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이 노래는 십오 년 전쯤, 어느 봄날의 교무실에서, 좋다고 느낄 사이도 없이 짧은 순간 스치며 지나가듯 만났다. 여느 중학생이 그러하듯 혼자만 무엇이 다른 듯, 남들에 비해 성숙했다고 여겨지는 느낌을 좋아했는데, 알 수 없이 난해했지만 친근한 단어로 쓰인 가사가 마음에 들었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들어와 혼자 잠에 드는” 이야기는 마치 내 이야기를 적은 것 같았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나는 비록 느리고 작은 달팽이라 한번도 바다를 본적이 없지만, 매일 동트기 전 새벽에 깨어나 무엇인가를 알 수 없이 가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서는 도저히 잠을 들 수 없었던 소년의 생각에 “이 정도라면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조금이나마 생겨났었다.


  어느 사이엔가 세월은 훌쩍 흘러 나는 홀로 서야 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때에 비하여 그리 대단한 성숙함을 가지지 못하였다. 담대함으로 껍질을 깨뜨리는 용기도 갖추지 못한 채 그저 아침에 일어나 또 다시 무엇인지 모를 것을 향한 채비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어진 역할에 맞추어 그저 다른 수백만의 달팽이들처럼.


  아주 오래 전에는 선명하고 청량하게 들렸던 파도 소리는 이제 익숙함 때문인지, 세상의 번잡함 때문인지 점점 희미해지고 들려오는 방향조차 알기 어려워졌다. 호기롭게 ‘영원함’을 외치던 스스로는 이제 그 약속을 머쓱하게 물린 채 조건을 하나 둘 달기 시작했다. 그런 시간이 한 달, 두 달이 지나 이제 일년이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머리를 저으며 차가운 방바닥에 앉아 목표 없는 시선을 던져서는 안되겠다. 멀리 떠나 해답을 찾으려 한다던가, 의미 없는 대화의 반복 속에서 실마리를 잡으려 해도 안되겠다. 나를 당당하지 못하게 만드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내가 정한 저 알 수 없는 내면의 외침 중 하나를 중요하게 생각해야겠다.


  실패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기회를 선사했고, 쓰러짐은 내 두 다리를 더 굳건하게 만들 의욕을 선사했다. 내가 20대에 흘린 수천 시간의 땀방울이 꼿꼿한 걸음걸이를 준 것처럼 미래에 생길 수천 시간의 쓰라림과 부끄러움은 나의 자신감 있는 목소리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나는 시간을 먹고 사는 달팽이가 되어서 전속력으로 어딘가를 향해 질주해야겠다. 나를 테스트할 시점은 끝나고 본 게임이 시작되려 한다.

졸업

설레임에 대학원 합격자 발표를 조회했던 것이 찰나의 시간 전 인 것 같은데 어느 사이에 시간은 흘러 오늘 최종 논문 구술 평가 성적에 도장을 받고 제출했다. 행정적인 절차는 모두 마무리되고 이제 논문 제본만을 남겨두고 있다. 두근두근 하면서 마음 졸였던 취직을 위한 노력도 어제 결과를 보고 한결 편한 마음으로 인생의 다음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인생의 20대는 항상 2년 정도를 주기로 급격한 신분의 변화를 겪었다. 대학 입학 후 신선한 신입생 시절 2년, 산업기능요원으로 근무한 2년 6개월, 다시 학교로 돌아간 복학생 신분으로서의 2년, 대학원 시절 2년 그리고 앞으로 남아있는 약 2년. 일단 사회에서의 나의 자리는 마련해두었지만 나는 무엇을 더 준비하고 도전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확실하지는 않다.


20대는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나를 성장시키려는 노력을 치열하게 하고, 30대부터는 무엇인가 나의 능력을 발현해 보겠다는 두리뭉실한 희망을 가지고 지난 8년간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무엇인가 부족한 것 같고, 나의 능력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수레를 반대 방향으로 끌거나 멈추게 하거나 하기에는 턱없이 미천한 것으로 느껴진다. 나의 두 발은 어디를 딛고 있어야 하고 양 손은 어디를 향해 뻗어야 하는 걸까?

가을

조그만 다이어리에 일주일 마다 있는 미팅의 내용을 기록할때마다 ‘아 뒷장들이 얼마 안남았네’라고 느끼고 올해의 반환점을 돌았음을 실감하고 있다. 또 잠이 덜 깬 아침에 스쿠터를 타고 학교를 오를 때마다 어제와는 다른 쌀쌀함에 사뭇 잠이 깨고는 산이 불러온 빠른 가을을 실감하고 있다. 또 조금 시간이 지나면 온통 단풍잎 휘장으로 갈아입겠지. 작년에 이 장소에 집중하지 못한 마음 때문에 순식간에 변화하는 LED 불빛같은 그 모습을 미처 못보았는데, 올해에는 조금 더 바닥을 보고 앞을 보고 눈을 깜빡이지 말아야지.

늘 두려움을 느낄 때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불현듯 인식하게 될 경우이다. ‘아 이 정도 노력으로 충분하겠지’했던 문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것이어서 좌절을 맛볼 때의 경험이라던가. 오래전에 묵혀놨던 미해결의 무엇인가를 꺼내어 자신을 다시 테스트 해보는 일에서 전혀 변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라던가. 육체의 불변함을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무엇인가 정신적으로 불변하는 것이 오래가면 두려움을 느끼고 변명거리를 찾게 된다.

초조한 마음에도 가는 시간을 붙잡아 둘수는 없고 늘 언젠가는 평가받아야 되는 시기가 오기 마련이다. 초등학교 때의 구구단과 같은 간단한 숫자 들에서 20년의 세월을 거쳐서 어느덧 더 커다란, 어린 시절의 9와 같은 엄청나게 커다란 수가 몇 번이나 곱해진 것 과 같은 크기로 나를 압도하는 어떤 시험이랄까 시련이랄까. 나는 고작 조그만 꼬마에서 고만고만한 키로 자랐지만, 내 앞에는 한시간에서 하룻밤이 되고 책 한권이 되고 한달이 되고 부풀어오른 사전이 되었다.

박태환 선수의 1600M 자유형 경기에서 발견한 것처럼, 모두가 같이 시작하고 모두가 최선을 다하지만, 누군가는 200M에서 지치고 누군가는 400M에서 지치고 누군가는 믿을 수 없게 지치지 않는다. 0.1초에 숨을 참으며 물속으로 뛰어들던 선수들이, 옆 레인을 보며 팔을 더 멀리 뻗고, 발을 더 깊게 차서 앞서 나가려고 애쓰던 선수들이 결국은 양 옆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물 속에서 혼자 터질 것 같은 폐를 억누르면서 그렇게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나는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미리 해야되고 많이 해야되고 오래해야 되고 또 여분을 준비해야된다. 또 빠르게 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조금씩 조금씩 변화해 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지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꾸준히 자신에게 타일러 왔다. 때로는 오랜 기간을 변하지 않는 자신에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옳은 쪽으로 변화해왔다는 자긍심은 가질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한다. 이 블로그에 아주 오래된 글을 볼때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만큼 변했고 그만큼 성장했다고 느낀다.

20대의 가을에 있다. 겨울을 준비하려면 역시 땔감을 많이 모으고 먹을 것을 저장해 놔야한다. 하나 다행인 것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앞 사람의 등과 뒷 사람의 코 뿐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서도 따뜻한 햇살을 비춰주는 20대의 한여름이 고맙게도 곁에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