 ‘미에’라는 특급열차를 타기로 한다. 나고야 역사 안에 있는 까페에서 빵을 사서 하나 먹고, 혹시 배가 고플까봐 다른 빵집에서 빵을 두 개 샀다. 물도 하나 샀다. 짐은 나고야역 코인라커에 하루 종일 맡기기로 했다. 특급 미에 열차에는 나이가 지긋한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다. 하긴 젊은이가 두 시간씩 기차를 타고 할 것이라고는 신사 구경 밖에 없는 곳에 왜 가겠는가. 대부분 신사 참배를 가는 분들이다. 긴 시간 타고 가야 하는데 혹시 사람이 많아 자리에 앉지 못할 까봐 지정 좌석권을 따로 구입했다. 물론 JR패스가 있어도 이 좌석권은 돈을 더 내야 한다. 열차 안에는 일부 구간이 나뉘어 있고 앞 쪽은 지정석이다. 뒤쪽에 구역에 자리가 없어 서 있어도 앞쪽으로는 넘어오지 않는다. 미니 설국열차 같다.

나는 이세시에 두 시간 밖에 머물 수 없다. 오후에 나고야성을 보고 오후 늦게는 마츠야마까지 이동해서 숙박을 해야 한다. 하루에 장거리 특급 열차를 세번 타야 한다. 일정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이세신궁은 보통 내궁과 외궁으로 나뉘는데, 외궁은 이세시 역에서 걸어갈 정도로 가깝지만 내궁은 버스를 타고 꽤나 가야한다. 일반적인 경건한 마음의 참배객들은 외궁을 먼저 보고 다시 버스를 타고 내궁으로 가는 것 같지만 나는 내궁을 먼저 이동해서 살펴보고 시간이 남으면 역 근처의 외궁을 보기로 한다. 만약 시간이 모자라면 외궁은 패스하고 나고야로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세시에 도착해서 버스를 기다린다. 쉬운 한자로 ‘내궁’이라고 써 있어서 다행이다. 혼란스러운 것은 따로 있다. 버스를 앞에서 타고 뒤로 내리는 것일까, 아니면 뒤로 타고 앞으로 내리는 것일까. 일본도 지역마다 다른지 지역 별로 정리해 놓은 문서가 검색된다. 에스컬레이터도 오사카 사람과 도쿄 사람은 서로 다른 편에 서서 탄다. 기다란, 다른 민족이 서로 섞여 사는 나라라 관습도 지역별로 상당히 차이가 난다.

버스를 타고 생각보다 오랜시간 달려간다. 사람이 많아 보이는 마을은 없어 보인다. 이세시의 교외를 달려 넓고 깨끗한 버스 정류장에 내린다. 내궁으로 가려면 상징과도 같은 우지바시라는 커다란 목조 다리를 지나 들어가게 되는데, 다리 앞에는 커다란 주차장이 또 별도로 있다. 얼마나 많은 방문객들이 오는지 짐작이 간다. 품이 넉넉한 까만색 정장과 노타이 차림의 할아버지들과, 가죽 자켓의 큰 소리나는 오토바이를 탄 마초들이 뒤섞여 있다.

다리를 건너 내궁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침 일찍 비가 와서 더욱 진해진 신선한 녹색의 내음과 바둑알 크기의 자갈이 깔린 길에서 나는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다. 하나 같이 깨끗한 옷차림에 정중한 몸가짐이다. 누구도 서두르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정원이 만명 쯤 되는 초등학교의 학부모 참관 수업에 가는 느낌이다. 일찍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은 도리이를 지날 때마다 돌아서서 목례를 한다. 아마 어떤 신에게 무엇인가 빌고 있겠지. 나는 종교는 없지만 성당이나 사찰에서 기도를 하거나 절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 없겠다. 나 뿐 아니라 드문드문 보이는 목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마 외국인 관광객 일 것이다.

깨끗한 물이 진입로 옆으로 흐른다.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여 물고기가 산다면 숨을 곳이 없을 것 같다. 이 정도 깨끗한 물과 수량을 가지고 있는 곳은 한국에서 보기 어려웠다. 확실히 한국보다 젊은 땅이다. 참배 전에 이곳에서 손을 씻거나 하는 것 같다. 일본의 신사 앞의 물은 마시는 것이 아니라 손을 씻거나 입을 헹구는 용도다. 더 걸어 들어가 내궁에 다다른다. 크게 건물 몇 동이 있는데, 각자 다른 신을 모신다고 한다. 그 중 가장 깊숙하고 사람이 많은 곳이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신사이다. 이곳만은 가까이 접근이 불가능하고 사진 촬영도 금지된다. 특별히 예약한 소수 인원만 내부자의 인도하에 직접 참배가 가능한 것 같다. 특별히 더 잘 차려입은 중년의 남성들이 신관 복장을 한 남자의 인도를 받아 건물의 더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다. 초등학교 동창생 보다는 중견 기업 임원처럼 보였다.

그 유래와 상징성과 다르게 건물 자체는 초라해 보인다. 건물 자체에 덧붙여진 화려한 장식 등은 전혀 없으며 딱히 역사나 고풍이 깃들어있지도 않다. 심지어 나무도 새것 같다. 이는 ‘식년천궁’이라는 독특한 관습 때문이다. 20년마다 새로 건물을 짓고, 기존 건물은 허물어버린다. 즉, 지금 건물도 최대 20년 이내 지어진 것 이라는 의미다. 한국에서는 허가되지 않는 재건축 방식이다. 이런 20년 주기의 재건축과 이주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아 보이는데, 나는 이러한 반복 행위 자체가 그 영원성과 관련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돌아다니다 보면 오랜 역사 때문인지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 들이 많다. 그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세 개의 작은 돌을 모아 놓은 곳인데, 신령한 힘이 있다고 믿어진다고 한다. 건물을 이전하여 지을 위치를 표시해 놓는 곳이라는 설명을 나중에 읽었다. 따뜻한 기운이 나온다고 해서 사람들이 손을 올려보고 있었다. 나도 손을 올려 보았는데 듣고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서 조금 신기했다. 현대에 와서 미신이나 전설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지만, 다양한 이야기를 눈으로 보는 사물과 엮어내어 만든 이야기들이 없다면 여행을 다니는 재미는 많이 떨어질 것 같다. 수 천년을 믿어온 전설, 전승, 미신, 옛 이야기 들이 최근 몇 백년 사이에 모두 것이으로 부정 당하고 있다. 그 몇 백 년 사이의 지식이 영원할 것인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다시 버스를 타고 외궁으로 향한다. 정확하게는 역으로 돌아와서 역에서 다시 시작한다. 외궁은 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 내궁보다는 그 번잡함이 훨씬 덜했다. 아침 이른시간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여기도 관광 침체기를 겪고 있는지 문을 연 상점 들이 많이 없어 보였다. 깨끗하고 꼼꼼하게 빈틈없이 커다란 돌로 메꾸어진 길이 걷기 편했다. 하지만 만약 시간이 없다면 내궁만 보고 외궁은 꼭 보지 않아도 좋겠다. 관리 상태나 사람들, 볼거리, 숲의 울창함 등 모든 것이 외궁은 내궁만 못했다. 모든 것이 내궁의 복제로 보여 휙 둘러보고 다시 역으로 향했다.

