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ist] My branch manager is a radish(내 지점 매니저는 무)

혼란스러운 뱅킹 시스템을 길들이는 새로운 방법들

May 2nd 2019

25살의 학생인 유는 간단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머리가 아팠다: 어떤 은행에 예금해야 하지? 3개의 다른 은행에 6개의 계좌가 있다. 한 은행은 장학금 지급을 위해 수여 기관에서 지정된 곳이고, 다른 곳은 군에 입대 했던 동안 여러 혜택을 준다. 세 번째는 전 고용주가 급여를 지급하던 곳이다. 그는 다른 휴면 계좌들과, “기억해야 할 너무 많은 카드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단지 꽁돈을 얻기 위해 발급 받았다. “어떤 영업사원이 사무실에 찾아오더니 30만원만 쓰면 10만원을 돌려 받는다고 말했어요.” 그는 그 카드를 딱 한 번 이용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남용이 흔한한 일이다. 성인 1인당 평균 5.2개의 은행 계좌와 3.6개의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다. 금융 상품들은 적합성 여부나 금융기관이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지와는 관계 없이 거의 전적으로 개인 간 관계에 의해 선택되고 있다. 신용카드는 커미션 수익을 노린 프리랜서 영업사원에 의해 그들의 지인에게 퍼뜨려지고 있다. 고객 유치에서의 결함들은 한국에서의 뱅킹이 오랫동안 끔찍한 경험이었음을 의미한다. 모바일 뱅킹 앱들은 형편 없었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온라인 결제를 위해서 일반적으로 40회의 클릭과 4번의 비밀번호 입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디지털 신규 서비스들의 광풍이 불었다. 몇몇은 한국 사람들에게 이 존재하는 뒤죽박죽을 다루는 법을 도와주었고; 다른 몇은 이를 더 낫게 대체하려 했다.

2015년 한국의 정부 기관인 금융위원회(FSC)는 핀테크 기업들을 육성하여 기존 금융시장을 자극하고 고객 서비스를 개선하기로 결정했다고 FSC 와 연계된 싱크탱크인 금융연구원의 서정호는 말한다. 새롭게 등장한 야망에 찬 기업 중 하나는 비바 리퍼블리카이다. 12월 이 스타트업은 8천만불 규모의 펀딩을 받아 12억불의 기업가치로 추산되는 대한민국의 첫 번째 핀테크 유니콘이 되었다. (유니콘: 기업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되는 비상장 기업)

전직 치과의사 이승건에 의해 2013년 설립된 비바 리퍼블리카는 Toss를 통해 디지털 결제 시장에 뛰어들기 전 몇 개의 다른 모험을 시도했다. 이후 Toss는 종합 돈 관리 앱으로 성장했다. 사용자는 계좌, 신용카드, 대출을 하나의 화면으로 통합하고, 분류 별 지출도 표시된다. 이용자를 금융상품에 가입할 수 있으며 Toss는 커미션을 취한다. “편리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찾는다면, Toss를 이용해야 합니다” overbanked 학생 유는 말한다. “내가 얼마나 썼는지, 해외 주식에 얼마나 투자 했는지, P2P 펀딩에 얼마를 투자 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Toss의 빠른 성장은 기존 뱅킹 경험의 끔찍함을 증명한다. Toss는 천백만 가입자를 확보 했으며, 이는 대한민국 인구의 1/4 이다. 하지만 Toss 야망은 한층 더 크다. 그들은 디지털 은행 설립을 위한 허가를 노리고 있다. 이승건 창업주가 선언한 이 목표는 금융에 관한 모든 것을 위한 대한민국의 압도적 “수퍼-앱”을 만드는 것이다. 은행들은 Toss를 위협으로 보지 않고 고객 확보 비용을 절감하는 파트너로 인식한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는 은행은 손해를 볼 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고객 참여를 얻고 그들은 공급자가 될 것입니다.”

2012년 설립된 핀테크 기업 레이니스트의 뱅크 샐러드(뱅킹, 하지만 건강하게)는 더 좁은 접근 방식을 취한다. 이들은 4백만 이용자를 확보했고 마찬가지로 계좌 통합, 자산 관리를 제공하지만, 결제나 이체를 제공하지 않는다. 최고경영자 김태훈은 수퍼히어로 영화 “아이언맨”에 나오는 인공지능 비서 자비스의 금융-조언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레이니스트의 강점은 사용자의 지출 패턴 기반의 상품을 추천하는 데이터 기반 소개 시스템이다.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들의 파트너 기관이 다른 경로, 예를 들어 모집 보너스를 제공해서 대리인에 의해 모집된 경우, 월 평균 60만원을 쓰고 4달을 유지한다. 뱅크 샐러드를 통해 가입한 고객은 매달 3배 많이 쓰고 거의 3배 가까운 기간 동안 유지한다. 따라서 카드 발생사는 지불하는 커미션 비용을 아낄 수 있다.

