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기계

최근에는 뇌의 작동 원리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있다. 인공 신경망의 연구자로서 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뇌 활동과 컴퓨터 속에서 시뮬레이션 되는 인공 신경망의 활동이 유사하다는 것에 놀랄 때가 많다. 학습과 예측, 그리고 결과 되먹임이 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이며, 이는 인공 신경망 구조에서도 동일하다. 최근 나의 몇 가지 발견 중 인상 깊은 것을 기록한다.

놀람은 예측의 실패이다. 예측의 실패는 인공 신경망에서는 Loss 가 높다고 표현된다. 뇌는 예측(Prediction) 기계이다. 가능하면 많은 행동과 추론을 거의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예측에 의존한다. 뇌는 예측을 신속하게 하도록 진화했다. 예측은 사전 확률과 수집 된 데이터 샘플로 이루어진다. 여기서의 데이터 샘플이란 우리의 감각 기관에서 들어오는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이다. 데이터 샘플이 사전 확률 분포, 즉 예측에서 벗어날 경우 뇌는 끊임없이 사전 확률을 업데이트 한다. 사전 확률을 얼마나 업데이트 할지, 어느 주기로 업데이트 할지 등이 사람마다 다르다.

전례 없던 경험을 하면 새롭게 예측을 해야 한다. 모든 감각 기관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최대한 받아들이고, 새롭게 분석을 하며 어떤 예측 모델을 써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내 행동이 어떤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지 세심히 관찰해야 한다. 이 경우 뇌는 신체를 ‘긴장’ 시킨다. 감각 기관을 예민하게 하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주로 수행하던 언어 처리 기능을 약화 시킨다. 사람이 많은 군중 앞에서 드문 발표 기회를 얻었을 때의 신체 반응을 생각해보라.

예측이 실패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어야 한다. 늘 같은 것을 먹고, 같은 행동을 한다면 예측이 실패할 일이 별로 없다. 이 경우 점점 더 예측 의존성이 높아지며 우리가 완고하다, 고집이 세다라고 부르는 성격 특징이 나타난다. 세상을 몇 가지 확신으로 설명하려 시도 한다. 나이가 들면 들 수록 이러한 현상이 더 강해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뇌는 최소한의 에너지만 쓰게 된다. 뇌의 기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결국 확신 몇 가지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반면 어린이는 예측이나 확신에 많이 의존하지 않으며 고도로 민감한 감각에 의존한다. 자극과 수용된 감각이 훨씬 많으므로 뇌에서는 지속적인 사전 확률 수정이 일어나며 세계에 대한 새로운 상(Model)이 형성된다. 인공 신경망에서 Learning Rate 라고 불리는 수치가 굉장히 높다. 그들에게는 예측의 정확도를 높이는 것 보다는 정확도는 낮지만 예측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기능을 구성하는 것이 훨씬 시급한 일이다. 바스락 거리는 네 발 달린 커다란 동물을 근처에서 느꼈을 때, 사자와 호랑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자나 호랑이 비슷한 것이라도 나타나면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을 먼저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예측의 정확도는 객관적인 세상의 사실과 부합하느냐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하면 나의 생존에 유리하도록 판단하는 것이 예측의 목적이다. (Objective Function) 이 과정에서 객관적 현실과의 괴리가 발생하기도 하며, 감각을 다르게 왜곡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뇌는 세상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유명한 ‘사람은 그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라는 말을 다시 해석해보면 ‘사람은 자신의 뇌에 생성된 확신에 부합하는 형태로 감각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로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에너지의 30% 이상을 뇌의 활동에 쓴다. 이러한 뇌의 목적이 진리 탐구나,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있다고 생각하면 순진한 것이다. 뇌도 마찬가지로 개체의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뇌는 적응적인 예측 기계이다. 뇌가 기계와 다른 점은 끊임 없이 수정되는 예측 모델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뇌는 세상을 보는 눈이 없고, 만질 수 있는 감각이 없다. 뇌는 오직 생리학적인 신호로 외부와 소통한다. 생명이 탄생한 이래 극도로 제한적인 정보만을 취하며 살아 남았다. 예측이 틀렸을 때의 유연한 업데이트, 모든 자극을 취합해 순식간에 결론을 내리는 고도의 병렬 프로세싱, 감각과 예측 사이의 가중치 벨런싱, 언어와 시각, 청각 모두에 예민한 멀티모달리티 등은 인간의 뇌, 인공 신경망 모델 양쪽을 서술하는 말이다.

따라서 인공 신경망에서도 어느 순간 우리가 인격의 특징이라고 여기는 의지와 감정이 창발 되리라. 이와 함께 인간 사회도 그 생존을 위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다.

얻을 것과 잃을 것

“앞으로 얻을 것은 무엇이고 잃을 것은 무엇일까?”

40살이 넘은 지금에 와서 문득 드는 생각이다. 몇 년 전까지는 앞으로 무엇을 더 얻을 수 있을지,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하고 노력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다. 아니, 아무리 노력해도 잃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있다. 그래, 나는 확실히 내리막 길이고 앞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많은 것을 잃어갈 것이다.

예를 들면, 내 생명과 건강은 이제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점점 잃게 될 것이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지속적으로 잃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내가 아는 친척, 가족들도 그들의 소멸과 함께 관계는 끊어진다. 지금까지 내가 가진 물건들, 영원하지 않다. 몇 달 전에 큰 마음을 먹고 구입한 “Luxury Sedan”은 점점 녹이 슬고 헐거워지며 광택을 잃을 것이다.