다시 역으로 걸어간다. 시간이 남았길래 최단거리로 가지 않고 빙 둘러 가기로 한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파스모 카드를 충전하고, 삼각김밥 하나를 사서 역전 벤치에 앉아 먹었다. 역에서는 끊임없이 참배객들이 나오고 버스는 이들을 가득채워 내궁으로 달려간다. 서둘러 본 탓에 다행히 두 시간안에 모두 둘러보고 열차 출발 까지는 십분 정도가 남아있다. 아침에 사온 빵이 남아있지만, 더 이상 빵으로 배를 채우기 싫었다. 또 빵은 열차 안에서 먹어도 괜찮은 것 같지만 삼각김밥은 부스럭거리는 것이 왠지 민폐 같았다. 여행 시작할 때 후쿠오카의 오호리 공원에 앉아서 한가함을 즐긴 후 이런 여유를 가져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다시 특급 미에 기차에 올라탔다. 가는 길보다 오는 길이 더 길게 느껴진다. 한참을 달려 나타난 나고야 역과 그 근처의 고층빌딩 군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그곳까지 이어진 철도를 따라가는 길 위에서 나는 우주 정거장에 도킹하는 우주선에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고야 역에 도착하기 조금 전에 이치란 라멘을 먹어보기로 결심했다. 정작 본고장인 규슈와 후쿠오카에서는 먹지 않고 나고야에 와서 처음 접해본다. 후쿠오카에서는 그 끔찍하게 긴 웨이팅 후기를 보고는 도저히 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2시가 넘은 애매한 시간이고, 사람이 없으리라 예상했다. 나고야 역을 나와 동쪽으로 조금 걸어가야 했다. 지하 아케이드를 통해 갈 수 있는 것 같지만 그러면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아 지상으로 걸어가기로 한다.

어제는 서쪽 출구 쪽만 살펴봤는데 동쪽 출구로 나오니 번잡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도 이 정도의 번화가는 찾기 쉽지 않다. 금요일 밤의 강남역과 사람 수는 비슷하지만, 그 규모는 이쪽이 더 크다. 물론 나고야보다는 도쿄가 훨씬 더 번잡하다. 신주쿠 역의 횡단보도와 지하철 개찰구 규모를 처음 봤을 때 놀란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신도림 역을 4개 쯤 이어 붙인 모습 같았다. 일본의 인구는 2010년 즈음 부터 감소 중이라고 한다. 한국도 4년 전부터는 감소 중이니 딱 10년 차이를 두고 인구 감소가 시작되었다. 인구 수와 번화한 모습으로만 따지자면 절대 이 모습을 따라잡을 수 없겠다. 아무튼 아침에는 이세 시의 청정 자연에서 깨끗한 물에 손을 씻다가 갑자기 나고야에서 주말을 즐기러 나온 수 많은 젊은이들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나고야에서도 이치란 라멘 그릇을 내 앞에 놓기까지 30분이 걸렸다. 라멘을 후루룩 마시고, 사전에 주문을 받고 주문도 극히 빨리 서빙되는, 식사를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하는 시스템임에도 30분이나 걸렸다. 줄의 앞쪽에는 한국에서 온 젊은 청년들이 한국 여성과 일본 여성을 비교하며 떠들고 있었다. 도쿄나 오사카 같은 곳이 아닌 나고야나 소도시들은 항공료도 비교적 싸서 친구들과 여행오기는 좋을 것 같다. 도미토리와 이치란으로 점철된 여행이라면 젊은이들도 경제적 부담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나도 똑같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맛을 가진 이치란 라멘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나고야 성으로 간다. 아이폰에 파스모 카드를 심고 이걸 이용하니 전국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남은 돈은 삿뽀로에서 귀국하기 전에 편의점에서 간식거리를 몇 개 사서 해결 할 수 있었다. 나고야 성 근처에도 식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 사람들은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나 했더니 오늘이 주말인 것 같았다. 한가로이 나무 밑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부러워보인다. 커피를 마시는 여유보다는 가족과 함께하는 주말이 부러워보였다. 오랜 기간 여행을 하니 이제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 쯤 입장한 나고야 성은 오사카 성과 마찬가지로 근대에 와서 새롭게 만든 콘크리트 건축물로 천수는 보수 공사 중이라 입장할 수 없었다. 대신 다이묘가 거주하고 외부의 방문 인사를 접견하는 기능으로 쓰인 혼마루 어전은 대대적으로 새롭게 건축하여 관람할 수 있었다. 지속적으로 복원을 하며 마침 최근에 작업이 완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일본 성을 가면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같은 말을 쓰는데, 중심부인 천수부터 가장 가까운 내부, 한겹 성 밖으로 나간 곳, 거기서 한겹 더 나간 곳 등을 단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어전이니 만큼 권력자를 접견하려면 복잡한 복도를 겹겹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바닥의 높낮이, 그리고 섬뜩하게 묘사된 맹수 그림들은 권력의 상하 관계를 현실로 소환한다. 돌아나오는 길에 보이는 부엌 등도 흥미로웠다. 아마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어전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명나라 사신을 접견 했을 것이며, 여기서 화친은 없으며 정유재란을 일으켜야겠다 결심했을 것이다. 그 결심 때문에 한국인은 최대 백만명이 죽었다. 또 한국에서 ‘에비’라는 말이 어린아이들을 겁주는 표현으로 만들어졌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막 문을 닫고 있었다. 입구에서 안내해주던 아저씨가 5시까지 마지막 입장이라고 천천히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빨리 뛰어오라고 소리친다. 5시가 살짝 넘었는데 그래도 이런 융통성은 있나보다.

