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Requiem], 아름다운 울림

나는 항상 음악을 틀어놓고 잠에 빠진다. 그래서 늘 습관처럼 자기 전에는 CD가 정리되어 있는 조그만 책장에서 어느 음반을 들을지 고르고 CD 플레이어에 걸어 놓은채 1시간~2시간 정도 플레이가 되도록 셋팅한 후에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눈을 감는다. 아무래도 모두가 잠든 시간이라 가족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한 음악들을 틀어놓는 편이다. 최근 자주 듣던 Gustav Mahler의 교향곡 9번 중 4악장이나 다른 교향곡들의 아다지오 악장들, 혹은 Meditation이라는 글자가 크게 써있는  EMI에서 발매된 소품 음반 같은 것들이 지겨워지자 다른 음악을 찾아보고자 인터넷 탐험에 나섰다.


레퀴엠은 그러한 목적에 딱 맞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은자를 위한 미사 음악”이 원래 뜻이지만, 사실 원래 목적으로는 쓰여질 수 없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죽은 사람은 음악을 들을 수가 없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죽은 이를 위해 살아남은 사람들이 불러주는 아름다운 음악을 못듣는 다는 건 죽은이에게나 살아남은 사람에게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어설픈 대리만족이지만 자기 전에 누워서 들으면 그나마 목적에 50%는 부합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요즘은 열심히 음반을 꺼내어 든다. 내일 아침에 또 부활하긴 하겠지만 어쨋든 잠시나마 죽은 거니까.


서양 고전음악에서 레퀴엠으로 유명한 것은 몇 개를 꼽을 수 있는데 모짜르트(Wolfgang Mozart)의 것이 하나, 그리고 포레(Gabriel Faure)의 것이 또 하나, 브람스(Brahms)의 독일 레퀴엠, 마지막으로 베르디(Giuseppe Verdi)의 것이 하나. 모짜르트는 오스트리아 사람이고 포레는 프랑스 사람, 브람스는 독일 사람, 그리고 베르디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각각의 악곡에 그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브람스와 베르디의 레퀴엠은 거의 듣지 않으니 모짜르트의 것과 포레의 것만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자 한다.


모짜르트의 레퀴엠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 작업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모짜르트가 완성시키지는 못하고 그의 제자였던 쥐스마이어 Lacrimosa의 후반부 이후를 스승이 남긴 스케치를 바탕으로 완성했다고 하여 사실 진정한 모짜르트의 악곡은 아니지만, 늘 활기차고 밝은 음악으로 기억되는 모짜르트의 다른 곡들과는 달리 경건함과 엄숙함이 잘 녹아 있다. 마치 그의 40번 교향곡 같은 느낌이다. 자신이 작곡한 곡이 자신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던 묘한 곡이기도 하다.


가장 인기가 있는 부분 Lacrimosa(눈물의 날)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의미 심장한 주제 동기로 적절히 사용된 부분. Celibidache가 지휘하는 Muchner Philharmoniker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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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신론자도 아니다. 서양 사회의 기반을 흐르는 기독교를 통한 믿음이 이렇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음악, 또 그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유럽 여행을 그렇게나 갈구하게 만드는 수많은 문화적인 유산으로 표현되어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기쁨을 줄 수 있으니 그 업적 만큼은 칭송 받아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짜르트의 레퀴엠도 꽤 듣는 편이지만, 그 보다는 개인적으로 포레의 레퀴엠을 훨씬 더 선호한다. 심포닉한 화음을 만들어내는데는 모짜르트의 재능이 아주 뛰어난데, 단선율의 어떤 멜로디를 가지고 엮어 내는 기술은 포레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시칠리안느(?) 같은 곡을 들어보면 특히 현악을 잘 사용하는데 이러한 간결하면서도 깔끔한 모습이 레퀴엠에는 아주 잘 어울린다고 본다. 모짜르트 만큼의 경건함은 좀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뭐 듣기에 좋은 음악이 좋은 음악이다. 묵직한 현의 울림이 매력이다.


