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2013년의 매미소리도 잦아들던 늦여름에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매섭게 바람이 불고 추운 2021년의 겨울에 짐을 싸고 있다. 7년 5개월의 세월.

여기서 투닥 거리며 짐을 끌고 신혼여행을 떠났고, 처음 둘만의 생활을 시작하고, 가까운 학교에 다니며 팔자 좋은 세월을 보냈고, 보일러를 잠궈놓고 한달 가까운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배가 부른 아내를 회사에 데려다 주었고,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 병원으로 달려가 새로운 식구를 만났으며(심지어 그날 일생 유일한 타이어 펑크가..), 아침마다 갓난 아기를 데리고 동분서주하고, 그 아이는 어린이집, 유치원, 미술 학원, 태권도 학원을 넘나들며 이제 혼자 넷플릭스를 보며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나는 젊은 새신랑이 아니게 되었다.

곧 새로운 보금자리로 떠나지만, 남들이 그러더라, 그 뒤에 살던 집은 모르겠지만 신혼집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고. 즐거웠던, 때로는 그렇지 못했던 이 공간 속에 다시 있을 수 없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셋이 추억을 남기고, 또 오랫동안 원하던 곳으로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도 오늘 밤에는 기념사진을 잔뜩 찍게 된다.

이케아 길이조절 침대 (부숭에, busunge)

혹시, 나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위해 몇가지 적어 놓는다.

아반떼HD에는 안실리고, LF소나타에는 약간의 여유(3~4cm?)를 두고 뒷자리에 실린다. 트렁크에는 절대 안들어가니 노력하지 말고, 혼자 들 수는 있으나 꽤나 힘들고 옮기기 어려우므로 둘이 드는 것이 편하다. 매트리스도 같이 가져올 수 있으나 풀사이즈는 안되고 길이조절 메트리스를 사서 양쪽을 접어야 한다. 배송료를 59,000원이나 받으니 가까우면 가서 직접 가져오는 것을 추천. 아침 9시 40분쯤 가면 여유롭다.

아이 이름 짓기

아이가 생기자 내가 이름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아버지가 내 이름을 지은 것처럼 철학관이나 할아버지가 아닌 내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막상 선언 후 할일 목록에 적어둔채 몇 달을 보내다가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한달여 앞두고야 이제 이름을 지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 전까지 몇 달간의 경험상 머리 속에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이름들만 가지고는 쉬이 정하기 어렵기에, 어찌해야 최대한 많은 이름을 고려하고 그 중에 좋은 이름을 고를지 생각해보았다. 어제 이름 짓기를 끝내고 아이가 15살쯤 되었을 때 너의 이름은 이렇게 지어졌다고 말로 설명하는 대신 글로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아 적어본다.

1. 원칙 정하기

평소에 생각했던 “아이의 이름은 이래야지” 라는 것을 떠올리며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 째로 흔하지 않을 것이다. 흔하지 않은 이름의 아빠 입장에서 흔한 이름보다는 그 유용함이 더 크다. 둘 째로 들어도 성별을 알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이름으로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셋 째로 전 세계 사람 누구나 발음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의 아빠 입장에서 고른 원칙이다. 넷 째로 부부의 의견이 최우선이 될 것이다. 이름을 짓겠다는 사실을 밝히면 일가 친척들이 다양한 의견을 이야기 한다. 참고로 하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부부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2. 마음에 드는 글자 고르기

부부가 서로 마음에 드는 글자를 골랐다. 따뜻한 느낌이 들어서 좋은 글자, 평소에 아이 이름에 쓰고 싶었던 글자, 다른 이름들에서 마음에 들었던 글자, 발음이 쉬운 글자 등등 모두 모아보니 50여 개 정도의 글자가 골라졌다. 여기서 너무 많은 글자를 고르면 뒤에 살펴봐야 할 이름 조합의 수가 너무 많아지므로 최대 50개 이내로 유지하려고 했다.

3. 마음에 드는 글자 조합하기

우선 위에서 고른 50여 개 글자를 앞글자 후보와 뒷글자 후보로 분류해 보았다. 어떤 글자는 가운데 오면 성과 겹쳐 발음이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 실제 가능한 모든 조합을 만들어 보는 것은 Python 으로 간단하게 작성해서 출력했다. 그 결과 약 5000개 정도의 이름 후보가 나왔다. (많기도 하지..)

4. 이름 후보 선정하기

여기서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5000개의 무작위 조합 중에는 절대 이름으로 쓰일 수 없는 것들이 많으므로 각자 2500개 씩 살펴보고 이런 이름들은 빠르게 제거 한다. 5000개라면 많아보일 수 있지만 8개 칼럼의 A4지로 14장 정도 분량이다. 최초의 필터링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름이 많이 나오니까 신속히 제거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마치면 대략 1000개 이하의 이름이 남게 되는데, 이를 부부가 각자 살펴보고 절대 쓰기 싫은 이름은 다시 제거 한다. 여기서는 단순한 조합의 이상함이 아니라 각자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에 비추어 예를 들면 내 친구 아들 이름과 같거나, 친척이름과 같거나, 어린 시절에 나를 괴롭혔던 친구 이름이라던가 등등 사연에 의해 제거하는 작업을 거친다.

