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간의 일본 기차 여행

마지막으로 혼자 해외여행을 했던 것은 2006년의 여름이었다. 그것이 나의 첫 해외 여행이었다. 그 후로는 해외여행을 혼자 떠나지 않았다. 혼자 여행을 한다는 것이 여행을 하는 즐거움의 절반은 빼앗아 버린다고 생각했다. 여행은, 특히 해외 여행처럼 오랜기간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여행은 여행 중의 시간 뿐 아니라 여행 전과 여행 후의 시간까지 그 여행에 포함된다. 여행을 같이 계획하지 못하고, 같이 추억하지 못하면 재미는 반감된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17년이 흘러 다시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빼빼마른 뺵뺵한 머리숱의 청년이었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 떠났다. 같이 떠날 수 있는 가족이 있긴 하지만 일정이 여의치 않았다. 빡빡하게 채워넣은 여행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고생을 할 사람을 찾기 쉽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17년이 흐른 다음에도 여전히 혼자 하는 여행을 싫어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여행지로 일본을 택한 이유로는 가장 간편 했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기타 지역에 비해서 비용이 비싸지 않고 준비할 것도 없으며 임기응변으로 많은 것들을 대처할 수 있다. 문화가 다른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곤란한 일이 많다. 예를 들면 호주는 4시 이후에 커피 한 잔 먹기 쉽지 않으며 동유럽은 5시 이후에 칫솔을 사기 어렵다. 일본은 전국 어디에서나 모두 24시간 가능하다.

JR 전국 패스 7일권과 북규슈 패스 3일권을 구입하고 앞 뒤로 하루 씩 붙여 넣어 총 12일로 일정을 만들었다. 아침 첫 버스를 타고 출발하고, 저녁 마지막 버스를 타고 귀가한다. 더 길면 부담 스럽고, 더 짧으면 아쉬울 것 같았는데 가장 적절한 일정이라고 생각한다. 더 깊이 들어가는 여행이라면 14일, 21일 이상도 고려해보겠지만 이 정도면 슬슬 지켜워지기 전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고 어느 정도 예상대로 였다.

도쿄는 5주, 고베, 교토, 오사카는 이미 2주 이상의 여행 경험이 있으므로 이쪽의 관광지들은 모두 제외하였다. 이러한 지역까지 포함한다면 12일의 일정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JR 패스 여행의 특성 상 주요 여행지에서 가장 유명한 것 몇 가지를 둘러보고 이동해야 한다. 한 곳에서 2~3박 이상 한다면 JR 패스를 이용한 여행은 별로 효용이 없다. 따라서 도쿄, 교토 등의 여행지는 최소 2박 이상이 필요하므로 JR 패스를 이용한 여행에는 부적절하다.

후쿠오카로 입국하여 삿뽀로로 출국하도록 계획했다. 점점 더 더워질 날씨를 고려하여 미리 남쪽 지방을 돌고 더 더워지기 전에 시원한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가을이었다면 반대 방향으로의 여행을 계획하였을 것이고, 한 여름이나 겨울이었다면 여행 방향은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기 용이한 방향으로 계획하였을 것이다. 다행히 나고야를 제외하고는 돌아다니기 힘들 정도의 더위를 만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낮에는 쉬거나 건물 내 관광을 했고 선선한 저녁에 야외 관광을 했다.

한국의 역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나라는 단연코 일본이다. 백제와의 교류 협력,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의 비극, 일제식민지, 그리고 현재까지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볼 수록 일본과의 연결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연결 고리들을 하나씩 찾아보고 이 것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 이 여행의 목적이었다.

추억이 더 바스라지기 전에 시간이 날때 마다 조금 씩 적어보도록 한다. 숙박을 선정한 도시들은 아래와 같다.