성을 둘러 나오다보면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동상과 돌을 볼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른팔로 나고야 성 건축시에도 그 수완을 발휘했다고 하는데 이 성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울산왜성, 며칠 전에 둘러보았던 구마모토 성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사진의 돌은 이 나고야 성 건축에 쓰인 돌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하고, 어디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원래 이 자리에 있던 돌을 다듬어 이용했다고 한다. 그의 동상도 실제 그가 건축을 감독했다고 여겨지는 돌 위에 세워 놓았다.

다시 나고야 역으로 지하철을 타고 돌아간다. 지하철 나고야 성역에 도착해서 건너편을 살펴보니 일본과 서양 양식이 섞인 오래된, 커다란 건물이 눈에 띈다. 구글 맵이 이 건물은 시청이라고 말해주었다. 조금 더 남쪽으로는 나고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추부 타워도 있었지만 가보지는 못했다. 이세신궁을 보느라 오늘 하루를 다 쓴 탓에 사실 가보고 싶은 곳을 못 둘러봤다. 나고야 과학관이나 아츠타 신궁도 가보고 싶었지만 언젠가 나고야에 올 기회가 있다면 쉽게 둘러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뤄두었다.

나고야역으로 서둘러 돌아온 이유는 특급열차 시나노를 타고 마츠모토시로 가기 위해서이다. 오늘 하루 종일 역사 코인라커에 맡겨 놓았던 짐을 찾았다. 열차에서는 특별히 가장 앞 자리를 예약하려고 했으나 인기가 있는지 누군가 한 자리를 예매했다고 했다. 텅텅 빈 1등석 칸의 가장 앞 두 자리에 나란히 앉아가는 것은 민망한 일이라 그냥 앞에서 두 번째 자리를 달라고 했다. 시나노 특급열차는 나고야와 나가노를 잇는 열차로 특별히 멋진 경치를 볼 수 있어 유명하다. 가장 앞 자리에 앉으면 조종석 앞까지 유리로 훤하게 들여다보인다. 계곡와 협곡을 따라 산속을 달리는데, 특히 우측에는 일본 알프스라고 불리는 3000m 이상 급 고산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날씨 좋은 낮이면 경치를 즐길 수 있겠으나 나는 나고야 역을 떠나자 금새 날이 어둑해져서 약간의 노을 풍경 밖에는 살펴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도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준령고봉들임은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이 일본 알프스를 찾는 많은 여행객, 여행 상품이 있다.

열차에 앉아있는 사이 파란색과 붉은색이 서로 다투던 하늘은 어느 사이에 깜깜해졌다. 깊은 계곡 속, 빛이 없는 공간을 홀로 달리는 열차는 마치 은하철도999를 연상케 했다. 열차 기관사와 그 보조, 그리고 나보다 빨리 첫 번째 줄을 선점한 ‘중국인’이 아닐까 생각되는 관광객 두 명, 그리고 나. 모두 네 명이 깜깜한 우주 공간을 날아간다. 두 시간 정도를 달려간 열차는 마츠모토 역에 도착했다. 역사 밖으로 나오니 두 시간 전의 나고야와 완전히 다른 공기의 질과 온도가 느껴졌다. 마츠모토 시는 고봉사이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도시다. 이번 여행 중 처음으로 바다를 접하지 않은 도시이다. 또 이번 여행 전에는 이름도 알지 못했던 곳이다.

오늘 하루는 신칸센을 타지 않고도 이세시를 왕복하고 나고야를 거쳐 마츠모토까지 달려왔다. 어서 숙소도 들어가서 쉬고 싶은 마음에 식사는 역 앞에 바로 보이는 맥도널드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의외로 맥도널드에는 서양인 관광객들이 눈에 보인다. 여기에는 무엇을 보러 왔을까? 이 고장이 최고의 와사비 산지로 유명하니 그걸 맛보러 오진 않았을 텐데. 곧 연인이 될 것 같은 고등학생 커플들 사이에서 빅맥 라지 세트를 먹었다. 다들 들키지 않으려는 은밀한 연애를 하는 듯 조용조용 소근거린다. 나는 주말 저녁 이 동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행색의 사람 같았다. 후쿠오카, 나가사키, 히로시마, 나고야를 거쳐 마츠모토까지 나는 점점 한국인이 희박한 곳으로 들어간다.

숙소는 호텔 M 마츠모토라는 곳으로 정했다. 들어가는 입구를 찾는데 조금 오래 걸렸지만 역에서 가깝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만족한 숙소였다. 캡슐 호텔에 몇 박을 해보니 이 캡슐이라는 것에도 급이 보였다. 이를 테면, 올라가는 사다리가 튼튼하고 밟기 좋게 되어 있는지, 너무 위아래 넓은 간격으로 되어 있지 않은지, 손잡이도 양쪽에 붙어 있는지, 캡슐 내부는 넉넉한 공간인지, 원통형이라 실제 공간이 좁은 경우가 있지 않은지, 직육면체 형태로 파여 있어 충분히 넓게 쓸 수 있는지, 내부의 조명, 콘센트는 넉넉하거나 누워서 컨트롤 할 수 있는지, 심지어 어떤 곳은 이어폰을 꼽아 라디오도 들을 수 있다. 입구를 가리는 커튼은 두꺼운지, 빈틈 없이 들어오는 빛을 가릴 수 있는지, 안쪽에서 커튼을 걸어 잠글 수 있는 고리 같은 것은 있는지, 만약 맞은 편에도 침대가 있다면 비스듬하게 교차로 배치하여 내부가 너무 훤히 보이지 않도록 했는지 등등 신경 쓰면 숙박하는 사람에게 조그만 편의를 줄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이 보였다. 숙박업을 하려면 일단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자봐야 할 것 같다.

