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코프와 라벨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모리스 라벨이다. 소설 롤리타와 피아노 협주곡 G장조 2악장이기도 하다. 나는 롤리타를 읽으면 피아노 협주곡 G장조 2악장이 들리고 라벨의 곡을 들으면 롤리타가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십여년 전 우연히 이 소설과 음악을 함께 읽고 들은 후 이 둘은 음악이 나오는 그림책처럼 묶여 머리 속 서재의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놓였다. 그리고 두 작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서 꼭 주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롤리타라는 소설을 단순히 금기시 된 어른과 아이의 사랑, 그것도 육체적인 사랑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아마 소설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는 이 소설이 지금은 나에게서 사라져버린 찬란한 생명력에 대한 묘사로 바꿔 해석된다. 10대에 들어선, 육체적으로 성장을 마치고 성적 매력(reproduction)을 발산하기 위해 응축된 생명력을 폭발시키는 그 잠깐의 시기, 그것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나보코프의 글에 집중하면 한글자 한글자가 마치 피아니시모와 포르테의 강약을 가지고 아름다운 주제를 반복하는 악보인 듯하다.

피아노 협주곡 G장조 2악장의 주인공은 전면에 서있는 오케스트라의 관악기가 아니다. 사실 주인공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오른손이다. 작고 연약한 듯, 느리게 연주하는 높은 음들은 오케스트라가 내는 소리 속을 휘저으며 발레를 하는 무용수처럼 움직인다. 두 작품의 연결 고리는 오른손이 내는 소리들이다. 이 글리산도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Step down) 하는 소리들은 다시 나보코프의 첫 문장에 나오는 움직임으로 돌아와 멈춘다.

음악의 마지막에 그 유명한 첫 문장으로 소설이 시작되고 소설은 다시 롤리타의 움직임을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My sin, my soul. Lo-lee-ta: the tip of the tongue taking a trip of three steps down the palate to tap, at three, on the teeth. Lo. Lee. Ta. She was Lo, plain Lo, in the morning, standing four feet ten in one sock. She was Lola in slacks. She was Dolly at school. She was Dolores on the dotted line. But in my arms she was always Lolita.

아르헤리치나 미켈란젤리의 연주를 많이 듣지만 사실은 훨씬 더 느리게 한음 한음을 마치 타자기의 자판을 누르듯 해야 더 어울린다. 최근 캐천(Julius Katchen)의 연주를 들었는데 추천할 만하다. 유투브에는 적당한 동영상이 없어 그리모의 연주를 링크한다.

자본주의의 역사 – 미셀 보

자주 쓰이고,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단어 중에 ‘자본주의’ 만큼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 애매모호 함이 어느 정도는 줄어든다.

자본주의는 투입된 자원 대비, 산물의 가치가 더 높아져서 나에게 이윤이 축적되는 과정을 추구하는 강력한 욕구에서 출발한다.

이 과정에서 교환의 방법, 생산의 방법, 노동의 이용 방법, 자본 획득의 방법 등 다양한 변종이 있을 수 있지만 그 핵심은 ‘축적된 이윤’‘끊임 없이’ 추구하고자 하는 행태를 사회적으로 보장하고 이를 경제적 풍요를 이룩하는 방법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저자가 젊은 시절에 쓴 부분과 노년에 쓴 부분의 문체, 분석의 깊이, 세련됨 등이 많은 차이가 있어서 마치 다른 책을 읽는 듯한 단점이 있지만, 자본주의를 막연히 기업 간의 경쟁이나, 자유주의 시장 경제로 국한해서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많은 깨달음을 줄 만한 책이다.

오자와 세이지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예술은 인간 정신 속의 단단한 알맹이 같은 것이 빛이 어떻게 산란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이 그림, 음악, 소설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술을 빗어내는 탁월한 솜씨를 가진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그 단단한 알맹이,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묘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보스턴 심포니가 내는 소리의 미려함(현악이 부각되어서)과 무라카미 하루키 글의 매끈함(아마 글의 리듬감 때문일 것이다)은 묘하게 닮아있다. 이는 두 거장의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다라던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표현된 결과라는 것이 나타난 것이고 결국 예술혼을 가진 두 사람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둘을 좋은 친구로 만들어준 것이 바로 이러한 공통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대부분 읽어서 더 읽을 것이 없지만, 오자와 세이지와 보스턴 심포니의 말러는 들어봐야겠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 에리히 프롬

에리히 프롬의 책을 하나 더 읽었다.

자유와 평등은 현대인에게는 너무나 숭고한 가치여서 자유에 해악이 있거나 평등이 실현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바꿔말하면 자유와 평등은 절대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달아 읽은 에리히 프롬의 책 때문에 이런 생각에 의문이 생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추구하는가? 행동과 판단이 스스로에 맡겨지는 상황을 선호하는가? 기회의 평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는가?

내 생각에 위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아니오’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데카르트의 말이 생각난다. 위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기 위해 수많은 조건문을 붙이는 것보다 결국 ‘아니오’라고 답하는 것이 더 옳다.

독재를 원하는 사람이 있고, 부의 불평등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보다 우리 대부분이 그러하다는 사실이 놀랍다.

만들어진 신 – 리처드 도킨스

나는 미약한 범신론자이며 불가지론자에 가깝다. 인간의 능력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미지의 영역은 신의 영역이라고 내버려 두자. 인격신이건 자연신이건 일단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정의한 이상 신의 형상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러한 미지의 영역보다 내가 파악하고 있는 현실의 영역이 나에게 훨씬 중요하고 내게 주어진 짦은 인생 동안 그 부분만을 생각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리처드 도킨스의 모든 종교 영역에 논리의 칼날을 들이대는 태도는 불편하다. 물론 저자의 글 솜씨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결론은 교리에 대한 융단폭격이다. 종교의 해악에 대해서는 일부 공감하는 바가 있지만 종교가 가진 순기능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마치 종교는 해로운 점이 많으니 종교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기적 유전자는 교양 과학 서적 느낌이 강해서 ‘지식’을 얻었다는 느낌인다. 이 책은 설득 당하거나, 반론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몇 년이 지난 후 최근의 저작이 아닌 대표작을 읽어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