드디어 나왔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포레의 레퀴엠중 Agnus Dei(하느님의 어린양)다.  역시 비교하기 좋게 역시 Celibidache가 지휘하는 Muchner Philharmoniker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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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은 Celibidache의 음반을 즐겨 듣는데 다소 느리게 설정한 템포와 오직 라이브만을 고집스럽게 추구한 결과로 음반에서 나타나는 현장감. 특히 연주가 모두 끝나고 나서 여운을 즐기면서 천천히 여기저기서 조용하게 터져나오는 박수는 매력적인 감상포인트다. 


녹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오케스트라의 실연을 가서 들어보는 것 만은 당연히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악기의 소리보다 음반으로 들었을 때 더 손해를 보는 것은 바로 성악이다. 아무리 녹음 기술이 발달하고 재생 매체가 좋아진다고 해도 실제로 콘서트홀에서 듣는 합창단의 거대한 에너지를 재현해 내기란 불가능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합창을 실제로 들을 기회만 노리고 있지만, 아직 포레의 레퀴엠은 국내에서 연주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오르간이 없어서 그런가.


우리나라도 고전음악을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서 조금 마이너한 악곡들도 연주되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지만(사실 포레의 레퀴엠 정도면 마이너 한 것도 아니다)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운전 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 타면 일부러 모르는 척 요즘 듣는 고전 음악을 틀어놓는데 대부분은 끄고 라디오를 듣거나, 조금 더 신나는 음악이 없냐고 물어보곤 한다. 아마 누군가 “이 음악 좋은데 무슨 곡이에요?” 라고 물어본다면 신나서 설명해주고는 매일 같이 드라이브하자고 졸라댈지도 모르겠다 – _-

당신은 신을 몇퍼센트나 믿습니까? – 파이 이야기

경고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은 분은 일단 책을 읽은 후에 계속 이 글을 읽기를 강력히 권장합니다.

Draft 입니다. 추후 토론을 통해 일깨워진 부분을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사례 1. 생물학을 전공하는 친구 이야기.

이 친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중/고등학교때 흔히 그런것 처럼 청춘 남녀의 만남의 장으로 교회를 다닌게 아니라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정말로 신실하게 다녔으며, 어느날 갑자기 신학대학으로 진로를 결정했다고 말해도 당연한 듯 받아들일, 그런 친구 였다. 고등학교 이후로 이 친구의 소식을 한참이나 못듣고 지내다가 대학와서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이 친구는 쌩뚱 맞게도 생물학을 전공하고 의사가 되려고 하고 있었고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신앙을 버렸다고 고백한 일이었다.

“생물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신을 믿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아. 생물도 아닌 근원의 물질 단계부터 세포 하나를 거치고 다세포 생물을 거쳐 점점 복잡해지며 결국 인간에 이를때까지 진화는 그 과정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고 그 어디에도 신이 개입될 우연성이 없거든. 1+1=2라는 과정에서 신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21312512+9847123=31159644 에서도 복잡해보이지만 아주 논리적인 거지. 사람도 마찬가지야. 복잡해보이지만, 그 근원은 1+1이나 마찬가지거든.”

사례 2. 컴퓨터 공학과의 어느 교수님 이야기.

우리 과에는 호주 출신의 교수님이 계신다. 서양의 기독교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이 교수님도 모태 신앙이었으며 기독교를 믿고 계셨다. 하지만, 공대 쪽의 학문이 그렇듯 세상의 모든 원리를 수학이라는 언어로 논리적으로 풀어 내야 하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세상의 부분은 점점 넓어져서 신의 영역이라고 부를 미지의 공간은 점점 좁아져 갔다. 이를 양쪽 모두 추구하기 어려웠던 교수님께서는 결국 신앙을 버리고 말았다. 세상의 원리에 미지한 우리들도 가지고 다니는 휴대폰 따위에서 신을 느낄 수 없듯이,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진리를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세상에서 신을 느끼는 것은 힘들어져 간다.

 

 신을 내면화 하라. 파이, 칸트를 뒤집다.

