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thing is possible

유럽에 올 때마다, 하나의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 화두를 던지고, 고민을 하고 또 정리를 한다. 또 하나의 커다란 숙제를 안고 간다. 몸은 하늘을 날고 있지만 마음은 심해에 가라 앉는 듯 무겁다.

6시간을 생각했다. 서해부터 모스크바까지 지구의 1/6 정도를 돌아오는 동안 자다 깨다 생각하다를 반복하면서 해결책이 아닌 문제의 원인을 생각했다.

외부의 원인이 아닌 내부의 원인, 피상의 원인이 아닌 내면의 원인.

미래에 제한을 두지 말자. Everything is possible.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라고 못 간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자의든 타의든 움직여야 할 시점에 움직이는 것이 맞다. 길은 아래, 위로도 있다.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지 말자. 무엇이 옳은지, the right thing to do를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 나를 지금 행복하게 만들지, 미래에 대한 고려 없이 결정하자. 심각한 고려는 동전 던지기 보다 못한 결과를 낼 때가 많다.

늘 변화하면서 살자. 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들을 남겨두고, 늘 바뀌어야 한다. 많이 경험하고 많이 말하고 많이 춤춰보자.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항상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 보다는 항상 무엇을 하는 게 낫다. 시간 축에서 같은 것을 경계하자.

죽음 앞에서는 모든 걱정이 사사롭다. 내가 죽을 순간 의미 있는 걱정이라는 것은 단 한가지도 없다. 삶을 그렇게 살자. 내일 죽는 사람이나 50년을 더 사는 사람이나 삶의 태도가 달라야 할 어떤 근거도 찾을 수가 없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처럼 고민 없이 사랑하자.

다른 이의 변화를 기대하지 말자. 삶을 마무리 하는 순간까지 나의 손으로 선을 그어야 한다. 두 개의 줄은 멀어지고 엇갈리고 평행하고 가까워질 것이다. 내가 그을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줄 뿐이다. 어차피 내가 가진 것이 하나의 펜 뿐이라면 가장 아름다운 색을 선택해서 망설임 없이 그어 나가자.

지금이 더 행복해 질 수 없는 시기이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다. 이 행복을 잃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단 한 개도 없는 것처럼, 행복도 아름답게 핀 꽃이 스러져가는 것임을,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명심하자.

Embrace everything.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펜을 잃어버리는 사람과 펜을 줍는 사람.


  굳이 말하자면, 나는 펜을 줍는 사람. 그 증거로 내 책상 옆 선물로 받은 초콜렛 상자에 차곡 차곡 쌓여있는, 내가 구입하지 않은 다 쓴 펜들을 들 수 있다. Uni-ball, Zebra, Jet-stream, SARASA, Hitech-C 등등. 알고보니, 나름 까탈스럽게 좋은 펜만 쓰네. 아무 펜이나 줍진 않았다.


  펜은 버스 좌석, 도서관 열람실, 내 회사 책상, 지하철 개찰구 등, 딱히 선호되는 곳 없이 전세계 어디에나 발견된다. 사람들은 펜에 이름 쓰는 일을 일반적으로는 귀찮아 하기 때문에, 찾아줄 수도 없고, 따라서 딱히 죄책감 같은 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세상에 수명을 다해 흘려질 처지에 놓인 자원들을 찾아 남김없이 소비해주는, Global Warming 문제에 조금은 기여한다고 할 수 있겠다. 아마, 잉크는 물을 꽤나 오염시킬 것 같이 생겼다.


  펜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굴까?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펜을 본적은 있어도, 누군가가 흘리는 것을 본 기억은 없다. 딱히 보지 않아도 흘려진 펜을 보면 전 주인이 누굴까 예측을 조금은 할 수 있다. 광택이 선명하게 살아있는 조금 도 안 쓴 펜을 볼 때도 있고, 또 어떤 것은 버린 건지 흘린 건지 알 수 없는 펜도 있다. 어떤 것은 꽤나 아껴 쓴 것 같고, 또 어떤 것은 차이고 밟히고 돌리고 떨어뜨리고 심지어 이빨로 씹은 것도 있다. 하지만 이도 일반적으로 펜이 받는 사랑이라는 것은 별볼일 없다.