Salad, tossed

양쪽 앱 모두 고객 확보를 합리화 하고, 서비스의 질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설정하여, 만약 Toss가 은행업에 진출하는 것이 성공한다면 정면으로 경쟁하여 한국 한국의 은행업을 뒤흔들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가공할만한 경쟁자가 있다. 무려 94%의 한국인이 이용하는 소셜 미디어와 모바일 게임 대기업 카카오의 채팅 앱 카카오톡이다. 위챗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결제 기능, 카카오 페이가 포함되어있어 2천 8백만명의 등록 이용자를 보유하고 있다. 2018년 20조원 이상의 결제에 이용되었다.

지배적인 소셜 미디어 기업의 결제 시장에서의 성공은 다른 핀테크 기업에게는 명백히 흥미롭다. 2017년 2월 Ant는 막 시작한 카카오 페이의 40% 지분을 구매했다. 카카오 페이의 최고 전략 담당자 신원근은 Ant의 파트너로서의 매력은 그들의 포트폴리오가 카카오 페이가 하고 싶은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Ant로서는 카카오 톡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다. “그들은 메신저 앱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고 싶어 했습니다.”

카카오는 한국의 기존 은행들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2017년 카카오 브랜드의 모기업 주식회사 카카오를 포함한 컨소시움은 대한민국 최초의 디지털 은행 허가 두 건 중 하나를 확보했다. 카카오 은행은 수월히 성공하였다. : 13일 만에 2백만 가입자 예금을 유치했고, 현재는 8백 9십만 고객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디지털 은행 k-bank는 1백만 가입자 이상 뒤쳐져 있다) 금융위원회는 비금융기업들이 다수 지분을 확보한 은행과 2개 이상의 디지털 은행 허가를 고려하고 있다. (카카오는 카카오 은행의 오직 10%만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것이 허가된 최대치이다.)

카카오 은행은 다른 은행들이 건실함과 훌륭함을 내세우는 것과 달리 즐거움과 재미를 내세운다. 카카오 뱅크와 카카오 페이의 현금 카드는 카카오 톡의 이모지로 만들어진 여덟 괴짜 캐릭터 카카오 친구들을 특징으로 한다. 예를 들어, 무지는 토끼처럼 차려입은 긍정 단무지(노란 무 피클)이다. 가장 유명한 캐릭터인 라이언은 둥둥섬의 왕좌를 포기한 친절한 사자이며 갈기가 없는 것에 대해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

한국 사람들이 그들의 금융 생활을 카카오 계정으로 옮길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결국 5개의 계좌를 가지고 있을 때, 6번째를 만드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계좌를 개설한 다수의 사람들은 고객의 기대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신경하고 냉철한 은행원이 그들의 돈을 지키게 하는 것보다는, 친절하고 갈기 없는 사자로 대표되는 브랜드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source: https://www.economist.com/special-report/2019/05/02/south-korea-is-trying-to-make-banking-fun

삶이 나아지고 있다는 증명

내가 하루 하루를 버티는 힘은 앞으로는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실제로 나아진 것을 체감하는 데서 온다. 기대도 충분하고 체감도 충분할 때 그럭저럭 버텨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아파트 평수 늘리다가 젊음이 다 갔다’는 많은 한국 사람들의 한탄이 아닌게 아니라 ‘아파트 평수’로 상징되는 주거 환경의 개선의 체감이라도 있어야 아침 6시반에 일어나서 추운 현관 문 앞을 나설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요즘 이 체감이 어렵다. 왜냐하면 나라는 사람은 이 체감에도 시간을 충분히 쓸 수 있는 여유로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식이 풍요로워진 것을 알기 위해서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이 필요하고, 체력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기 위해선 운동이 필요하다. 유머나 사교가 늘었다 한들 대화와 친목이 없으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만히 누워서 음악을 들으며 유체 이탈을 통해 내 1m 위에서 나를 살펴보는 시간을 통해 내가 나아졌다는 것을 안다.

내게 또 이 시대를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속도로 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직 가능한 것은 소비를 통한 체감 뿐이다. 이것은 위에서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길 밖에 찾을 수 없는 많은 사람들과 내가 공통으로 가진 딜레마이다. 소비는 진득한 시간이 필요없이 즉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곳에서 자고, 좋은 차를 타고, 나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곳에 간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나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돈이 나를 나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는 것에 돈을 쓴다.

