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긋지긋한 ‘한’ 이데올로기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래의 일부분이다. 그들이 하나 몰랐던 사실은 이 노래에서 말하는 ‘통일’은 남과 북의 통일 뿐 아니라 남한 사람들 사이의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지긋지긋하게 듣는 세뇌에 가까운 이 ‘통일’이라는 강박은 우리 사회의 모든 면을 오염시키고 있다.

한국은 ‘한’국이며 우리나라의 여당은 ‘한’나라 당이다. 우리 민족은 ‘한’ 민족이고 ‘한’ 겨례다. 우리 민족의 특질을 ‘한’이라고 한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긴가?)

다문화 가정과 새터민을 위해 우리 정부가 노력하는 가장 큰 방향은 그들을 우리 사회에 적응 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한국과는 다른 이질 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 적응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한국化 시키는 것이 곧 그들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의 정치인들은 국가 통합을 하나의 지상 과제처럼 이야기 한다. 전국민이 힘을 모아 외세의 침략에 맞섰던 사례와 IMF 때의 금 모으기 운동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며 한국민의 저력을 내세운다. 그들이 말하는 국가 통합이란 위정자의 결정에 온 국민이 이견 없이 힘을 실어주는 것을 말한다. 국민은 위정자가 사고 칠 때마다 목숨만을 살려주는 에어백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모든 국민이 다양한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민주주의를 우리는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 왜 ‘한’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수 천년, 혹은 수 만년을 계속되어온 역사 속에서 약자로만 살아온 민족의 특성상, 마치 초식 동물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며 돌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생존에 유리한 생활양식이 유전자처럼 몸과 마음에 깊숙하게 베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도 남을 침략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약했다는 뜻이고, 사농공상이라는 말처럼 생산에 기여하는 계급 중에 ‘농’을 가장 우위에 두었다는 것은 그만큼 초식 동물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민초의 삶이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길이었던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모두들 똘똘 뭉쳐 ‘정’을 맞는 일이 없어야 하고 항상 엄격한 내부 기준을 적용하여 새로운 것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와 의심은 필수 사항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하나 됨의 가치’를 중시하는 민족의 태도가 손쉽게 위정자의 지배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 뿐 아니라, 기업, 조직, 사회, 학교, 친목단체 등에도 모두 적용 될 수 있다. 어느 하나의 무리에 속해 그나마 안정된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모두의 눈 밖에 나지 않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를 이용한 제도나 사회 윤리적 규범들이 겹겹이 우리는 옭아매고 있고 이를 벗어나지 않는, 벗어날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잘 사회화가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군대에 가야 역시 사람이 된다.”고 이를 권유한다.

또한 이러한 ‘하나 됨의 가치’는 우리 사회가 근본하고 있는 가치, 그것도 특히 자유 민주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스스로 이런 주류에 속하지 않고 다른 삶을 살며 다른 생각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강력한 규제와 갱생을 강요한다. 그 사람에게 자유와 자신의 주체적은 삶을 살 민주의 권리는 어디에 있는가? 자유주의를 부정하는 사람까지 끌어 안는 것이 자유주의이고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보장해 주는 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특히, 자유 민주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국가 차원의 ‘한’ 이데올로기 탈피 프로젝트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국가가 가진 생존 전략을 단순히 하나된 국민의 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 가진 다양한 생각을 권장하고 그 속에서 창의적인 미래 전략을 세우고 국가 전체가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목소리나 창의적인 생각이 당사자의 영달을 위해 묻히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보장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당장 쉽지는 않다. 근본적인 문제는 위정자 몇몇의 생각이 바뀐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삶의 방식 내부에 깊숙하게 박힌 무엇인가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데 있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성인이 된 사람에게 이러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조금 잔인해 보이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면서 자란 우리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금씩의 변화가 깨어있는 사람의 사회 시스템의 재정비와, 창의성을 살리는 교육의 방향으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기 힘든 일이라도, 그 길 밖에 없다면 가야 하는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