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들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즐기게 되면, 무엇인가라면 보통 어떤 다른이의 창작물, 자연스럽게 창작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다. 음악을 들으면 내가 악보 위에 휘갈기면 교향곡이 나올 것 같고, 그림을 보면 내가 캔버스 위에 휘갈기면 박물관에 소장될 것 같고, 또 영화를 보고 나면 내가 영화를 찍는다면 틀림 없이 오스카 상을 받을 것 같고. 뭐 뜬구름 잡는 상상이 모락모락 피어나지만 그 밑에는 무엇인가 창작열이라는 것이 끓어 오른다.

하지만, 조금 더 심취해서 남들의 창작을 두루 섭렵하다 보면, 세상에는 너무나 뛰어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고, 이러한 화려한 작품에 비해서 나의 창조적 상상력은 빈약하기 그지 없다는 것을 깨달아 좌절하게 된다. 내가 모짜르트보다 뛰어나지 못할 확률이 100%에 가까운데, 내가 뭘 만들어서 어디다 쓰겠어.

게다가 이런 나약한 생각따위 신경쓰지 않고 무엇인가를 여차여차 시도한다고 치자. 그렇게 태어난 창작물이 과연 내가 만든 것인지. 아니면 남이 만든 것을 어설프게 짜깁기 한 것은 아닌지. 순전히 내것이라고 말하기도 힘든 상황에 처하기 일쑤다. 음악은 어디서 들었던 것 같고, 그림은 어디서 봤던 것 같고, 글은 왠지 누군가를 따라 한것 같은 냄새가 난다. 원숭이에게 크래파스를 주고 그린 그림보다 내 그림이 나은 것은 내가 ‘인간’ 이기 때문이지 내가 예술적인 상상력이 원숭이보다 뛰어난 것은 또 아닌것 같단 말이지.

순전히 내 힘으로 만든 무엇인가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지 상상해 보았다. 가능하다면 내 일생의 목표로 삼아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일단 씨를 뿌려서 나무를 키워야 겠다. 물과 햇빛은 누군가 다른이가 만든 것은 아니니까 괜찮을 것 같다. 이를 베어내서 종이를 조금 만들어야겠다. 자연에서 염료를 채취해서 여기다가 무엇을 써보자. 하긴 글자라는 것도 무료 배포되고 있을 뿐이지 과거의 인류가 만들어낸 것이었다면 문제가 된다. 그러면 그림을 그려야 겠다. 그림으로 무엇인가 메시지를 담으면 이것들은 인간 ‘류휘정’의 순수 창작물이 아닐까? 그런데 이 메시지라는 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추적해보면 이 또한 만만치 않다. 내가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내가 교육되고 인간으로 사회화된 내용이 조금도 포함되어있지 않은 메시지라는 것이 어디 있지? 삑. 여기서 막혔다.

내가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이상에야 세상은 역시 다른 사람에 의해 (현대인 혹은 고인) 물질화 되거나 추상화된 산물들의 집합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Basic Elements 들의 재조합이지 이미 이러한 Element를 새로 만들거나, 디자인 하는 일 조차도 힘든 상황이다. 너무 레드오션이다. 나는 순수한 창작을 꿈꾸지만 현실은 지루한 LEGO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가끔 LEGO로라도 멋진 작품을 만들면 박수는 받겠지만.          

바흐 b 단조 미사 –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성 토마스 합장단

Classical Music을 즐겨듣지만! 누군가 나에게 “그 중에서도 어떤 음악을 들으세요?” 물어보면 “모짜르트 이후부터 라흐마니노프 이전까지요.” 라고 말을 한다. 사실 뭐 대부분이 커버되는 범위지만, 중고등학교때 배운 서양 고전음악의 시대 중 빠져야 할 부분이 하나 있는데 바로 바로크 음악이다. 바흐, 하이든, 헨델로 대표되는 이들 시대의 음악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울타리로 둘러싸인 느낌이었다. 집에 있는 음반에도 거의 손이 안간채 방치되기를 몇년. 그런데 오늘 아무래도 그 편견을 깨버려야겠다.


자주가는 예술의 전당에서의 클래식 콘서트이지만, 이번 만큼의 중량감을 느끼는 콘서트는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가는 콘서트들이 다 무료로 티켓을 구한 공연들이기에 -_-; 이러한 소위 티켓 파워가 있는 공연들은 초대권을 구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차저차 어렵게 구한 티켓이니만큼, 충분히 즐기고 오기위해서 사전 예습이 필수! 가디너가 지휘한 음반으로 열심히 공부도 하고 귀에 충분히 숙달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공연자체에 대해서는 기립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래도 나름 후기를 써야겠다고 작심한 만큼 좋은 점과 나쁜점 몇 가지를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 따뜻한 악기소리 – 어찌 이렇게 고급스럽고 경건한 악기소리가 날 수 있을까? 고가의 악기를 쓰는 것도 그렇고 세계 일류 수준의 연주자들이라 미세한 실수도 찾기 힘들었다.