노동과 소비 만을 무한히 반복하는 삶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삶의 진정한 의미와 행복을 노동과 이를 통해 벌어들인 재화의 소비에서 찾는다. 소위 ‘노비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내 문제 의식은 현대 사회는 노동과 소비의 쳇바퀴를 도는 삶 이외의 삶을 사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가 더 느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만 그 과실을 나누어주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더 효율적이고 빠르게 만드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지불해야 할 실질적인 비용과 상대적 박탈감과 불안이 매우 크다. 스스로 느린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비교적 따뜻한 공간을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이것이 완전한 낭비가 아니며 사회를 유지 시키는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conomist] Shackles of the past (과거의 족쇄)

일본 기업들은 한국의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거부한다.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행동은 특히 한국에게는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 지배가 끝나고 20년이 지난 1965년이 되어서야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 한다. 그들은 아직까지 껄끄러운 관계에 있다. 심각한 문제가 지난 가을 한국의 대법원이 하위 법원에서의 판결을 뒤집고 전쟁 기간 중 두 일본기업, 미쓰비시 중공업과 일본 철강 & 스미토모 메탈의 강제 노역에 동원된 한국인들에 대한 보상 의무를 강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많은 유사한 사례들이 법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소한 한 차례, 일본 기업들이 중국의 강제 노동자들과 사적인 합의에 도달했다고 일본의 변호사 세이타 야마모토는 말한다. 한국에서의 판결에 의한 배상액의 합은 감당한 만한 것으로 보이는 인당 8천원에서 1억 5천만원 가량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 판결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관련 기업에게 배상금을 지불하지 말도록 압박하고 있다. 또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개입을 촉구했다.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사법 시스템에 개입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 조약이 원고 들의 주장을 무효화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국교 정상화 시기의 경제 원조가 전쟁 시기의 학대 들에 대한 보상격이라고 말한다. 일본 법원은 이에 근거하여 비슷한 보상 요구를 기각해 왔다. 한 일본 각료는 만약 보상금이 희생자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는 한국 정부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법원과 정부는 이러한 해석을 반박한다. 그들은 1992년과 그 후 몇 년간, 일본 각료들이 전쟁 시기 희생자 개개인들의 보상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일본 각료들은 일본과 미국 사이의 종전 조약에서 일본이 청구권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의 희생자들이 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법적인 주장보다 훨씬 더 깊다. “이번 법원의 판결은 나쁜 상호 관계를 초례 할 뿐 아니라 이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도쿄의 게이오 대학의 니시노 준야는 말한다. 남한 사람들은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충분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서독은 전쟁 범죄 자체와 함께 전쟁의 여파로 점령군에 의해 행해진 범죄도 심리한다. 또한 2000년에는 독일 정부와 나치 치하에서 강제 징용 노동자를 이용한 thyssenkrupp과 같은 기업들은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을 위한 공동의 펀드를 설립하였다. 2007년 활동이 종료될 때까지 44억 유로를 170만명의 사람들에게 지급했다. 일본은 이와 같은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1995년 일본 정부는 그들의 전쟁 침략을 인정하고 아시아의 희생자들에게 사죄했다. 하지만 현 총리인 아베 신조 정권 하에서는 최소한 어조 측면에서는 입장을 바꾸었다. 아베의 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가 중국으로 부터 분리되어 꼭두각시 주가 되었을 당시 이의 운영을 도왔고, 일본의 전시 생산을 늘리기 위해 노예 노동을 이용하는 것을 옹호했다. 1950년대 그는 총리가 되었다. “그 동안 많은 사과가 있었지만, 깊은 의미에서 나는 일본이 그들이 행한 일을 반성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쿄에 있는 강제 노동 희생자 들을 위한 NGO 기구의 대표 야노 히데키는 말한다.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한 정권이 역사와 정의보다는 경제 발전을 중요시한 독재 정권이라는 사실이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한국이 민주화 되기 전에는 여기 누구도 희생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일본 철강과 소송에서 원고측 변호사인 임재성은 말한다. 양국은 전쟁 기간 중 강제로 성노예로 착출된 한국 여성들에 대한 보상을 합의 하였으나 일정 부분은 한국 정부의 변덕으로 파기되었고 이는 증오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한국의 변호사들은 12월 24일까지 판절이 이행되지 않으면 일본 철강의 자산을 압류 하겠다고 말한다. 일본 정부는 이 것이 강한 반발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한다.

https://www.economist.com/asia/2018/12/22/japanese-firms-resist-compensating-forced-wartime-labourers-from-korea

재미와 규제

아이를 관찰하는 것은 재미있다.