 이 책의 1부는 파이의 성장 과정이다. 또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가장 직접적으로 전해오는 것도 이 부분이다. 

파이는 무신론자와 독실한 힌두교 신자인 스승을 모두 두고 있다. 이 두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은 파이의 입장에서는 상충되지 않는다. 그들 모두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신앙은 신을 내안에 품는 것이지, 품는 방법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반면, 그의 가족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돈이고 명예다. 호랑이는 무서워서 접근하면 안되는 동물이라는 것을 파이에게 일찌기 가르치려한다. 위험과 불안은 제거하려고 노력하거나 외면한다. 결국 그들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 

파이는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모두 믿는 소년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않는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한 것은 파이는 신을 종교를 통해 보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겉치례는 중요하지 않다. 파이는 신을 사랑한다. 여기서의 사랑은 호랑이에 대해서 7번째 방법, 같이 살아가기를 선택하게 만든 그 사랑이다. 

신을 왜 믿는가? 구원을 얻으려고 믿는다. 구원은 무엇인가? 불안에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안정이다. 무신론자보다 더 나쁜것은 불가지론자라고 한다. 무신론자의 “신이 없다”는  주장은 무신론자에게 확신을 준다. 완결된 상태다. 불가지론자의 지식의 영역과 신의 영역을 분리하고 미지의 세계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길들이지 않은 호랑이와 같다. 언제 불안이 피어올라 모두를 집어 삼킬지 모른다. 

파이가 뛰어노는 동물원은 세상의 또다른 축소판이며, 이는 2부에서의 호랑이, 파이, 하늘, 구명보트, 신 하나  등이 속한 바다 위, 그리고 작은 도시에 비유되는 내려다보는 바다 밑으로 무한히 복제된다. 결국 독자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2부는 신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이다. 독자가 신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이다. 소년은 믿음을 통해 생명을 얻었다. 믿음은 하늘을 향한 것도 아니고, 망망한 바다를 향한 것도 아니다. 믿음은 생명에 대한 믿음이고 믿음을 통한 행동이 불안한 평행 상태를 유지한채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의 반영이다.

구명보트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 내면의 모습을 나타낸다. 믿음을 갈구한 소년과 본능에 충실하고 의심하는 호랑이는 불안한 동거를 시작한다. 그 동거를 성립시킬 수 있는 것은 소년의 태도이다. 소년은 호랑이에게 눈을 돌려서는 안된다. 소년은 호랑이를 마음으로 품고 내쳐서는 안된다. 내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믿음으로 이끌어 나가야한다.

섬에 도착한 호랑이와 파이는 서로 다른 삶을 시작한다. 호랑이는 사냥을 하고 파이는 먹을 것을 찾는다. 평행상태에서 다시 불안한 상태로 바뀌었으며 소년의 호랑이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다시 힘겨운 길들이기가 시작된다. 이러한 상태는 낙원이 아니고 추구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 증거를 눈으로 확인하고 불안을 느낀 파이는 다시 떠나기로 결심한다.

 3부는 구조된 소년과의 인터뷰이다.

2부에서 호랑이는 안정을 위협하는 의심과 불안이고 소년은 이를 억누르는 내면의 심리로 봤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에 뒤통수를 맞은 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2가지 이야기의 비유다. 하이에나는 요리사에 비유되고, 오랑우탄은 어머니, 얼룩말은 선원에 비유된다. 그러면 파이는? 놀랍게도 리차드 파커. 호랑이 그 자체다. 내면 심리를 2가지로 나누어 그려내던 작가는 마지막에 가서야 꽝! 호랑이와 파이를 동일한 개체로 바꿔버린다.