  똑같은 제품이 문구점에는 널려있고, 더 좋은 제품이 시즌마다 쏟아져 나오니까. 유기견 문제만큼 펜의 유기 문제가 부각이 안 되는 것은 아마 펜이 강아지 만큼 귀엽거나, 불쌍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으니까.


  모든 것은 그 가치를 소홀이 여기는 사람의 손을 떠나,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 손에 쥐어지기 마련이다. 마치 펜처럼. 발이 달리거나, 펜의 주인에 대한 취향 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어딘가를 그렇게 흘러 흘러 다니면서 역할을 다하고, 그 수명을 다하는 모습을 유심히 본다. 그래 굳이 고백하자면 나는 꽤나 펜을 사랑한다.

당신은 신을 몇퍼센트나 믿습니까? – 파이 이야기

경고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은 분은 일단 책을 읽은 후에 계속 이 글을 읽기를 강력히 권장합니다.

Draft 입니다. 추후 토론을 통해 일깨워진 부분을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사례 1. 생물학을 전공하는 친구 이야기.

이 친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중/고등학교때 흔히 그런것 처럼 청춘 남녀의 만남의 장으로 교회를 다닌게 아니라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정말로 신실하게 다녔으며, 어느날 갑자기 신학대학으로 진로를 결정했다고 말해도 당연한 듯 받아들일, 그런 친구 였다. 고등학교 이후로 이 친구의 소식을 한참이나 못듣고 지내다가 대학와서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이 친구는 쌩뚱 맞게도 생물학을 전공하고 의사가 되려고 하고 있었고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신앙을 버렸다고 고백한 일이었다.

“생물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신을 믿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아. 생물도 아닌 근원의 물질 단계부터 세포 하나를 거치고 다세포 생물을 거쳐 점점 복잡해지며 결국 인간에 이를때까지 진화는 그 과정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고 그 어디에도 신이 개입될 우연성이 없거든. 1+1=2라는 과정에서 신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21312512+9847123=31159644 에서도 복잡해보이지만 아주 논리적인 거지. 사람도 마찬가지야. 복잡해보이지만, 그 근원은 1+1이나 마찬가지거든.”

사례 2. 컴퓨터 공학과의 어느 교수님 이야기.

우리 과에는 호주 출신의 교수님이 계신다. 서양의 기독교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이 교수님도 모태 신앙이었으며 기독교를 믿고 계셨다. 하지만, 공대 쪽의 학문이 그렇듯 세상의 모든 원리를 수학이라는 언어로 논리적으로 풀어 내야 하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세상의 부분은 점점 넓어져서 신의 영역이라고 부를 미지의 공간은 점점 좁아져 갔다. 이를 양쪽 모두 추구하기 어려웠던 교수님께서는 결국 신앙을 버리고 말았다. 세상의 원리에 미지한 우리들도 가지고 다니는 휴대폰 따위에서 신을 느낄 수 없듯이,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진리를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세상에서 신을 느끼는 것은 힘들어져 간다.

 

 신을 내면화 하라. 파이, 칸트를 뒤집다.

 이 책의 1부는 파이의 성장 과정이다. 또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가장 직접적으로 전해오는 것도 이 부분이다. 

파이는 무신론자와 독실한 힌두교 신자인 스승을 모두 두고 있다. 이 두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은 파이의 입장에서는 상충되지 않는다. 그들 모두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신앙은 신을 내안에 품는 것이지, 품는 방법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반면, 그의 가족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돈이고 명예다. 호랑이는 무서워서 접근하면 안되는 동물이라는 것을 파이에게 일찌기 가르치려한다. 위험과 불안은 제거하려고 노력하거나 외면한다. 결국 그들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 

파이는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모두 믿는 소년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않는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한 것은 파이는 신을 종교를 통해 보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겉치례는 중요하지 않다. 파이는 신을 사랑한다. 여기서의 사랑은 호랑이에 대해서 7번째 방법, 같이 살아가기를 선택하게 만든 그 사랑이다. 