제거가 끝난 이름 목록을 합친 후 (이 단계에서 남은 것이 수백 개 정도) 부부가 한자리에 모여 이름 하나하나를 살펴보면서 다시 한번 제거할 것과 그대로 남겨 놓을 것, 그리고 꽤 괜찮은 것의 3단계로 분류하였다. 몇 번에 걸쳐 반복했는데, 어제 마음에 들었던 이름이 오늘은 싫어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므로 시간을 두고 일주일 정도 반복해서 보았다.

5. 주위 사람의 의견을 듣기

여기까지 최종적으로 4~5개 정도의 이름이 선정되었다. 그 후보들은 ‘현서’, ‘온율’, ‘은오’, ‘승언’ 등이었다. 이제 이 후보들에 대한 주위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가 친척, 친구들, 직장 동료들, 인터넷 게시판 등을 활용해서 의견을 물으면 내가 미처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지적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에게 의견을 물으면 내가 마음에 들었던 것, 결정한 것에 의문이 들 수 있으므로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의견을 받았다. 나는 친척, 친구, 직장 그룹 별 한명씩 에게만 물어보았다.

6. 최종 한글 이름 선정하기

이제 모든 사람의 의견과 부부의 의견을 종합해서 하나의 이름을 선정하면 된다. 나는 다행히 부부의 의견이 어느 정도 일치했지만, 이견이 생길 경우 동전을 던지거나 가위바위보를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면 된다.

7. 후보 한자 고르기

우리나라 이름은 순 한글이름이 아니라면 한자를 붙여야 한다. 작명 책 어떤 걸 봐도 대법원 인명용 한자 목록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이름으로 쓸 수 있는 한자를 알 수 있다. 도서관에서 책 하나를 빌려 정해진 한글 글자 각각 쓸 수 있는 한자 목록을 뽑아 내었다. 물론 이름으로 쓸 수는 있지만 뜻이 나쁘거나 없는 경우는 제외했다.

8. 후보 한자 조합하기

앞 글자 다섯 개, 뒷 글자 다섯 개의 후보 한자를 뽑아 냈다. 이를 단순 조합하면 총 25개의 이름이 가능한데, 전체가 의미 있는 뜻이 되는 것만 10~15개 정도를 골라내었다.

9. 역술학 관점의 평가

사실 나는 사주팔자 등을 믿지는 않지만, 주위의 친척 어른들에게 좋은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최소한의 검증 과정은 있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스마트폰 앱 중에 “이름짓기 명&명”이라는 것을 설치하고 가입하면 하루 5개의 이름에 대한 평가를 볼 수 있다. 부부가 각자 설치하면 하루에 10개의 풀이를 볼 수 있는데 나는 2일 동안 12개를 평가해서 점수 별로 정렬해보았다. 물론 이 결과를 심각하게 고려하지는 않았지만, 한자도 비슷하고 따라서 뜻도 비슷하면 이 점수가 높은 것을 골랐다.

10. 선정

됐다. 이제 마지막 선택의 시간이다. 몇 개로 마음에 드는 것을 추려낸 후 부부간의 논의로 선정했다. 나는 앞 글자는 배우자가, 뒷 글자는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고 결과적으로 뜻도 서로가 수긍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출생신고서에 정확한 한자를 꼼꼼하게 기입한 후 구청이나 동사무소에 제출하면 된다. 나는 2016년 1월 7일 출생 신고를 했고 이제 공식적으로 우리 부부의 아이, 류은오 군이 생겼다.

좋은 강의의 3가지 조건

좋은 강의란 3가지가 있어야 한다.

첫 째로 Insight.
교과서와 동일한 내용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혼자 공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교사는 식상한 책의 내용은 당연히 숙지하고도 거기에 교사만이 가지고 있는 플러스 알파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둘째로 Interaction.
교사와 학생 간에 지속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리 좋은 내용의 강의라도 학생이 그 내용을 잘 받아들이는지 확인하고 강의를 실시간으로 Adaptive하게 변경 시킬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Imagination.
최근의 학문들의 내용은 대부분 고도로 추상화 되었지만, 이를 바탕으로 학생의 마음속에 아주 구체적인 예가 그려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예의 핵심은 학생의 마음속에 상(Image;)로 남아야 한다.

마케팅 강의를 듣다가 문득 생각나서 적어본다. 교수님은 이 3가지 덕목을 다 갖추신 듯.

손이 멈춰 질 때

이 시간까지 PPT 글자 크기를 올리고 내리고 하다가 문득 손이 멈춰진다.

MBA에 지원할 때는 아침에 회사만 안 나가면 정말로 신나는 일을 잔뜩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고, 여유로운 시간을 잘 써서 신혼 동안 평생 간직할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어 보려 했는데. 숙제를 하다 보니 집에 들어온 부인한테도 ‘어 왔어?’ 한마디 밖에 못했다. 쉬려고 나가보니 잠들어 있고.

외어야 할 것, 풀어야 할 것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 겨우 종이컵 하나 들고 담아보려고 애쓰는 것 같은 느낌도 많이 들고.. ‘내년에 졸업하면 나한테 졸업장 말고 남는 건 뭘까?’하는 의구심도 든다.

벌써 SNU SMBA 1학기도 끝나간다. 참 고민도 많고 걱정도 많고, 3달 전 생각했던 것 만큼, 바랬던 만큼 되어 가는 건가? 관악이 눈에 덮이면 따뜻한 사케나 한잔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