멕시코에 상륙한 이후, 리차드 파커는 작별도 없이 떠나버린다.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린 호랑이에게 파이는 서운함을 느낀다. 내면을 지탱하는 무엇인가가 떨어져 나간 느낌이다. 끊임 없이 대립하던 불안의 축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호랑이 자신이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그 떨어져나간 부분을 매운다. 호랑이는 나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내가 호랑이 자신이었다는 사실, 나의 내면에는 여전히 호랑이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납득해야 새로운 믿음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두가지 이야기가 독자를 혼란시킨다.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와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 하지만 앞에서 누누히 작가가 그려냈듯이 어떤 이야기가 실제 있었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놀이 공원에 가서 색이 다른 셀로판지를 양쪽 눈에 대고 보면 입체처럼 튀어나와 보이는 영상을 보고 놀라워하다가 안경을 벗으면 아무것도 아닌 평면의 영상이듯, 어떤 종교적인 믿음에 의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해석하던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머리속에 각인되는 것 그 자체이다.

 파이

파이는 3.1415926535.. 로 시작하는 무한의 숫자이다. 또한 원의 지름에 파이를 곱하면 원의 둘래를 얻을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지만 무한을 상징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무한은 곧 신을 의미한다. 내제되어있는 무한의 속성을 의미하며 이는 신을 품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한 소설 중간에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원의 중심에 위치하고 주위가 빙글빙글 돌아갈 뿐이라는 말은 이 파이라는 이름으로 더 명확해진다. 어디를 향하는 시선이던지 세상을 바라보는 방향은 지름이지만, 결국 우리는 둘레라는 세계 전체를 파악한 것이나 진배없다.

라흐마니노프, 음악이 즐거운 이유

 어느 중학교 시절의 과학 수업시간이었다. 늘 낮은 평행선을 달리는 톤의 목소리로 수업을 하시던 작은 키의 남자 선생님은 칠판과 마주보고 수업을 하고 계셨다. 별로 유머가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히 놀림이 되는 외모나 특징이 없던 선생님은 수업시간에는 아이들의 집중 대상이 아니었는데, 아이들은 늘 다른 과목의 공부를 하거나, 자거나 하는 일이 많았다. 언젠가, 소란스럽게 잡담을 하던 아이가 걸려서 크게 체벌을 당한 이후로, 선생님의 작은 몸에서 깜짝 놀랄만한 큰 힘이 발휘된다는 것을 모두들 알았기 때문에 수업시간에는 아주 조용한 상태로 시계의 초침소리가 크게 들리게 되었다.


 선생님 당신도 이러한 적막하고 무미 건조한, 하품나는 분위기에서의 수업을 본인의 단점으로 여기고 극복해보려는 노력이 보이는 행동을 티나게 하실 때가 있었다. 젊은 선생님 이셨으므로 주위의 유행이 되는 이야기라던가, 인기있는 TV 프로그램 이야기라던가, 혹은 친구에게 들은 것으로 보이는 유머를 구사할 때가 있으셨는데, 반응이 좋을때면 칠판으로 반쯤 돌아서서 들키지 않게 살짝 흡족한 미소를 띄는 것이 “좋아! 오늘도 한건했어!”라는 반응 같았다.


 이날도 여전히 따분한 목소리만이 교실에 울려 퍼질때, 선생님은 오늘 준비해온 카드를 꺼내드셨다. 세상에는 셀 수도 없는 많은 의문들이 있지. 흔히 아주 어려운 것들을 생각하지만, 엄청나게 간단하면서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아. 너희들 음악이 왜 즐거운지 아냐?” 물론, 중학생들이,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것을 생각하면서 음악을 듣지는 않는다. 도대체 이번 카드는 다음 패가 뭔지 예측이 힘들었다. 넌센스 퀴즈로 말도 안되는 정답일지, 답에 유머가 포함되어 나올지, 정말로 진지한 과학적 설명을 해주실지. 아무튼 평소에는 당연히 생각했던 것에 나름대로 이유를 붙여보려는 시도에 공감해서 많은 수의 학생이 선생님을 주시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이로써 의도했던 효과의 절반은 달성. 자. 이제 마무리를 잘하면 되는 것.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와 음악의 리듬이 일치하기 때문이지. 미개한 아프리카의 부족들이 일정한 리듬을 가지는 타악기를 두드리면서 흥겨워 하는 모습을 많이 봤을꺼야. 음악은 바로 그곳에서부터 출발했거든.” 실망이다. 과학선생님 아니랄까바, 설명이 너무 논리 정연하고 “과연~” 감탄하게 되는 “AHA!”효과가 없다. 음악과 연결되면 뭔가 더 감성적일 줄 알았는데.. 선생님으로 향했던 아이들의 시선은 특별 한정 세일 마감을 아쉬워하며 돌아서는 아주머니들의 발걸음 처럼 제각각 산란되고 “으응~ 그랬을 수도 있지.” 하는 납득으로 상황이 종료되었다. 오늘은 실패다. 나 역시 시시함에 고개를 다시 파묻었지만, 잠은 오지 않은 채 그 의문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음악은 도대체 왜 즐거운 것일까?”