신을 왜 믿는가? 구원을 얻으려고 믿는다. 구원은 무엇인가? 불안에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안정이다. 무신론자보다 더 나쁜것은 불가지론자라고 한다. 무신론자의 “신이 없다”는  주장은 무신론자에게 확신을 준다. 완결된 상태다. 불가지론자의 지식의 영역과 신의 영역을 분리하고 미지의 세계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길들이지 않은 호랑이와 같다. 언제 불안이 피어올라 모두를 집어 삼킬지 모른다. 

파이가 뛰어노는 동물원은 세상의 또다른 축소판이며, 이는 2부에서의 호랑이, 파이, 하늘, 구명보트, 신 하나  등이 속한 바다 위, 그리고 작은 도시에 비유되는 내려다보는 바다 밑으로 무한히 복제된다. 결국 독자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2부는 신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이다. 독자가 신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이다. 소년은 믿음을 통해 생명을 얻었다. 믿음은 하늘을 향한 것도 아니고, 망망한 바다를 향한 것도 아니다. 믿음은 생명에 대한 믿음이고 믿음을 통한 행동이 불안한 평행 상태를 유지한채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의 반영이다.

구명보트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 내면의 모습을 나타낸다. 믿음을 갈구한 소년과 본능에 충실하고 의심하는 호랑이는 불안한 동거를 시작한다. 그 동거를 성립시킬 수 있는 것은 소년의 태도이다. 소년은 호랑이에게 눈을 돌려서는 안된다. 소년은 호랑이를 마음으로 품고 내쳐서는 안된다. 내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믿음으로 이끌어 나가야한다.

섬에 도착한 호랑이와 파이는 서로 다른 삶을 시작한다. 호랑이는 사냥을 하고 파이는 먹을 것을 찾는다. 평행상태에서 다시 불안한 상태로 바뀌었으며 소년의 호랑이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다시 힘겨운 길들이기가 시작된다. 이러한 상태는 낙원이 아니고 추구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 증거를 눈으로 확인하고 불안을 느낀 파이는 다시 떠나기로 결심한다.

 3부는 구조된 소년과의 인터뷰이다.

2부에서 호랑이는 안정을 위협하는 의심과 불안이고 소년은 이를 억누르는 내면의 심리로 봤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에 뒤통수를 맞은 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2가지 이야기의 비유다. 하이에나는 요리사에 비유되고, 오랑우탄은 어머니, 얼룩말은 선원에 비유된다. 그러면 파이는? 놀랍게도 리차드 파커. 호랑이 그 자체다. 내면 심리를 2가지로 나누어 그려내던 작가는 마지막에 가서야 꽝! 호랑이와 파이를 동일한 개체로 바꿔버린다.

멕시코에 상륙한 이후, 리차드 파커는 작별도 없이 떠나버린다.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린 호랑이에게 파이는 서운함을 느낀다. 내면을 지탱하는 무엇인가가 떨어져 나간 느낌이다. 끊임 없이 대립하던 불안의 축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호랑이 자신이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그 떨어져나간 부분을 매운다. 호랑이는 나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내가 호랑이 자신이었다는 사실, 나의 내면에는 여전히 호랑이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납득해야 새로운 믿음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두가지 이야기가 독자를 혼란시킨다.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와 사람이 나오는 이야기. 하지만 앞에서 누누히 작가가 그려냈듯이 어떤 이야기가 실제 있었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놀이 공원에 가서 색이 다른 셀로판지를 양쪽 눈에 대고 보면 입체처럼 튀어나와 보이는 영상을 보고 놀라워하다가 안경을 벗으면 아무것도 아닌 평면의 영상이듯, 어떤 종교적인 믿음에 의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해석하던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머리속에 각인되는 것 그 자체이다.

 파이

파이는 3.1415926535.. 로 시작하는 무한의 숫자이다. 또한 원의 지름에 파이를 곱하면 원의 둘래를 얻을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지만 무한을 상징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무한은 곧 신을 의미한다. 내제되어있는 무한의 속성을 의미하며 이는 신을 품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한 소설 중간에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원의 중심에 위치하고 주위가 빙글빙글 돌아갈 뿐이라는 말은 이 파이라는 이름으로 더 명확해진다. 어디를 향하는 시선이던지 세상을 바라보는 방향은 지름이지만, 결국 우리는 둘레라는 세계 전체를 파악한 것이나 진배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