  • 1일차 – 후쿠오카
  • 2일차 – 나가사키
  • 3일차 – 후쿠오카
  • 4일차 – 구마모토
  • 5일차 – 히로시마
  • 6일차 – 나고야
  • 7일차 – 마쓰모토
  • 8일차 – 에치고유자와
  • 9일차 – 센다이
  • 10일차 – 하코다테
  • 11일차 – 삿뽀로

부조리와 이퀄리브리엄

부조리하다고 느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조금 더 공부해보면, 사실 이것이 아슬아슬한 평형 상태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세상 곳곳의 맞닿아 있는 많은 면들은 나름대로의 소재와 역사로 서로를 밀어내며 안으로는 버티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 형상이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여기에 악(devil)이 잔뜩 숨어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왜 이런 형상이 되었는지를 잘 파악해보면, 다수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로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얼마나 노력을 했어도 많은 변화를 불러오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그 합리적 선택의 가치를 더 많이 인정한다면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여기서 부조리를 꽤나 찾아낸다면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미묘한 평형과 긴장 상태를 완전하게 잘못 쌓아올려진 부조리의 덩어리로만 보거나, 혹은 더 이상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전한 이상체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이 상태를 그냥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깊이 인식 하기 위한 결정의 층위를 우선 살펴보고, 조금의 에너지가 남는다면 주어진 조건에서 이 상태가 최선인가를 판단하거나, 미래에도 이 것이 만족스러운 결과일 것인가를 예측하는 데 쓰는 것이 시각에 구분없는 보편적으로 건전한 태도가 아닐런지.

등산의 의미

나이를 먹을 수록 등산이 가고 싶다.

내 20대 시절, 토요일 아침부터 부지런히 주말을 시작할 때는 이른 시간부터 사당역을 가득 매운 등산객 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성들은 나의 미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등산에 시간을 낭비하지?” 유투브를 보며 아파트 25층 오르 내리기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했다.

머리 하얀 중년 남성이 만들어낸 사당역의 번잡함에는 물론 합리적인 이유들이 많다. 공짜로 즐길 수 있는 운동이고, 누구를 불러내도 부담이 없다. 건강에도 물론 도움이 된다. 사계절 변화하는 풍경을 즐기거나,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도 있다. 근교의 산이라면 다른 운동에 비해서 시간이 딱히 많이 들지도 않는다. 두 다리와 등산화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래,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나의 28살 시절에도 이런 이유들을 생각했음에도 여전히 다른 것들이 더 재미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12년이 지나 내가 40대에 접어들 무렵 하나의 이유를 더 찾아냈다. 그 등산객들, 특히 중년의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내가 찾아낸 이유 때문에 부지런해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정점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 정점에 서서 더 이상을 올라갈 수 없는 데까지 다다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이 이미 정점에 도달해서 내리막에 접어들 무렵,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곳까지 두 다리로 걸어올라가 세상을 내려다 보는 희열을 상상하고 경험하고는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누가봐도 정점이 있는 운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자유는 나를 잘 이끌어 줄 수 있을까

‘자유’ 그 자체로는 관념 세계의 단어일 뿐 우리가 사는 세상과 연결 짓기 쉽지 않다. 경제적 자유, 신체적 자유, 사상의 자유처럼 앞뒤의 고리가 붙을 때 실제 규범으로 의미를 가진다.

자유는 없으면 갈망하게 되지만, 막상 있어도 부재로 생기는 갈망과 동일한 양의 감흥을 느끼지는 못한다. 눈에 보이는 형상도 아닌데다가 통상 행위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사회 장치에 의한 실제 자유의 부재를 느낄 때는 많지 않다. 공기와 같아서 우리의 행위 모든 곳에 스며 들어 있지만 이것이 자유인지는 의식을 집중하지 않으면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간 절대 선으로 여겨졌던 자유의 가치가 아직도 유효한 세상인지 의문이 들었다. 최근 대통령의 연설에서 ‘자유’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누구의 어떤 자유이며 현재 시점에서 다른 가치보다 강조 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자유’가 그 동안 내가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인 만큼의 절대적 옳은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각이 바뀌었고 이는 많은 부분 경험 때문이다.