 내가 라흐마니노프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때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상 위에 있는 조그만 CD Player로 늘 음악을 틀어놓고 공부를 했었는데, 라디오도 들었고, 팝, 락, 발라드, 클래식은 물론, 한국, 일본, 미국, 유럽 등등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음악들을 친구들에게 추천받아 듣던 시절이었다. 보통 학교에서는 가지고 다니는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고, 집에서는 그 CD Player를 사용했었다.


 그날은 집에 있는 클래식 음반들 중 집히는 대로 한 개를 플레이어에 넣고 들으면서 무엇인가 매우 어려운 과제를 하고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밖은 해가 지면서 어두움이 내리깔려 있었지만 흐린 날씨 탓에 새벽인지, 저녁인지 잘 구분이 안가는 상황이었다. 스탠드 램프 하나의 불빛만 밝힌채로 적막 속에서 한문제 한문제 낑낑대면서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뚝, 내 노력의 결정체(!)인 종이 위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양파 껍질을 벗길 때 처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나는 것이다! 서둘러 하던 과제를 치우고 화장실로 달려가서 거울을 보는데 빨갛게 충혈된 눈에는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혀있었다.


 도대체 이 음악은 무엇이길래 나를 이렇게, 나는 어떤 생각도 안했는데, 단순히 어려운 과제로 머리가 뒤죽박죽인 상황이었는데도, 이렇게 만드는지 놀라웠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관객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기 위해서 대편성의 현악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OST를 만들고 감동적인 대사를 쓰고 진짜처럼 터지듯 흐느끼는 연기자를 고용한다. 그리고는 예고편에서 극도로 절제된 힌트만을 주고 실제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정교하게 다듬어 마치 함정을 파는 스파이처럼 울음의 포인트를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런 노력에도 극장에서 “여기서 울라고 만들어 놓은 상황 인거야?”라는 생각을 팝콘을 씹으면서 태연히 하게 되는 영화가 대부분인 마당에 말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렇게 마법처럼 찾아와서 세상에는 이런 음악도 있다는 것을 어린 중학생의 감수성에 가르쳐주고 갔던 것이다. 그 후로도 이 음반은 10여년이 넘는 세월을 즐겨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 내 마음 속에 찾아왔던 것은 무엇이었는지는 꽤 오랜시간 동안 의문으로 남았다. 순백색의 결코 흐트러짐이 없는 정갈한 리듬 속에서 마치 샘물이 솓아나듯이 끊임 없이 깨끗하게 맑은 악상들이 겹겹이 쌓이는 2악장은 특히 좋아하는 부분.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2nd. Adagio sostenuto






 두 번째, 다시 라흐마니노프와 만난 것은 얼마전의 아침이었다. 일찍 일어나서 졸린 눈을 비비면서 스포츠 센터로 갔다. 40분의 조깅과 30분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다소 차가운 듯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옅은 안개가 낀, 숨을 들이 마시면 촉촉한 공기가 마음을 적시는 그런 아침이었다. 스쿠터에 시동을 걸고 경쾌한 엔진소리에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아무도 없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한참 올라가는 것이다. 그런 차가운 안개를 마시면서 말이다. 연구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해서는 시동을 끄고 계단을 한칸, 두칸, 한칸, 두칸씩 리듬을 맞추어 올라가서는 내 자리에 도착. 연구실에는 왠일인지 사람이 없었고, 컴퓨터의 스위치를 켜고 자리 뒤쪽의 창문을 활짝 열어서 산 속의 신선한 공기를 가득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헤드폰을 쓰고 인터넷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방송을 클릭한다.


