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과 본질

지하철 의자에서 시작된 짧은 단상을 적어본다.

나는 지하철 자리에 앉으면 흔히 정면을 바라보지 않는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지하철 노선도의 앞선 두 번째 정거장 이름을 본다거나, 휴대폰으로 주말 날씨를 확인하거나 늘 시선은 아래 위를 오간다.

정면을 바라볼 때는 사시(斜視)로나마 맞은편의 객이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구나 하는 것을 확인할 때인데 오늘은 보아하니 피곤해 보이는 아저씨의 다소 벌어진 무릎, 그리고 그 아래 지저분한 검은색 구두, 그리고 그 사이의 유일하게 각(角)을 발견할 수 있는 나풀거리는 바지단과 양말이 눈에 들어온다.

긴 바지와 양말을 신었을 때에는 다리의 맨살이 보이면 안 된다. 그래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서양의 복식을 무미건조하게 서술하면 그렇다. 그래서 정장에 신는 양말을 늘려보면 종아리의 절반은 지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저 복식은 그 기준에 잘못되었다. 아저씨의 양말은 바지 단을 한참이나 내려와 겨우 복숭아뼈를 가릴만한 곳에서 주름져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내 생각의 가지가 출발했다. 저 현상은 왜 벌어졌을까?

한 가지는 저 양말이 아저씨의 닳고 닳은 구두와 마찬가지로 오래되어서 흘러내린 후 거기에 멈췄을 수도 있다. 혹사 당해 흐늘흐늘해진 양말이 흘러내려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럴 경우 양말을 버리고 새 양말을 구입해야 해결되는 문제다.

또 하나는 저 아저씨가 이렇게 양말을 신는 것을 의도한 경우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배기 팬츠를 1800년대 사람이 보았을 때를 상상해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럴 경우 아저씨에게 중학교 가정 과목을 수강시킨다거나 하는 방법이 있겠다. 새 양말을 구입하는 것처럼 확실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세상에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확실한 방법은 없다.

만약의 경우지만 이렇게 현상과 그 원인이 되는 본질이 1대 1로 정해진다면 거리는 조금 더 깨끗해지고, 교통 흐름은 더 원활해지고 세상의 문제 해결은 참 쉬워질 것이다. 어려운 점은 대부분의 현상이 여러 가지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고 어떤 원인이 얼마만큼의 지분을 차지하는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위의 경우에서 아저씨에게 새 양말을 주거나, 가정 과목을 수강 시켜서 문제 해결을 하고자 할 때 흘러내린 양말이라는 현상이 위 두 가지 원인 양쪽 모두의 현상이라면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문제를 하나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실수를 종종 범한다. 하나의 문제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세상 대부분의 현상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특히 대부분의 문제점에는 더 여러가지의 원인이 있다. 만약 한가지 원인을 가진 문제점이라고 하면 누군가 이미 해결했거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머리를 싸매는 고민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요즘 내가 회사에서 마주치는 많은 문제들도 사실은 여러개의 본질이 나타낸 현상인데, 내가 너무 몇 가지의 “무엇 때문에” 라는 것으로 한정 지어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흔히들 “그 팀장이 추진력이 없어서  그래.” “그 계약 때문에 우리회사의 손해가 얼만데, 도대체 법무팀은 뭐하는거야?”, “기술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상용화까지는 문제 없어.” 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마는데, 회사라는 고도의 복잡한 유기체에서 하나의 원인을 통해 해결 할 만한 속성의 문제는 거의 없다. 비싼 컨설팅사의 비싼 사람들이 많은 시간동안 생각을 대신해 찾아주는 것은 이러한 문제점과 다양한 본질의 연결 고리이다.

문제 현상이, 여러개의 본질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드는 시간을 절약하고 또 완벽하게 해결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나의 처방을 취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는다. 본질과 문제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설계도가 있으면 문제 회피가 가능하다. 뭐, 말은 쉽지 나도 잘 되지 않는다.

나일 강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본류(本流)라는 것은 유량이 많은 흐름을 찾아내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모든 지류들을 하나하나 측정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다. 처음 만난 지류를 따라 올라가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역시 중요한 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역시 중요한 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삶의 굄 돌 역할을 하는 묵직한 기억의 조각들은 그 조각을 어디에서 발견했는지, 어떤 모양을 하고 무슨 색을 띄고 있는지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다. 그 대상에 대해 생각하면 홀연히 사라져, 그런 것이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된다. 물 속의 기포처럼 본질은 볼 수 없지만, 그것의 영향력이 주위를 변화시키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하게 알아챌 수 있을 뿐이다.


  감정이 응결돼서 나타나는 이러한 기억의 조각들은 진주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진주처럼 항상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떤 기억은 눈이 부셔 쳐다볼 수 없지만, 또 다른 어떤 기억은 똑바로 응시하는 것으로 자아를 붕괴시킬 만큼 강력한 것도 있다. 아마 이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방어 기제가 작용해 마음 속 어딘가에 꽁꽁 숨겨져 있음이 틀림 없다. 사람의 겉 모습이 육지라면 마음은 깊은 심해 같다. 엄청 난 것이 있음에 틀림없지만, 무슨 꿍꿍이가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파도를 보고 어렴풋한 짐작 밖에 할 수가 없다.


  피상적인 감정들을 하나씩 벗겨내어 그러한 본질 적인 것을 알아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세상의 무엇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나의 무엇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인생의 여정에서 나는 어디까지 나를 알 수 있을까. 최후의 순간에 알아낸 자신과 얼마나 나를 동일시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