보통 젊은이들이나 해외여행객이 많이 이용하는 도미토리형 숙박들은 이러한 편의 사항들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짜피 한번 오고, 하루 이틀 잘 사람들인데 뭐. 그냥 나무로 된 삐걱거리는 가장 싼 침대, 자고 일어나면 허리가 뻐근해지는 매트리스로 숙박업을 시작한다. 반면 일본 내 출장객이나 단기 여행객들이 숙박하는 내국인 대상 업소, 혹은 체인 캡슐 호텔들은 깜짝 놀랄 만큼 섬세하게 이런 것들을 배려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늘 하던 루틴대로, 씻고 옷을 갈아입고, 세탁을 하고, 건조기를 돌리고, 내일의 일정과 기차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 정확히는 캡슐 안으로 쏙 누웠다. 로비에는 엄청난 수의 만화책이 있어서 자유롭게 볼 수 있는데 슬램덩크니 드래곤볼이니 하는 유명 만화들이 있었다. 특이하게 정수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얼음물을 상시 비치해 따라 마실 수 있었다.

참고로 마츠모토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특히 점을 찍어 놓은 호박으로 유명한 쿠사마 야요이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우리 동네 과천 현대 미술관 앞마당에 이 할머니의 호박이 놓여있는데, 내가 재미있어하는 가느다란 인연을 찾는 재미를 느꼈다. 나중에 아는 척 할 거리가 하나 늘었다. 근처에 쿠사마 야요이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미술관이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 방문할 시간은 없었다. 아침 일찍 나와 마츠모토 성을 보기로 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어느 덧 여행도 절반을 넘어가고 있다.

12일 간의 일본 기차 여행 – 히로시마, 나고야

환풍기인지 선풍기일지 모를 소리에 잠을 설쳤다. 어느 쪽 기능도 잘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미토리 이층 침대 중 위쪽에 누웠더니 천장에 붙어 있는 팬 소리가 시끄러웠다. 헐거운 커버 때문에 나는 불규칙 소음이 여간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것이 아니다. 7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서 이른 열차를 타기로 했다. 시간도 없거니와 이 숙소에서도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모두들 잠들어 있는 깜깜한 시간에 살금살금 샤워실로 간다. 모든 게스트하우스 샤워실의 구조가 어찌나 똑같은지 놀랍다. 짧은 여행의 중간 쯤 지났을 뿐인데 샤워 루틴이 생겼다.

오늘 아침의 목적지는 이츠쿠시마 신사이다. 한국에서 “이츠쿠시마 신사”에 다녀왔다고 하면 아마 대부분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바다 위에 도리이가 떠 있는 사진을 보여주면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라고 답할 것이다. 아직 실제 사진을 보여준 적은 없다. 일본에서는 유명한 여행지지만 한국 사람들은 많이 방문하지 않는 것 같다.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이 많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인은 대부분 후쿠오카, 도쿄, 오사카 그리고 삿뽀로에 몰려있다. 일본 관광청이 하는 일은 외국인 관광객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분산 시키는 것이다.

이츠쿠시마 신사까지는 택시로 가는 사람,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 심지어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2023년 방문한 G7 정상들이 배를 타고 이동했다. JR패스를 이용하는 관광객에게는 히로시마 역에서 미야지마구치까지 가는 JR일반 열차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편하고 저렴하다. 저렴한 것이 아니라 추가 비용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차도 무료로 이용할 뿐더러 미야지마 섬을 오가는 페리선을 공짜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워낙 관광객이 많아 여기까지 종점인 사철도 있다. 또한 JR페리와 다른 기업이 운영하는 페리 왕복을 운영하고 있다. JR패스 이용자가 괜히 돈을 내고 이쪽을 이용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부지런한 샤워를 하고, 짐을 싸들고는 숙소를 나선다. 이른 출근시간이라 본격적인 러시아워는 아니다. 똘똘한 학생과 성실한 샐러리맨만 보였다. 배낭을 들쳐매고 갈 수는 없으니 코인라커를 찾아 짐을 맡긴다. 저렴하면 200엔, 비싸면 500엔 정도를 받는다. 구글 리뷰에는 더 저렴한 가격으로 나왔으나, 최근에 가격이 많이 올랐나보다. 인플레이션이 비켜갈 틈새는 없다. 나고야, 히로시마 등 커다란 역사 내에서는 대부분 500엔이었다. 짐을 맡기면 바코드가 출력된 종이 하나를 받을 수 있다. 찾을 때 이 종이를 스캐너에 스캔하면 문이 자동으로 열려서 편리하다. 다만, 이 종이를 잃어버릴 경우 전화를 해야 한다. 편리와 불편도 동전의 양면이다.

학생들의 이른 등교길과 섞여서 기차를 타고 30분 가량을 달려간다. 앉아있을 순 없어 서서 풍경을 바라본다. 몇 개의 커다란 강을 건너간다. 일본의 다른 대도시와 닮았다. 히로시마도 바다를 낀 만에 위치해 있고 도시 가운데를 커다란 강이 흐르고 있다. 어제 원폭 기념관에서 본 모두가 불타 없어져버린 너른 풍경과 대비된다. 모든 것이 그 이후 새로 세워졌으리라. 서서 다리가 슬슬 아파질 무렵 다다른 미야지마구치 기차역은 소박한 기차역이다. 서울의 1호선을 타고 신도림을 지나 한참 가면 나오는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할 역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이름 모를 역과 마찬가지로 선로를 넘어가는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역사 밖으로 나왔다.

대부분 관광객들이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 식사 할 시간이 없으므로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하나씩 샀다. 이를 손에 하나씩 들고는 페리를 타러 걸어가는 길에 먹었다. 생각해보니 편의점 빵으로 떼우는 식사는 20대 이후 해본적이 거의 없다. 젊었을 때 신촌이나 이대역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났다. 20대에는 고등학교를 다녔던 과천을 벗어나 그런 곳을 돌아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신촌역 상점들의 불이 모두 꺼졌고 나는 우유를 그 때의 절반만 마신다. 기차에서 내린 한무리의 사람들이 내가 편의점에서 빵을 사는 동안 모두 선착장으로 몰려가서 거리는 한산했다. 마치 북미에서 온 버팔로 떼가 쓸고 간 것 같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어 아침부터 조금 덥게 느껴졌다.