 재회의 무대는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이었다. 특별히 유명한 3악장. 바쁘게 이메일을 확인하려 움직이던 손놀림을 그대로 멈추고 의자 뒤로 목을 받치고는 편히 기댔다. 그리고는 반바퀴 뒤로 돌아서 방금 열었던 창문으로 밀려들어오는 공기를 한번 크게 심호흠 한 후에 귀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한다. 그리고는 눈을 감는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악을 처음 만날 때는, 좋아하는 사람과 처음 데이트할 때의 기분처럼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가슴이 꽉막힌 듯 답답하고, 표현하고 싶은데 한발짝을 넘지 못하는 애절한 바이올린의 외침은,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싶은 데 소리치지 못하고, 사랑을 전달하고 싶은데 전달하지 못하고, 울고 싶은데 터져나오는 눈물을 눌러서 참고만 있는 그런 현실의 한계에 괴로워하는 인간 모습의 오마쥬다. 두 번의 클라이막스에서 라흐마니노프는 듣는이를 탁 트인 초원, 거대한 자연에 대려다 놓고는 이 곳에서는 마음 껏 소리치고, 전달하고, 달려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는 오케스트라의 몰아치는 선율로 이렇게 해보라고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주기도 하고 말이다. 내가 만난 두번째의 라흐마니노프는 그렇게 격정적이었다. 단순한 방문자가 아닌 모습을 하고 있었다.


Rachmaninov, Symphony No.2 in E minor op.27, 3rd. Adagio







 내게 음악이 왜 즐거운지에 대한 답은 중학교때의 과학 선생님이 아닌 두번의 경험을 통해서 라흐마니노프가 가르쳐 주었다. 음악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토론이 그런 것 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문학이 그런 것 처럼 다른 사람의 글을 읽어서 다른 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음악을 듣는 그 순간 만큼은 음악을 만든이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이 난다면, 그 음악을 작곡할때 작곡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음악을 들을 때 이유없이 웃음이 난다면, 음악을 작곡할때 흥겨움에 겨워서 작곡한 것이 틀림없다. 애절하게 가슴을 져미는 아픔이나, 거대한 상실 후의 허무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면 그러한 감정은 수년, 수십년, 혹은 수백년의 세월을 거쳐 음악을 통해 듣는이의 마음 속에 그대로 와서 복제 된 것이다.


 어제 소설가 이외수씨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을 글을 쓰는 기교를 쌓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할 필요가 있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 이유는 예술이란 결국 자신의 마음을 다른이에게 그대로 전달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이 먼저 감동을 받을 수 있어야 남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다.


 흔히 영화를 대리만족의 예술이라고 한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영화속 주인공의 모습에 우리를 투영시켜 현실 세계에서는 하지 못하는 여러가지 일들을 실제로 해 볼수 있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것이 즐거운 것이라고 한다. 꿈을 꾸면 우리는 원하는 것이 될 수 있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즐거운 꿈에서 깨어나는 것을 아쉬워하고, “원하는 것” “꿈을 꾼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음악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더 생생하고 (왜냐하면 음악은 중간의 어떤 감정의 전달자로서의 매개채가 상대적으로 없다) 더욱 더 편리하게 (음악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 되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음악이 ‘보관될 수 없는 공기의 울림’이라는 현실적 제약을 가지는 대신 선택한 크나큰 장점이다.


 사람은 늘 활기차고 들뜬 감정에 있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슬픔에 젖어, 또 때로는 화를 내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행복은 늘 들뜨고 활기찬 감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균일한 마음에 충실할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슬프더라도 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슬픔 그 자체라면, 비록 화가 나더라도 시기심이나 두려움이 섞이지 않은 순수함이라면, 이런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자연스러운 마음이라면 결국 행복한 것이 아닌지. 마치 어린 아기일때만 느낄 수 있는 절대적인 행복한 감정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완벽하게 원하는 감정으로 가득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함으로 혹은 열정으로, 때로는 환희로 말이다. 그래서 원하는 음악을 들으면 행복하고/즐거운 것이다.  