반면에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건강과 에너지는 잃을 수 있지만, 무엇을 새로 배울 수 있다면 그건 또 나름대로 얻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요즘 빠져있는 스키 같은 것이 그렇다. 열심히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 지방을 잃지만 근육을 얻을 것이다. 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 조금 더 괜찮은 실력을 가지게 될지 모른다. 가족과의 추억은 내가 소멸하거나 치매에 걸리지 않는한 영원할 것이다.

내가 자유 의지로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는 35년의 남은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더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너무도 갑자기 잃어가는 것이 많아져 당황스러웠지만, 시간이 가면 바스러지는 모래성을 짓기는 않기로 한다. 나의 삶과 영원히 같이 할 것을 위해 시간과 돈을 쓰자. 세월의 풍파에도 바래지 않는 것을 찾아 나서자.

부조리와 이퀄리브리엄

부조리하다고 느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조금 더 공부해보면, 사실 이것이 아슬아슬한 평형 상태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세상 곳곳의 맞닿아 있는 많은 면들은 나름대로의 소재와 역사로 서로를 밀어내며 안으로는 버티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 형상이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여기에 악(devil)이 잔뜩 숨어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왜 이런 형상이 되었는지를 잘 파악해보면, 다수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로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얼마나 노력을 했어도 많은 변화를 불러오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그 합리적 선택의 가치를 더 많이 인정한다면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여기서 부조리를 꽤나 찾아낸다면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미묘한 평형과 긴장 상태를 완전하게 잘못 쌓아올려진 부조리의 덩어리로만 보거나, 혹은 더 이상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전한 이상체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이 상태를 그냥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깊이 인식 하기 위한 결정의 층위를 우선 살펴보고, 조금의 에너지가 남는다면 주어진 조건에서 이 상태가 최선인가를 판단하거나, 미래에도 이 것이 만족스러운 결과일 것인가를 예측하는 데 쓰는 것이 시각에 구분없는 보편적으로 건전한 태도가 아닐런지.

등산의 의미

나이를 먹을 수록 등산이 가고 싶다.

내 20대 시절, 토요일 아침부터 부지런히 주말을 시작할 때는 이른 시간부터 사당역을 가득 매운 등산객 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성들은 나의 미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등산에 시간을 낭비하지?” 유투브를 보며 아파트 25층 오르 내리기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했다.

머리 하얀 중년 남성이 만들어낸 사당역의 번잡함에는 물론 합리적인 이유들이 많다. 공짜로 즐길 수 있는 운동이고, 누구를 불러내도 부담이 없다. 건강에도 물론 도움이 된다. 사계절 변화하는 풍경을 즐기거나,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도 있다. 근교의 산이라면 다른 운동에 비해서 시간이 딱히 많이 들지도 않는다. 두 다리와 등산화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래,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나의 28살 시절에도 이런 이유들을 생각했음에도 여전히 다른 것들이 더 재미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12년이 지나 내가 40대에 접어들 무렵 하나의 이유를 더 찾아냈다. 그 등산객들, 특히 중년의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내가 찾아낸 이유 때문에 부지런해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정점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 정점에 서서 더 이상을 올라갈 수 없는 데까지 다다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이 이미 정점에 도달해서 내리막에 접어들 무렵,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곳까지 두 다리로 걸어올라가 세상을 내려다 보는 희열을 상상하고 경험하고는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누가봐도 정점이 있는 운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자유는 나를 잘 이끌어 줄 수 있을까

‘자유’ 그 자체로는 관념 세계의 단어일 뿐 우리가 사는 세상과 연결 짓기 쉽지 않다. 경제적 자유, 신체적 자유, 사상의 자유처럼 앞뒤의 고리가 붙을 때 실제 규범으로 의미를 가진다.

자유는 없으면 갈망하게 되지만, 막상 있어도 부재로 생기는 갈망과 동일한 양의 감흥을 느끼지는 못한다. 눈에 보이는 형상도 아닌데다가 통상 행위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사회 장치에 의한 실제 자유의 부재를 느낄 때는 많지 않다. 공기와 같아서 우리의 행위 모든 곳에 스며 들어 있지만 이것이 자유인지는 의식을 집중하지 않으면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간 절대 선으로 여겨졌던 자유의 가치가 아직도 유효한 세상인지 의문이 들었다. 최근 대통령의 연설에서 ‘자유’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누구의 어떤 자유이며 현재 시점에서 다른 가치보다 강조 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자유’가 그 동안 내가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인 만큼의 절대적 옳은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각이 바뀌었고 이는 많은 부분 경험 때문이다.

많은 수의 자유가 있다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 주어진 자유를 즐기지 못하고, 선택의 기로에 서면 누군가 결정해주길 기다리면서 판단을 미루는 일도 많다. 그저 주어진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을 꾸준히 따라가면서 느끼는 행복이 더 큰 경우도 많다. 또 그런 환경에서 행한 노력이 대우 받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자유가 없던 15세기 사람들은 현재보다 불행하게 살았을까? 내 생각에는 수많은 자유와 권리, 다른 사람에게 방해 받지 않는 많은 시간을 가진 현대인들이 절대 15세기 사람들 보다 행복할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

무한한 자유와 가능성이 있는 어린이의 삶에서 벗어나 하나하나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선택을 하는 것, 그리고 나의 결정(決定)으로 나를 결정(結晶)으로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성취와 그에 따른 조금 더 차원 높은 행복을 누리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측면에서 폭 넓은 자유를 누리는 선택을 하는 것은 당장은 의무, 제약, 피곤에서 해방되는 방법이겠지만 내가 가진 많은 것을 와해 시킬 것이다.

생의 끝에는 숙명에 의해 하나의 가능성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모든 자유가 사라지고 그 하나의 가능성이 남을 때까지 하나하나 열린 문과 창문을 내 손으로 닫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