많은 수의 자유가 있다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 주어진 자유를 즐기지 못하고, 선택의 기로에 서면 누군가 결정해주길 기다리면서 판단을 미루는 일도 많다. 그저 주어진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을 꾸준히 따라가면서 느끼는 행복이 더 큰 경우도 많다. 또 그런 환경에서 행한 노력이 대우 받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자유가 없던 15세기 사람들은 현재보다 불행하게 살았을까? 내 생각에는 수많은 자유와 권리, 다른 사람에게 방해 받지 않는 많은 시간을 가진 현대인들이 절대 15세기 사람들 보다 행복할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

무한한 자유와 가능성이 있는 어린이의 삶에서 벗어나 하나하나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선택을 하는 것, 그리고 나의 결정(決定)으로 나를 결정(結晶)으로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성취와 그에 따른 조금 더 차원 높은 행복을 누리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측면에서 폭 넓은 자유를 누리는 선택을 하는 것은 당장은 의무, 제약, 피곤에서 해방되는 방법이겠지만 내가 가진 많은 것을 와해 시킬 것이다.

생의 끝에는 숙명에 의해 하나의 가능성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모든 자유가 사라지고 그 하나의 가능성이 남을 때까지 하나하나 열린 문과 창문을 내 손으로 닫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엄폐

밖이 어두워지면 이때다 싶어 커튼을 칩니다. 빳빳한 감촉의 커튼은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한 역할을 합니다. 차가운 공기를 나누고, 집안의 어두움을 조금은 더합니다. 화려한 흰색이지만 반짝임을 주는 빛이 없기에 베이지 벽지 속으로 잘 녹아듭니다.

부산히 돌아다니며 벽에 붙은 스위치들은 모두 끄고 몇 가지 조명만 켜둡니다. 새로 임무를 부여받은 녀석들은 자기에게 허락된 아주 조금의 공간만을 은은한 노란색으로 비춥니다. 고개를 떨구고 바닥 만을 바라보는 아주 소심한 녀석들 입니다.

창문은 모두 닫습니다. 이중창 모두 닫습니다. 쓰지 않은 방문도 닫아둡니다. 간혹, 적당한 온도의 공기 속에 은은한 냄새가 섞여 있을 때, 함께 있고 싶은 기분이 들때는 아주 살짝만 창문을 열어 바람을 초대합니다. 하지만 아주 엄격하게 초대장을 살펴봅니다.

낮 동안 존재감을 뽐내며 자리를 차지하던 가구들은 대부분 희미한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춥니다. 일부는 어둠 속 각 진 모서리가 남아 있지만 그외 많은 부분은 사라집니다. 웅크리고, 해가 뜨기를 기다립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입니다.

시계는 벽지 속에 녹아 들고, 빛을 받고 있지 못하고, 목소리를 내지 않지만 자꾸 내 눈길을 사로 잡습니다. 오직 나만이 주인공이 되는 소중한 시간이 끝났다고 알려주니까요. 이 시간을 꽉꽉 채워넣지 않으면 오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입니다.

빛과 일, 시간과 목소리, 내일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하지 않으면 안되는 많은 것들은 하루 종일 내 주변을 날아다닙니다. 내 얄팍한 껍데기를 안쪽과 바깥쪽에서 퉁퉁 두들겨댑니다. 이런 완력은 내 성대를 두들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원치않는 걸음을 꽤나 많이 걷게 합니다. 어느 세상의 물리법칙을 따르는지 몰라도 나에 대한 동정이나 휴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통은 하루가 끝나가는 때 내 주변에 얇은 어둠과 진공의 장막을 칩니다. 내 사고의 반경을 내 몸에서 고작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나를 움직이는 동력을 오직 내부의 목소리에서만 얻고 싶습니다. 해야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80세를 살지만 10살만 사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