성인을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들면 여러가지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이건 저럴까 저건 이럴까 살펴봐야 하는데 반하여, 아기들은 단순한 몇 가지 요소들로 파악이 가능하다. 또 몇 번이고 똑같은 실험을 해도 짜증을 내지 않고 일관성있게 받아준다. 아마 어른이라면 화를 내거나 지루하다고 핸드폰을 찾을 것이다.

예를 들면, “아기가 언제 재미를 느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내 결론을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관찰 결과 아기는 내가 하지 말라는 행동을 반복해서 하고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을 살피면서 재미를 느낀다. 이를 테면 내가 누워 있으면 내 배 위에 올라타서 말을 타고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나 한다. 또 나를 때리고 내가 아파서 하지 말라고 말하면 이번에는 조금 살살 때리고 나의 반응을 본다.

일반화 해서 말하면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경계가 어느 쯤인지 파악하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것 관심이 많다. “내가 혼나지 않을 만큼의 자유는 어느 정도지?” 외줄타기를 하듯 말이다. 그리고 거의 매번 그 경계를 넘을 때 아이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간다. 내가 아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화를 낸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착한 아이로 돌아가거나 대번 울어서 나의 처벌을 회피한다. 맞다. 아이는 태어날때 부터 말괄량이나 악동이다.

그러면 꼬리를 무는 생각이 “왜 그럴때 재미를 느끼도록 했을까?”라는 것이다. 아주 어릴때는 나를 올라타거나, 소꿉놀이 모래를 거실에 쏟아 붓고, 나이가 들면 학교 선생님을 상대로 장난을 치거나 더 큰 일탈을 반복한다. 마치 어른들을 시험하는 듯한 아이들의 행동은 무슨 가치가 있고, 아이들은 왜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 정말 100% 순수하게 쓸데 없는 일이라면 왜 그런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인가?

나는 규제를 넘나드는 행동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사회를 건전하게 변화시키기 위해 너무 보수적이지 않게, 또 너무 모험적이지 않게 적절하게 사회화 되는 것에 대한 인센티브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아이가 부모의 말을 하나의 어김없이 듣고 아무런 문제 될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면, 그 사회의 변화의 동력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사회에 새로운 구성원을 수용하기 위한 규제 완화의 동력은 어디 있을까? 아마 어른들이 합의한 세상, 소위 요즘 말하는 꼰대들의 세상이 천년 만년 계속 될 것이다.

또 규제를 벗어나는 것에만 재미를 느끼고 이에 대해 어른들이 어떻게 반응 하는지 관심조차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사회가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까? 사회를 공통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정의한다면, 사회를 유지하려는 인력보다 원심력이 강해서 사회가 더 작은 단위로 분열을 반복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축소 지향적인 사회보다는 팽창 지향적인, 다소는 이질감이 있는 사람과 문화라도 수용하는 사회가 더 영속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어떤 행동이 수용되는 범위, 나와 조금은 다른 행위를 해도 공동체로 끌어 안을 수 있는, 끊임없이 넓혀가면서 팽창 하려는 속성은 완전히 사회화 되기 전 단계의 아이들이 끊임없이 사회의 규제가 어딘가를 실험 하면서 발생하는 외적으로 가해지는 압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다소는 미성숙한 속성을 가진 아이들을 가진 사회가 지난 수백 만년 간 보다 정체 되어 있는 사회와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 남은 것이고 이는 우리 악동 아이들의 성취였다고 생각한다.

선택하다, 선택할 수 있다

사무실에서는 종이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자리는 파일이 대신한다. 사직서 혹은 사표는 옛날 드라마나 사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되었다.

‘사표를 품에 넣고 회사를 다닌다. 언제라도 상사한테 던지고 싶지만 사슴 같은 와이프와 토끼같은 자식들 때문에 참는다…’ 는 류의 어릴때 읽고 들었던 말들 말이다. 그 때마다 직장인의 고생, 책임감 같은 것을 떠올리며 ‘우리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고생하며 키웠구나’ 라는 이 뻔한 표현만큼 뻔한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내가 그 나이가 되고보니 직장인의 사직서 라는 것을 꼭 품고 다니는 이유가 조금 다르게 이해된다. 위에서의 압박에 대해 대항하는 상사에게 던져버리고 싶은 무기가 아니라, 막다른 길에서 모든 고생을 끝내고 해방할 수 있는 문 하나를 가슴속에 품고 다니는 것이다.

더 이상 희망도 없고, 에너지도 없을 때 하나의 위로. 그렇다고 그 문을 열고 쉽사리 나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선택하는 것이 아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