페리는 오래되어 보이지만 커다란 배였다. 히로시마 만 안쪽에서 험한 파도를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 퇴역이 가까워온 노령의 선박을 투입한 것이 아닐까? 노령이지만 약 30분 간격으로 부지런히 섬과 선착장을 오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도착한 덕분에 줄서 기다리는 시간도 길지 않았다. 배 안에도 앉아서 구경할 자리가 넉넉했는데 아침 10시가 넘어 돌아오는 시간에 살펴보니 관광객이 두 배는 늘어나 있었다. 배를 타면 짧은 거리라 금방 섬에 닿는다. 섬 가까이 가면 그 유명한 물 위에 떠 있는 도오리 (썰물에는 땅위에 서있는) 가 보이는데, 사람들이 온통 그 쪽에 몰려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배가 기우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이츠쿠시마에는 다양한 볼거리나 관광명소가 있는 것 같다. 케이블카를 타고 섬 정상에 올라가 히로시마 만을 둘러볼 수도 있고, 산을 넘는 트래킹 코스를 지나 섬 건너편의 신사들을 방문할 수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오늘도 수 백 km를 이동해야 하므로 이츠쿠시마 신사와 그 주위만 둘러보기로 했다. 이 곳은 일본의 3대 절경이라는 말도 있고, 신성한 산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 유명세에 비해서 딱히 느껴지는 감탄은 없었다. 3대 절경이라는 사실도 방금 기차를 타고 오면서 검색하며 알았고, 입구의 커다란 돌에 방금 인터넷으로 본 ‘일본삼경 미야지마’ 글자가 있었다. 나머지 2경에도 똑같은 돌이 있는지 궁금했다.

배에서 내려 해안가를 따라 조금 걸어가다보면 유명한 도리이가 다시 보이고, 본당 건물이 나타난다. 일본 신사 특유의 강렬한 주홍빛으로 칠해져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본당 건물 전체가 물 위에 떠 있는 밀물 시간이었다. 관람객은 굽이굽이 건물 내 통로를 따라 신사 내부를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건물 내 감흥을 느낄 만한 것 보다는 본당 앞 쪽에서 바라보는 도리이와 바다의 풍경이 아름다웠다. 어느 중년의 일본인 부부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해서 한 장을 찍어드렸는데, 나 보고 찍어줄까? 물어보길래 괜찮다고 사양했다. 혼자서 포즈를 잡고 누군가에게 찍히는 것이 어색했다. 옆으로 비켜나 조용히 혼자 폰을 들고 셀카를 찍었다.

여기도 곳곳에 사슴이 돌아다닌다. 나라 공원의 사슴과 다르게 센베를 주식으로 하는 것 같진 않고 관광객에게 달려들지도 않는다. 사람과 서로에 의지하지 않고 평화로운 공존의 상태로 각자 살아가는 것 같다. 번잡한 신사보다 주위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즐거웠다. 잠시 앉아서 바다를 살펴보기도 하고, 가게를 열 준비를 하는 주인들의 바쁜 이야기를 들었다. 여행에서는 이렇게 시간의 나만의 흐름을 가지는 시간이 좋다. 세상의 시간은 어디서나 그대로 이지만 관찰자의 시선이라면 나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도록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미야지마에서 1시간 반 정도를 보낸 후 다시 히로시마 역으로 돌아왔다. 히로시마 역에서는 에키벤을 샀다. 에키벤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역마다 고유의 에키벤을 만들어 판다거나, 이 것을 먹기 위해 그 지역으로 여행을 한다거나. 한가지 말해주지 않는 것이 있다.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국민성이 만든 기차 안에서 먹도록 만든 도시락이라 모두 차가운 음식 뿐이다. 냄새 없이, 오로지 식감과 혀의 맛으로 먹을 수 밖에 없다. 즉 도시락이 맛 있는지 맛 없는지는 취향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덜 맛있게 먹는 느낌이다. 아무도 데워달라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젓가락을 주지 않아서 물어보니 젓가락은 도시락 안에 들어있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신칸센을 타고 가는 가장 장거리 구간이다. 히로시마에서 나고야까지. 500km가 넘는 거리지만 두 시간 조금 넘으면 닿을 수 있다. 중간에 오카야마, 히메지, 고베, 오사카, 교토 구간을 모두 지나쳐간다. 히메지, 고베, 오사카, 교토는 모두 수 차례 방문했던 곳이다. 오카야마의 고라쿠엔이나 오츠시의 비와호 등은 꼭 방문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비와호 주위를 도는 렌터카 여행 등은 꼭 해보고 싶다. JR패스로는 직행을 탈 수 없어 중간에 한번 갈아타야 한다. 교토역을 지날 때는 오늘 쪽으로 동사의 오층탑이 보였다. 한달 전에 가족과 둘러보던 그 곳이다. 문득 같이 하는 여행이 그리워졌다.

나고야 역에 도착하니 두 시가 넘은 시간이다. 지하철로 갈아타고 두 정거장 가량 이동하여 사코역에 내렸다. 오늘 이렇게 바삐 움직인 이유가 있다. 오후의 목적지는 도요타 산업기술 기념관이다. 이번 여행 유일의 ‘신사, 정원, 공원, 박물관, 성’이 아닌 곳이다. 나고야는 공업도시로 특히 도요타 자동차의 본사가 있는 곳으로 알려져있다. 엄밀히 말하면 도요타 자동차의 본사는 근처에 있는 도요차 시에 위치해 있으나 도요타를 창업한 곳은 나고야의 이 산업기술 기념관 위치라고 한다. 도요타는 일본 기업으로는 가장 크고, 세계 자동차 기업 중에서는 테슬라 다음의 시가 총액을 자랑한다. 판매 대수 기준으로는 가장 많은 자동차를 판매하는 회사이다.

관람은 유료이지만 무료 코인라커를 쓸 수 있어 편리했다. (이 정보를 미리 알아 나고야 역에 짐을 맡기지 않고 들고 왔다) 관람은 5시까지 가능했는데, 조금이라도 여유있게 둘러보려면 최소한 두 세 시간은 필요하니 꼭 시간 여유를 두고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 섬유 기계관과 자동차관으로 나뉘어 있는데, 섬유 기계관에서 시간을 너무 쓰면 뒤 쪽의 자동차관을 관람할 시간이 없으니 적절히 시간을 배분하는 것이 좋겠다. 아이와 같이온 부모, 자동차에 관심이 있는 커플,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한국 가족 외에는 외국인은 거의 못 본 것 같다.