 10월 9일에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의 매우 인상적인 연주를 들려준 이반 피셔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내한한다는 소식에, 갈까 말까를 수없이 고민하고 있는 요즘이다. 이미 합리적인 자리들이 다 차버렸기 때문에 한발 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음반에서 들려준 역량의 절반만 발휘해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싸우고 있다. 빈필이 이벤트성으로 와서 “세상의 아름다운 클래식 100선” 이런 레파토리를 들려주는 공연보다는 훨씬 값어치가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비싸다. (ㅠ _ㅠ) 예술에 충분히 투자할 수 있는 분이라면 감히 비싼 돈 주고 가서 들어도 후회가 없으리라고 생각. 초대권도 좀 사라지고, 그래야 싸게 가서 듣는 사람 티켓 값도 좀 싸질 텐데. 고민중. 고민중.

울고 싶으세요? 그러면 말러를 들으세요

울고 싶을때는 20세기 후반들어 새롭게 재발견된 작곡자 말러의 곡을 들어보세요.

하얀 눈처럼 빛나는 서정성으로 감동과 눈물을 주는 슈만 같은 작곡자도 있는 반면에
절망과도 같은, 저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는, 끝없이 침전되는 슬픔의 눈물도 있습니다.

바로 말러가 대표적인, 그런 느낌을 주는 작곡자 중의 한명이지요.
그의 교향곡으로 대표되는 음악 레퍼토리 중 5번의 4악장 아다지에토나 , 9번의 4악장
아다지오를 들어보면 고개는 절로 숙여지고 웃음을 잃게 됩니다. 딱히 심각한 생각을
하게 되지도 않고, 아니 할수도 없게 되지요. 단지 무거운 슬픔이 마음을 억눌러 답답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단념과 숙연함만 있는 거지요.

이 느낌은 바로 죽음의 공포에 억눌리는 바로 그 것 입니다.

음악은 생명체로 가질 수 밖에 없는 아주 본능적인 공포를 건드리기 때문에 매우 호소력
있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을 겪고 난 후의 느낌은 카타르시스라고 하나요.
바로 정화된 영혼. 죽음의 반대편에 항상 붙어있는 삶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느끼면서
한결 성숙되고 상쾌한 기분을 불러오게 됩니다.

과장되어 말하면 20세기 후반을 양분했다고 할 수 있는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위에서 언급
한 두 악장에 대해서 각각 높게 평가되는 공연을 했고 이 실황을 레코딩으로 남기고 있는데요.
20세기 후반의 화두라고 할 수 있는 작곡자에 대해서 두 거장의 한치의 양보도 없이 명연을
펼쳤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카라얀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9번(1982)
번스타인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5번(1987)

클래식의 쾌락

토익, 토플 MP3 들과 친해져볼려는 마음에 음악을 멀리하는 요즘이지만 다른 것 들은
버리고 참을 수 있어도 클래식 음악과는 멀어지기가 참 힘들다.

중학교 때인가 ‘클래식의 쾌락’이라는 클래식 음악의 입문서를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왠지 쾌락이라는 단어가 주는, 본능에 충실한 욕구 표현 같은 느낌이 들어서 왜 이런
단어를 썼을까 의아해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 ‘쾌락’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지고
이런 저런 Classical Music(이 정확하다)을 듣다보니까 과연! ‘쾌락’이요 ‘환희’라는
표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보통 음악을 가장 많이 듣게 되는데, 이 때의 삶이 한가하기 때문이
기도 하고 감수성이 예민하여 조그만 외부 자극에도 강한 정서적인 쾌락을 얻기 때문이
기도 하고 또래 친구들로 인해서 다양한 음악을 추천받고 들어볼 기회가 있기 때문이기
도 한 것이다. 하지만 살펴보면 주로 듣는 음악의 스펙트럼이라고 해야하나, 어떤 장르
의 일관적인 묶음이 있는 것이고 다양하지만 그 내부에서의 움직임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는 음악에 포함된 어떤 리듬과 악기에 본인의 선호가 있기 마련이고 그를 쫓아가는
청취가 있기 때문일 것 같다. 헤비메탈과 재즈를 양쪽 다 심도있게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본 기억이 없다. (물론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명백하게 편중은 존재한다)

