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 에리히 프롬

  이 책은 삶의 방식을 이분한다.

  • 나를 내가 소유하는 것으로 정의 하는 사람
  • 나를 나의 속성(Characteristic)으로 정의하는 사람

  저자는 후자를 모범적인 삶의 방향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개인 차원의 삶의 방식이 사회와 국가 차원으로 확대되고 미래 사회의 모습도 정의될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사회적 합의에 따라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가의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이를 위한 선결 조건들을 제시한다.

  나는 사회나 국가 차원에서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던 도중 얻은 일련의 결론과 이 책의 내용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인간 고통의 많은 부분은 ‘상실’에서 온다. 사랑, 계급, 부, 희망 등 모든 것을 잃을 때 가장 심한 고통을 느낀다. 무엇을 잃었다는 것은 그것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잃는 것도 마찬가지로 ‘상실’이다. 고통을 줄이려면, 즉 행복하려면 상실의 발생을 최대한 억제 해야 한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면서 사회적으로 주어진 일을 하고, 배고픔과 추위라는 일차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나면 사람은 무엇을 축적하거나, 또는 무엇을 발전 시킨다. 어떤 시각에서 보면 이 둘 모두 무엇을 얻는(have) 것이지만 나는 이 것을 둘로 나누어 생각한다. 하나는 내가 죽기 전에 상실의 위험이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죽을 때 까지 상실의 위험이 없는 것이다.

  당연히 행복의 관점에서 볼 때 상실의 위험이 없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 맞다. 경험, 가족, 끈끈한 우정, 외국어, 운동실력, 건강, 추억 등은 내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외국어 점수를 얻는 것과 외국어 실력을 얻는 것의 차이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무엇을 소유해야 한다는 유혹과 협박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광고, 주위의 시선, 관습 등은 항상 나의 자아를 내 소유의 물건으로 판단하게 만든다. 하지만 계속 더 큰 욕망을 추구하며 아무것도 나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 삶을 사느니 이 굴레를 벗어나 껍데기 없는 진정한 나로서 내가 이러한 존재임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태어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Symphony No. 3 – Anton Bruckner

음반으로 들을때는 다소 힘들지만, 실연을 가서 관람할 때면 오케스트라의 각 파트 위로 다채로운 색의 음(音)의 연기자들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그 형상들이 서로 싸우고, 춤추고, 놀라게하고, 합창하는 극(劇)이 무대 위의 무대에서 펼쳐진다.

이것이 Symphony를 Sym-Phony로 감상하는 방법이다. 어제의 감상에서 이런 발견에 새롭게 눈뜨고 집에 와서 눈을 감고 4번을 다시 감상하니 다른 감각의 즐거움이 느껴졌다.

감시와 처벌 – 미셸 푸코

독립된 사법권이란 얼마나 그 자체로 모순인가? 피지배자들은 지난 수 백년간 마치 물을 자르는 것처럼 권력과 사법권을 분리시키려 노력해왔지만 이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이기적인 한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이다. 다만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처벌의 방식을 다듬어 온 사실 자체로 이러한 투쟁은 성과가 있었다.

사법, 형벌, 복지, 범죄, 자유의 제한, 언론 등 사회학의 많은 개념과 기구의 목적들이 자신의 처한 입장에서 이해되고, 또한 권력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실현되는 사회에서 집단에 의한 개인의 처벌, 또는 개인 간의 투쟁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혹은 이러한 마찰이 적은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읽는 동안 여러가지 의문이 떠오르고 일부는 정리 되었지만 이 책은 분석에 집중할 뿐 결론은 내려주지 않는다.  

미디어의 이해 – 마셜 맥루한

The Medium is the message

위의 “미디어는 메시지” 라고 번역되는 맥루한의 유명한 경구의 원문을 알게 된 후 도서관에서 빌렸다. 이 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미디어에 대한 책이 아니다. 아마 원문이 “The Media is the message” 였다면 굳이 빌려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디어의 형식이나 경험보다 내용이 덜 중요함은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이 여기에 공감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전환”이라는 단어는 꾸준히 등장한다. 어느 분야에서든 임계치에 다다른 지점에서 전환이 일어난다. 현재가 상당히 많은 분야에서 이러한 전환이 일어나는 시기라는 것은 여러 “미디어”를 통해서 관찰되는데 이 것은 정보 이동의 속도 증가, 그리고 소프트웨어를 통한 자동화 때문이다.

자동차 중독에 걸린 사람들은 켄타우로스가 아니라 휠체어를 타는 뚱뚱이들에 더 가까운 것이다. 내 신체 능력을 임계치까지 이용하고 미디어로 확장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미디어에 의존하는 삶이란 그저 나를 미디어에 흘려보내는 것이다.

미디어의 이해가 잘 이해되고 공감될 수록 우리나라가 얼마나 미국 중심의 시각적 사고를 하고 있는지 느끼게 된다. 공감각적 경험, 절제의 미, 여백의 중요성 같은 색다른 체험은 그 균형을 위해서라도 의도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 페르낭 브로델

자본주의는 인간의 몇 가지 습성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정확히 이해하려면 인간의 유구한 역사와 특질을 연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자면 너무 방대하기에 13세기 이후 서양 사회를 살펴보면 100%는 아니지만 95% 이상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6권이나 되는 긴 서사를 읽는 것에는 2달이 넘게 걸렸지만 그 백미는 4권의 마지막 결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자본주의가 어떠한 토양에서 자라는지를 정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 이 부분을 조금 인용해본다.

1) 활력이 넘치고 진보하는 시장 경제

잉여의 부가 자유롭게 교환되는 시장 경제는 자본주의의 필수 조건이다. 하지만 그것이 충분 조건은 아니다.

2) 가문의 영속성과 연속적인 축적이 가능하도록 계서화된 사회

내가 모두 소비하지 않고 부를 축적하고 이를 내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사회가 용인할 수 있도록 계급화 되어야 한다.

3) 세계 시장이라는 고도의 이익을 누리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서의 이동 

단순한 시장 경제에서 현대와 같은 자본주의로의 파격적인 성장은 항로의 발달, 통신의 발달, 표준화된 금융 시스템을 통한 세계 시장의 등장으로 비로소 가능해 졌다.

 그동안 자본주의를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서적이 없다는 것이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 자본주의는 인류가 만들어낸 거대한 계(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역사적인 측면, 지리적인 측면, 사회 계층적인 측면, 부의 교환과 흐름에 대한 측면에서 살펴볼 수는 있지만 이를 하나의 시점과 하나의 층(層)으로는 절대 살펴볼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