입장하면 압도적인 크기의 원형 방직기계가 나타난다. 도요타는 원래 자동 방직기계를 만드는 회사로 출발했다. 베틀로 천을 짜던 시기에서 벗어나 자동화된 기계를 이용하여 생산량이 크게 늘었는데 이 것을 원형으로 구성해서 같은 공간에서 훨씬 더 집약적인 생산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러한 몇 가지 핵심 특허를 개발하고 이 권리를 영국에 팔았는데 이 것이 바로 자동차 제조에 도전하게 된 자본이 되었다. 성공한 기업 어디에나 있는 창업주의 몇 가지 신화적 고난 극복의 이야기들을 홍보하고 있다.

자동차를 처음 만들 때는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적극 활용한 것 같다. 쉐보레의 자동차를 몇 대 수입해 모든 부품을 분해하여 조립 과정을 기록하고, 그 중에 핵심 부품을 독자 개발하여 그 부품을 대신 끼워 넣어 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한다. 방직기를 만들 때 보유했던 금속 단조, 주조 기술에 자신이 있었는지 원래 모델보다 더 내구성이 강한 부품을 만들어 더 높은 엔진 출력에도 버티는 실험을 반복했다. 자동차 개발의 특명을 받은 그룹의 사진을 보니 지금 회사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초창기 시절이 생각났다. 새로운 일은 모방에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방직기 등은 크게 관심이 없어 눈도장 찍듯 둘러보고 자동차 전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다만 수입차 딜러 쇼룸처럼 자유롭게 탑승해보거나 조작해보는 것은 어렵고 겉에서 둘러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전기차나 그들이 자랑하는 하이브리드 차량의 엔진이나 설계 등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현대모터스튜디오 고양에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도요타 쪽은 진짜 쓰였으나 기술의 발달로 퇴역한 기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실제 프레스나, 도색 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현대 쪽은 자동차 생산의 과정을 더 Conceptual 하게 보여주는 느낌이다. 어린이는 현대 쪽을 좋아할 것이고, 어른은 도요타 쪽을 더 좋아할 것 같다. 짧은 시간이지만 자동차 관을 열심히 둘러봤다. 전기차나 렉서스 등 고급차의 초기 차량들도 관심이 있었다. 마감 방송이 나와서 어쩔 수 없이 나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검색해보니 시시마루라는 라멘집이 괜찮아 보였다. 마침 걸어오는 길이었다. 도착했더니 가게 문앞에는 줄잡아 20명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보통 줄을 서서 먹지 않는다. 다시 구글맵을 열고, 길 건너편의 마이카리라는 카레 집을 방문했다. 그래, 일본와서 카레 한번 먹어야지. 그런데 메뉴를 키오스크에서 터치할 수 없게 막아 놓았다. 카레는 품절이란다. 같은 장소의 마츠야에서 규동을 주문했다. 몸의 많은 부분의 규동화 되어가는 느낌이다.

숙소로는 나고야역 근처의 와사비호스텔이라는 곳을 예약했다. 역 주위라 환경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실내는 어제의 숙소보다는 훨씬 낫다. 이번 여행은 아무 계획 없이 돌아다니기에 내일 어디를 방문할지 정하는 것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 기회가 아니면 절대로 오지 않을 곳, 한국 사람들이라면 거의 가지 않을 곳, 네이버 검색에 절대 나오지 않는 곳이 목표다. 마음에 드는 그러한 곳을 한 곳 정하고 내일 아침의 이른 기상을 기약하며 오늘도 잠든다. 오늘도 4만보를 넘게 걸어 다녔다. 오늘 저녁 먹은 규동으로 체력유지가 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12일 간의 일본 기차 여행 – 구마모토, 히로시마

구마모토 성을 보러 가기로 한다. 일본 여행을 역사와 유물을 중심으로 다니면 성, 절, 신사, 정원, 성, 절, 신사, 정원을 반복하게 된다. 이럴 때는 색다른 볼거리를 찾게 되는데 네이버 같은 대한민국 포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대다수는 한국 관광객들을 위한 광고 글로 의심된다. 인플루언서라는 분들도 공짜로 인플루언싱을 해주진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나는 구글 맵에서 ‘sightseeing spot’을 검색한다. 경험상 한국인이 덜 가면서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볼거리들을 추천해주곤 한다.

구마모토 성 까지는 나가사키에서도 봤던 오래된 노면 전차를 타고 간다. 노면 전차를 아직도 생산하고 있을까? 전기차 시대에 아마 아닐 것이다. 일본의 구형 기차들은 단종되면 부품이 다시 생산되지 않아 오래된 기차에서 여분의 부품을 빼내어 돌려 막기를 한다고 한다. 이 것이 큰 사고의 원인이 된 적이 있다고도 한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보다 오래된 것을 유지하는 것이 더 비쌀 지경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노면 전차란 녀석은 승하차도 불편하고, 탑승 인원도 적고, 정해진 노선만 다닐 수 있기 때문에 불편한 대중교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이 휘어지는 저상 전기 버스 등 탈 것이 훨씬 나은 대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나 저기나 뭔가를 바꾼다는 것은 여기나 저기나 쉽지 않겠지.

노면 전차는 우리나라 지하철처럼 양쪽에 마주 앉는 곳이 있고, 가운데 두 명 정도가 설 공간이 있다. 사람이 많을 때는 가방을 앞으로 맨다던지, 내릴 곳 한 정거장 전에 앞 쪽으로 이동한다던지 하는 규칙이 있는 것 같다. 역에서 사람들이 내릴 때마다 혼란스럽지 않고 모두가 자기의 다음 위치를 알고 있는 듯 움직인다. 나는 그런 규칙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니까 적당히 자리를 띄어 앉는다. 폭이 좁아 마주 앉은 사람은 조금 과장해서 쎄쎄쎄를 할 수 있어 보인다. 시선이 자주 마주쳐서 민망하기도 하다. 다행히 일본도 한국과 다르지 않아 모두 스마트폰을 하고 있다.