하지만 내 기억속의 나의 모습에는 다양한 음악들을 접해왔지만 항상 왼손에는 클래식을
기본으로 깔고 다른 음악에 비중을 높이는 식으로 음악을 들었던 것 같다. 물론 새로 취미
를 붙인 음악이 싫증나도 클래식을 선호하는 마음에는 영향이 없다. 이는 현대 음악의
뿌리가 클래식에서 파생되어 왔다는 점 때문에 부모와 자식은 양립할 수 있어도 자식과
자식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름의 생각이다.

흔히들 “나는 클래식 음악을 듣지 천박한 대중 음악은 안들어.” 라거나 “주제도 모르고
클래식 음악이라니 잘난척 하려는 것이 분명하군.” 이라던지. 어느쪽이던 클래식 음악이
주는 어떤 묵직하고 천박하지 않은 가치에는 동감을 하고 있으니 약간 비틀어서 그러한
특징은 단지 음악이 주는 느낌 정도로 치부해버리고 음악외의 요소를 보지 않으면 더
쉽게 클래식 음악에 다가서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나는 몇가지 이유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데 우선 공부하면서 듣기에는 대중가요 보다
좋다. 가사. 즉 언어적인 표현이 들어가면 표현 방법이 훨씬 더 직접적이 된다. 즉 내가
듣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말이 되고 이는 정신 집중에 방해가 된다. (물론 공부할 때는
음악을 듣지 않는게 가장 좋지만) 그리고 대중 가요에는 음악이라고 보기 힘든 부분이
많다. “이번 곡의 컨셉은 가수의 이미지 변화를 위해서..” 이런식으로 시작한다면 이미
그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 보기 좋은 포장지 정도다.

(사실 대중 가요를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것은 몇개 안된다. 우리나라 음악 시장의 70~80%
는 대중가요. 그리고 남은 부분을 뉴에이지, CCM, 인디음반, 클래식 등이 나눠먹고 있는데
클래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3%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공간감이랄까 인간미 같은 것을 찾는 잔재미랄까. 라이브 레코딩을 들어보면 연주자의
자잘한 실수. 숨소리. 심지어 피아니스트의 허밍까지. 음반마다 나타나는 이러한 잔재미라
의외로 재미를 준다.

또 같은 곡에 대해서 여러가지의 해석이 존재하는 것도 재미있다. 다른 많은 음악에서는
마스터 테이프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걸 변형시킬 경우 편곡이라는 개념이 들어가지만
클래식 음악에서는 작곡가의 악보가 절대적이고 그에따라 해석이라는 개념이 들어간다.
어떤 마음에 드는 곡을 발견하면 그 음악과 자신의 마음의 울림이 공명하는 탁월한
해석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내가 50살이 되고 60살이 되었을 때 지금 들었던 클래식을 또 들을 수 있다면 꽤 행복할
것 같다. 지금 듣는 음악들에 일상 생활의 단상들을 연결 시켜놓고 먼 훗날에 같은 음악을
꺼내어 듣는다면 좋지 않을까. 마치 일상 생활에 책갈피를 끼워놓는 것 처럼 말이다.

어떤 다수의 ‘시퀀스’가 하나로 통합되어 치밀하게 맞아 들어가는 작곡자의 실력을
공학도의 측면에서 찾아 내는 것도 흥미롭다. 사실 이건 클래식 만의 특성은 아닌데
모든 클래식이 이렇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질주하는 오케스트라지만 치밀하게
서로를 의식하면서 정확하게 의도된 타이밍을 찾아내는 실력을 최고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상 클래식에 관한 잡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