2. 관람태도 – 주최측에서도 악장간 박수를 엄금하고, 또 음악이 끝난후 바로 터지는 박수에 대해서 주의를 충분히 주었는지, 나쁜 타이밍에 터지는 박수가 하나도 없었을 뿐더러 관람태도도 매우 좋았다. 초대권을 많이 뿌리지는 않은 모양이고, 관람 연령층이 꽤나 높아서 정숙한 공연 분위기가 좋았다.




1. 끝으로 갈수록 지치는 합창단 – 소년 합창단이니만큼 2시간이 넘는 공연시간 내내 끝까지 집중력을 유기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무래도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목소리의 힘이 떨어지고 앙상블이 흐트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지휘자도 끝에는 거의 합창단만 지휘하는 모습.


2. 조금 더 친절한 자막 – 물론 음악이 주가 되는 공연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조금 더 자세한 자막을 위에 틀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두운 공연장 안에서 프로그램 북을 보면서 가사를 찾기도 힘들었다. (이내 포기했다)


어러가지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정말 인상적인 공연인 것은 틀림없었다. 바로크 음악을 듣게 된 계기가 될 것도 의미있지만, 합창단이 이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도 새삼스래 재발견하게 되었고 말이다. 합창이라고는 매번 베토벤 9번만 듣다가, 이러한 목소리가 차곡차곡 겹쳐서 쌓이는 아름다움은 거의 처음 느껴본 것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이러한 문화생활은 언제나 재충전의 계기가 된다. 또 열심히 다음 공연 사냥을 위해 떠나야지 – _-;

라흐마니노프, 음악이 즐거운 이유

 어느 중학교 시절의 과학 수업시간이었다. 늘 낮은 평행선을 달리는 톤의 목소리로 수업을 하시던 작은 키의 남자 선생님은 칠판과 마주보고 수업을 하고 계셨다. 별로 유머가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히 놀림이 되는 외모나 특징이 없던 선생님은 수업시간에는 아이들의 집중 대상이 아니었는데, 아이들은 늘 다른 과목의 공부를 하거나, 자거나 하는 일이 많았다. 언젠가, 소란스럽게 잡담을 하던 아이가 걸려서 크게 체벌을 당한 이후로, 선생님의 작은 몸에서 깜짝 놀랄만한 큰 힘이 발휘된다는 것을 모두들 알았기 때문에 수업시간에는 아주 조용한 상태로 시계의 초침소리가 크게 들리게 되었다.


 선생님 당신도 이러한 적막하고 무미 건조한, 하품나는 분위기에서의 수업을 본인의 단점으로 여기고 극복해보려는 노력이 보이는 행동을 티나게 하실 때가 있었다. 젊은 선생님 이셨으므로 주위의 유행이 되는 이야기라던가, 인기있는 TV 프로그램 이야기라던가, 혹은 친구에게 들은 것으로 보이는 유머를 구사할 때가 있으셨는데, 반응이 좋을때면 칠판으로 반쯤 돌아서서 들키지 않게 살짝 흡족한 미소를 띄는 것이 “좋아! 오늘도 한건했어!”라는 반응 같았다.


 이날도 여전히 따분한 목소리만이 교실에 울려 퍼질때, 선생님은 오늘 준비해온 카드를 꺼내드셨다. 세상에는 셀 수도 없는 많은 의문들이 있지. 흔히 아주 어려운 것들을 생각하지만, 엄청나게 간단하면서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아. 너희들 음악이 왜 즐거운지 아냐?” 물론, 중학생들이,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것을 생각하면서 음악을 듣지는 않는다. 도대체 이번 카드는 다음 패가 뭔지 예측이 힘들었다. 넌센스 퀴즈로 말도 안되는 정답일지, 답에 유머가 포함되어 나올지, 정말로 진지한 과학적 설명을 해주실지. 아무튼 평소에는 당연히 생각했던 것에 나름대로 이유를 붙여보려는 시도에 공감해서 많은 수의 학생이 선생님을 주시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이로써 의도했던 효과의 절반은 달성. 자. 이제 마무리를 잘하면 되는 것.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와 음악의 리듬이 일치하기 때문이지. 미개한 아프리카의 부족들이 일정한 리듬을 가지는 타악기를 두드리면서 흥겨워 하는 모습을 많이 봤을꺼야. 음악은 바로 그곳에서부터 출발했거든.” 실망이다. 과학선생님 아니랄까바, 설명이 너무 논리 정연하고 “과연~” 감탄하게 되는 “AHA!”효과가 없다. 음악과 연결되면 뭔가 더 감성적일 줄 알았는데.. 선생님으로 향했던 아이들의 시선은 특별 한정 세일 마감을 아쉬워하며 돌아서는 아주머니들의 발걸음 처럼 제각각 산란되고 “으응~ 그랬을 수도 있지.” 하는 납득으로 상황이 종료되었다. 오늘은 실패다. 나 역시 시시함에 고개를 다시 파묻었지만, 잠은 오지 않은 채 그 의문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음악은 도대체 왜 즐거운 것일까?”