구마모토 성은 2016년의 지진으로 많은 곳이 무너져내리고 현재도 보수 공사 중이다. 성벽이나 천수, 건물 등이 무너져 내렸는데 이를 모두 보수하고 개관 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성 입구 위로 거대한 공중 통로를 설치하고 관광객들은 그 위로 돌아다니게 하였다. 추가 붕괴할 수 있는 위험한 곳에 관광객의 접근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인 것 같지만 굽이굽이 걷지 않아도 되고 성벽을 위쪽에서 조망하기에는 이쪽이 더 나은 듯 했다. 무너진 곳은 임시로 콘크리트를 부어 추가 붕괴를 막아 놓았는데, 아마 하나 씩 복원해 나가지 않을까 싶고 복원 공사를 위한 기부를 받고 있었다. 위 사진은 옛 벽의 경사가 너무 완만하여, 급경사로 만들기 위한 추가 공사를 한 흔적이라고 한다.

세계의 오래된 랜드마크 건축물을 보면 그 당시 사회 전체가 어떤 것에 매진 했는지 상상이 된다. 피렌체의 두모오 성당이나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에 들어간 돈으로 적어도 수년간의 빈민을 구휼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시 사람들은 대신 위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선택을 했다. 여기 동원된 수만명의 사람들은 단순히 누가 시켜서, 혹은 돈을 받기 위해 이러한 건축물을 만든 것이 아닌 것이다. 그 들은 무엇에 두려움을 느끼고 이를 극복하여 현생 혹은 내세를 살기 위해, 더 잘 살기 위해 돌을 깎고 쌓았던 것 같다. 구마모토 성벽을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 성을 쌓은 것은 무사 계급의 사무라이들이 아니라 그들이 부리고 있던 양민들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돌을 깎고 나르고 쌓았던 것은 본인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다. 무사 계급의 유지나 그들에 대한 복속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 시대는 전쟁이 잦고, 패배의 댓가는 잔혹 했을 것이다.

구마모토 성의 내부는 옛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콘크리트 건물이다. 두번이나 방문했던 오사카성과 마찬가지로 겉모습은 그럴 싸 했지만 내부는 박물관 같은 모습이다. 스마트폰 앱을 다운 받으면 한국어 안내도 지원해주고 있었다. 안내 내용은 영어나 일본어에 비하면 훨씬 부실 했다. 구마모토까지 방문하는 한국인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기에 당연한 일이겠다. 내가 방문한 성 중에는 히메지 성과 마츠모토 성이 내부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성을 관리하는 일도 꽤나 힘든 일인지 기둥을 해체했다 다시 새 것으로 교체하고 복원하는 대공사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이 성을 축조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선봉에 서서 한국을 침략했고 울산왜성 등 한국에서도 성을 쌓았다. 이때 얻었던 여러 차례의 축조 경험을 집약한 구마모토 성은 일본 성 중에서도 최고의 기술과 견고함을 자랑한다고 한다. 실제 메이지 유신 때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당시 최신의 무기로도 함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덧붙여 정유재란에서 패배 후 퇴각할 때 울산에서 많은 한국인 포로들을 끌고 갔는데, 그들이 구마모토에 정착한 울산정(울산마치)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도 역사적인 왜인촌이 있을까? 동부이촌동이 그것일까?

구마모토 성을 둘러보고 노면전차에 몸을 실어 다시 역으로 향했다. 밤에 잠들때 마다 욱신거리는 다리 때문에 내일은 더 편한 일정으로 다녀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아침에 다리의 통증이 없어지면 생각이 달라진다. 오늘도 히로시마로 가서 걸어다녀야 할 일정이 잔뜩이다. 시간이 없고 마음이 급하다. 구마모토 역 안에 있는 요시노야에서 간단하게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10시와 11시 사이, 식사를 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다. 명품 가방을 든 날씬하고 세련된 수트 옷차림의 중년 아주머니와 둘이 식사를 했다. 기업의 임원처럼 보이는 이런 분도 요시노야에서 토핑이 없는 규동을 먹는다.

구마모토 역 대합실에서 잠시 대기했다. 온통 할머니, 할아버지 뿐이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 어딜 간 걸까? 50세 이상 이용가능한 대합실과 50세 이하 용 대합실이 나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1분도 늦지 않게 도착한 신칸센에 올라 히로시마까지 달려간다. 남쪽으로 내려온 길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하로 뚫고 혼슈 섬으로 진입한다. 신칸센을 타면 상상했던 물리적 거리와 이를 이동하는데 드는 시간 개념에 혼란이 생긴다. 서울-부산 간 거리는 되어 보인다. 사악한 가격이지만 약 한시간 40분이면 히로시마에 닿을 수 있다.

히로시마에 내리면 규슈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규슈는 동양인 관광객, 특히 한국과 중국인이 대다수였다면, 히로시마나 오사카, 도쿄는 서양 관광객의 수가 크게 늘어난다. 신칸센 1등석 그린샤의 요금은 일반적인 직장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싸다. 기본적인 신칸센 요금이 우리나라의 KTX보다 두 배 정도 비싸다고 느끼는데, 여기서 1등석은 30% 정도는 더 내야 한다. 오늘 아침 달려온 구마모토-히로시마 구간도 15만원은 족히 든다. 신칸엔은 사실상 비행기와 경쟁한다. 따라서 신칸센 1등석은 기업 고위직이나 대표, 돈에 구애 받지 않고 업무를 위해 탄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보인다. 나 같은 배낭에 반바지, 샌들 차림의 여행객은 거의 보지 못했는데 히로시마 구간 부터는 가족 동반의 서양 여행객이 급격히 늘어났다. 아마 모두들 JR패스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리라.

숙소는 Guesthouse akicafe inn라는 삼만원 남짓의 도미토리 룸을 예약했다. 신칸센은 그린샤를 타지만, 숙소는 최하급이다. 시설이 좋지 않고 비싸더라도 많이 걸을 수가 없기에 최대한 역 근처의 숙소를 잡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떠나야했기 때문에 역에서 먼 숙소를 잡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오로지 위치만 보고 선택한 숙소였다. 하지만, 이번 여행 최악의 숙소가 되고 말았다. 아직 체크인은 이른 시간이라 배낭을 숙소에 두고 서둘러 히로시마 평화기념 박물관으로 향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곳이라 역에서 가는 버스들이 잘 되어 있고 미리 만들어 놓은 파스모 패스를 편리하게 이용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만난 곳이다. 특히 절반 이상은 서양 사람인데,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을 찾아오고 있다. 누구는 승리를 기념하려고, 누구는 단순 호기심으로 찾아 왔을 것 같다. 여기서 모두들 원자폭탄의 피해를 간접적으로 나마 느껴보면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 들은 어린이 원폭 피해자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며 눈물 짓고는 한다. 폭탄은 군인만 골라서 살해하지 않는다.

나가사키보다 규모는 훨씬 크고 둘러볼 전시품도 많았지만, 나가사키 전시관보다 낫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아마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고 전시를 기획한 사람의 메시지보다는 더 직접적인 참상을 적나라하게 느끼고 싶다면 나가사키 쪽을 방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주로 한국인은 어떤 피해를 입었고 왜 피해를 입게 되었는지가 더 궁금하여 관련 전시물이 있다면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전시관에서 유명한 원폭 돔으로 가는길의 왼쪽에는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도 있으니 한번 들러보는 것도 좋겠다. 위령비 앞에 생수를 놓고 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피폭시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는 후일담을 듣고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게 해주기 위한 기원인 것 같다.

애매한 시간에 먹은 요시노야 김치 규동 밖에 먹은 것이 없어서, 히로시마풍의 오코노미야키를 먹어보고자 했다. 멀리 걸어갈 수 없어 근처의 나가타야 라는 곳을 검색해서 들어간다. 의외로 혼자 온 사람은 없고 일본인도 별로 없어 보인다. 혼자 왔다고 말하니 카운터 석으로 안내해주었다. 철판에서 직접 만들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생각보다 만드는 시간이 꽤 걸리고 다 만들어 지면 이제 먹어도 된다고 말해준다. 하루종일 배고픈채 돌아다녀서 맥주 한잔과 먹는 오코노미야키는 정말 맛있었다. 흔히 한국이나 오사카에서 먹는 오코노미야키는 양배추와 밀가루 반죽? 등으로 베이스를 만드는데 여기는 우동이나 소바 중 하나를 선택해서 먹을 수 있다. 혼자 먹기에는 정말 많아서 여자 셋이 온 분이면 두 개만 시켜도 되지 않을까 싶다.

영어로 주문하면 내가 일본어를 전혀 못한다고 생각하고 직원끼리 방심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직급이 낮은 직원이 완성된 오코노미야키를 건네어 주면서 피자를 떠 먹을 수 있는 것 같은 조그만 철제 스푼?을 주는 것을 깜빡했다. 나는 그런 것을 주는 줄도 모르고, 공용 철판에서 젓가락으로 집어 먹고 있었더니, 상급자가 내가 들리도록 ‘저사람 저러고 먹고 있잖아.’ 라고 질책하니 직원이 나에게 스푼을 가져다 주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이른 저녁 혹은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원폭돔을 보러 간다. 원폭이 폭발한 곳은 원폭돔에서 수백미터 떨어진 곳 상공이라고 한다. 따라서 주면의 목조 건물들은 즉시 폭풍에 의해 다 무너졌지만 당시 유일한 석조 건물 (상공회의소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었던 이 건물의 골조는 가까스로 살아 남았다. 이후 이를 보존해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보존하기로 결정한 이후로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많은 보수를 했다. 덕분에 모든 것을 쓸어버린 히로시마 원폭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이 되었다. 공중에서 이놀라 게이가 유명하다면, 지상에서는 원폭돔이다.

원폭 돔에서 다시 히로시마 성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오전에 구마모토 성을 본지라 들어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다다르니 이미 관람시간이 지나 있었다. 나처럼 바삐 걸어온 다른 관광객들도 들어가지 못해 발을 돌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내부 관람은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걸어왔지만 그래도 코 앞에서 입장 불가라고 통보 받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히로시마 성은 전쟁 후에도 미군이 임시로 주둔 했던 흔적들이 있다. 배낭 여행자만 둘러볼 수 있는 성 구석구석을 둘러보고는 숙소로 향했다.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했고, 하교하는 고등학생과 직장인들이 많이 보였다. 숙소 까지는 이 길을 3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거리다. 걸어갈 체력이 남았으니 걸어가기로 한다.

생각보다 기진맥진해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더 이상 무엇을 먹을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으므로 오는 길에 이제는 익숙하게 생수 한 병과 빵 하나를 샀다. 영어에 능숙한 아가씨가 체크인을 해주었다. 배게와 침대 시트를 나한테 준다. 내가 직접 씌워서 쓰라고 했다. 잠시 나와서 방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굳이 왜 직접 보여주려하는지 의아했지만 곧 이해가 되었다.

도미토리 룸은 옆 건물 3층에 있다. 체크인을 할 수 있는 까페 건물을 나와 옆 건물로 아가씨를 따라 들어갔다. 3층이니 엘레베이터는 없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집이 무겁거나 크다면 쉽지 않겠다. 올라가서 발견한 좁은 방에는 어찌나 많은 침대를 넣었는지, 두 사람이 마주보고 지날 공간이 없다. 그 정도가 아니라 왼쪽 2층 침대로 올라가는 사다리와 오른쪽 2층 침대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나란히 마주볼 공간이 없어 서로 교차하며 사다리를 설치해놨다. 내가 배정 받은 가장 안쪽 침대의 2층으로 가기 위해 온전히 바닥을 걸어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사다리를 장애물 넘듯이 넘어서 건너가야 했다. 걸어가는 도중에도 퀴퀴한 땀 냄새가 빠지지 않았다. 내 침대 옆에 이 방의 유일한 창문이 있고 조그만 선풍기를 달아서 환기를 시키고 있었다. 그래, 이 것이 내가 원한 최저 수준의 여행이다.

히로시마는 외국인 배낭여행객이 많아 이른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커튼이 처진 침대가 많았다. (사람이 쓰고 있다는 뜻) 나는 내일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미리 짐을 싸고, 씻고, 그리고 방에 더 땀 냄새가 가득차기 전에 잠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씻고, 빵을 하나 먹고 내일 출발해야 하는 기차 시간표를 확인하고, 입을 옷을 발 아래, 아니 옆에 개어 놓고 (워낙 침대가 작아 내가 누우면 발이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다) 잠들었다. 오늘은 지옥불 위에서도 잠들 수 있을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