 내가 라흐마니노프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때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상 위에 있는 조그만 CD Player로 늘 음악을 틀어놓고 공부를 했었는데, 라디오도 들었고, 팝, 락, 발라드, 클래식은 물론, 한국, 일본, 미국, 유럽 등등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음악들을 친구들에게 추천받아 듣던 시절이었다. 보통 학교에서는 가지고 다니는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고, 집에서는 그 CD Player를 사용했었다.


 그날은 집에 있는 클래식 음반들 중 집히는 대로 한 개를 플레이어에 넣고 들으면서 무엇인가 매우 어려운 과제를 하고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밖은 해가 지면서 어두움이 내리깔려 있었지만 흐린 날씨 탓에 새벽인지, 저녁인지 잘 구분이 안가는 상황이었다. 스탠드 램프 하나의 불빛만 밝힌채로 적막 속에서 한문제 한문제 낑낑대면서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뚝, 내 노력의 결정체(!)인 종이 위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양파 껍질을 벗길 때 처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나는 것이다! 서둘러 하던 과제를 치우고 화장실로 달려가서 거울을 보는데 빨갛게 충혈된 눈에는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혀있었다.


 도대체 이 음악은 무엇이길래 나를 이렇게, 나는 어떤 생각도 안했는데, 단순히 어려운 과제로 머리가 뒤죽박죽인 상황이었는데도, 이렇게 만드는지 놀라웠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관객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기 위해서 대편성의 현악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OST를 만들고 감동적인 대사를 쓰고 진짜처럼 터지듯 흐느끼는 연기자를 고용한다. 그리고는 예고편에서 극도로 절제된 힌트만을 주고 실제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정교하게 다듬어 마치 함정을 파는 스파이처럼 울음의 포인트를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런 노력에도 극장에서 “여기서 울라고 만들어 놓은 상황 인거야?”라는 생각을 팝콘을 씹으면서 태연히 하게 되는 영화가 대부분인 마당에 말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렇게 마법처럼 찾아와서 세상에는 이런 음악도 있다는 것을 어린 중학생의 감수성에 가르쳐주고 갔던 것이다. 그 후로도 이 음반은 10여년이 넘는 세월을 즐겨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 내 마음 속에 찾아왔던 것은 무엇이었는지는 꽤 오랜시간 동안 의문으로 남았다. 순백색의 결코 흐트러짐이 없는 정갈한 리듬 속에서 마치 샘물이 솓아나듯이 끊임 없이 깨끗하게 맑은 악상들이 겹겹이 쌓이는 2악장은 특히 좋아하는 부분.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2nd. Adagio sostenuto






 두 번째, 다시 라흐마니노프와 만난 것은 얼마전의 아침이었다. 일찍 일어나서 졸린 눈을 비비면서 스포츠 센터로 갔다. 40분의 조깅과 30분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다소 차가운 듯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옅은 안개가 낀, 숨을 들이 마시면 촉촉한 공기가 마음을 적시는 그런 아침이었다. 스쿠터에 시동을 걸고 경쾌한 엔진소리에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아무도 없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한참 올라가는 것이다. 그런 차가운 안개를 마시면서 말이다. 연구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해서는 시동을 끄고 계단을 한칸, 두칸, 한칸, 두칸씩 리듬을 맞추어 올라가서는 내 자리에 도착. 연구실에는 왠일인지 사람이 없었고, 컴퓨터의 스위치를 켜고 자리 뒤쪽의 창문을 활짝 열어서 산 속의 신선한 공기를 가득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헤드폰을 쓰고 인터넷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방송을 클릭한다.


 재회의 무대는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이었다. 특별히 유명한 3악장. 바쁘게 이메일을 확인하려 움직이던 손놀림을 그대로 멈추고 의자 뒤로 목을 받치고는 편히 기댔다. 그리고는 반바퀴 뒤로 돌아서 방금 열었던 창문으로 밀려들어오는 공기를 한번 크게 심호흠 한 후에 귀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한다. 그리고는 눈을 감는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악을 처음 만날 때는, 좋아하는 사람과 처음 데이트할 때의 기분처럼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가슴이 꽉막힌 듯 답답하고, 표현하고 싶은데 한발짝을 넘지 못하는 애절한 바이올린의 외침은,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싶은 데 소리치지 못하고, 사랑을 전달하고 싶은데 전달하지 못하고, 울고 싶은데 터져나오는 눈물을 눌러서 참고만 있는 그런 현실의 한계에 괴로워하는 인간 모습의 오마쥬다. 두 번의 클라이막스에서 라흐마니노프는 듣는이를 탁 트인 초원, 거대한 자연에 대려다 놓고는 이 곳에서는 마음 껏 소리치고, 전달하고, 달려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는 오케스트라의 몰아치는 선율로 이렇게 해보라고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주기도 하고 말이다. 내가 만난 두번째의 라흐마니노프는 그렇게 격정적이었다. 단순한 방문자가 아닌 모습을 하고 있었다.


Rachmaninov, Symphony No.2 in E minor op.27, 3rd. Adagio







 내게 음악이 왜 즐거운지에 대한 답은 중학교때의 과학 선생님이 아닌 두번의 경험을 통해서 라흐마니노프가 가르쳐 주었다. 음악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토론이 그런 것 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문학이 그런 것 처럼 다른 사람의 글을 읽어서 다른 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음악을 듣는 그 순간 만큼은 음악을 만든이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이 난다면, 그 음악을 작곡할때 작곡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음악을 들을 때 이유없이 웃음이 난다면, 음악을 작곡할때 흥겨움에 겨워서 작곡한 것이 틀림없다. 애절하게 가슴을 져미는 아픔이나, 거대한 상실 후의 허무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면 그러한 감정은 수년, 수십년, 혹은 수백년의 세월을 거쳐 음악을 통해 듣는이의 마음 속에 그대로 와서 복제 된 것이다.


 어제 소설가 이외수씨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을 글을 쓰는 기교를 쌓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할 필요가 있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 이유는 예술이란 결국 자신의 마음을 다른이에게 그대로 전달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이 먼저 감동을 받을 수 있어야 남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다.


 흔히 영화를 대리만족의 예술이라고 한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영화속 주인공의 모습에 우리를 투영시켜 현실 세계에서는 하지 못하는 여러가지 일들을 실제로 해 볼수 있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것이 즐거운 것이라고 한다. 꿈을 꾸면 우리는 원하는 것이 될 수 있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즐거운 꿈에서 깨어나는 것을 아쉬워하고, “원하는 것” “꿈을 꾼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음악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더 생생하고 (왜냐하면 음악은 중간의 어떤 감정의 전달자로서의 매개채가 상대적으로 없다) 더욱 더 편리하게 (음악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 되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음악이 ‘보관될 수 없는 공기의 울림’이라는 현실적 제약을 가지는 대신 선택한 크나큰 장점이다.


 사람은 늘 활기차고 들뜬 감정에 있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슬픔에 젖어, 또 때로는 화를 내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행복은 늘 들뜨고 활기찬 감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균일한 마음에 충실할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슬프더라도 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슬픔 그 자체라면, 비록 화가 나더라도 시기심이나 두려움이 섞이지 않은 순수함이라면, 이런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자연스러운 마음이라면 결국 행복한 것이 아닌지. 마치 어린 아기일때만 느낄 수 있는 절대적인 행복한 감정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완벽하게 원하는 감정으로 가득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함으로 혹은 열정으로, 때로는 환희로 말이다. 그래서 원하는 음악을 들으면 행복하고/즐거운 것이다.  




 10월 9일에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의 매우 인상적인 연주를 들려준 이반 피셔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내한한다는 소식에, 갈까 말까를 수없이 고민하고 있는 요즘이다. 이미 합리적인 자리들이 다 차버렸기 때문에 한발 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음반에서 들려준 역량의 절반만 발휘해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싸우고 있다. 빈필이 이벤트성으로 와서 “세상의 아름다운 클래식 100선” 이런 레파토리를 들려주는 공연보다는 훨씬 값어치가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비싸다. (ㅠ _ㅠ) 예술에 충분히 투자할 수 있는 분이라면 감히 비싼 돈 주고 가서 들어도 후회가 없으리라고 생각. 초대권도 좀 사라지고, 그래야 싸게 가서 듣는 사람 티켓 값도 좀 싸질 텐데. 고민중. 고민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