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나를 잘 이끌어 줄 수 있을까

‘자유’ 그 자체로는 관념 세계의 단어일 뿐 우리가 사는 세상과 연결 짓기 쉽지 않다. 경제적 자유, 신체적 자유, 사상의 자유처럼 앞뒤의 고리가 붙을 때 실제 규범으로 의미를 가진다.

자유는 없으면 갈망하게 되지만, 막상 있어도 부재로 생기는 갈망과 동일한 양의 감흥을 느끼지는 못한다. 눈에 보이는 형상도 아닌데다가 통상 행위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사회 장치에 의한 실제 자유의 부재를 느낄 때는 많지 않다. 공기와 같아서 우리의 행위 모든 곳에 스며 들어 있지만 이것이 자유인지는 의식을 집중하지 않으면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간 절대 선으로 여겨졌던 자유의 가치가 아직도 유효한 세상인지 의문이 들었다. 최근 대통령의 연설에서 ‘자유’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누구의 어떤 자유이며 현재 시점에서 다른 가치보다 강조 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자유’가 그 동안 내가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인 만큼의 절대적 옳은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각이 바뀌었고 이는 많은 부분 경험 때문이다.

많은 수의 자유가 있다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 주어진 자유를 즐기지 못하고, 선택의 기로에 서면 누군가 결정해주길 기다리면서 판단을 미루는 일도 많다. 그저 주어진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을 꾸준히 따라가면서 느끼는 행복이 더 큰 경우도 많다. 또 그런 환경에서 행한 노력이 대우 받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자유가 없던 15세기 사람들은 현재보다 불행하게 살았을까? 내 생각에는 수많은 자유와 권리, 다른 사람에게 방해 받지 않는 많은 시간을 가진 현대인들이 절대 15세기 사람들 보다 행복할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

무한한 자유와 가능성이 있는 어린이의 삶에서 벗어나 하나하나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선택을 하는 것, 그리고 나의 결정(決定)으로 나를 결정(結晶)으로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성취와 그에 따른 조금 더 차원 높은 행복을 누리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측면에서 폭 넓은 자유를 누리는 선택을 하는 것은 당장은 의무, 제약, 피곤에서 해방되는 방법이겠지만 내가 가진 많은 것을 와해 시킬 것이다.

생의 끝에는 숙명에 의해 하나의 가능성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모든 자유가 사라지고 그 하나의 가능성이 남을 때까지 하나하나 열린 문과 창문을 내 손으로 닫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엄폐

밖이 어두워지면 이때다 싶어 커튼을 칩니다. 빳빳한 감촉의 커튼은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한 역할을 합니다. 차가운 공기를 나누고, 집안의 어두움을 조금은 더합니다. 화려한 흰색이지만 반짝임을 주는 빛이 없기에 베이지 벽지 속으로 잘 녹아듭니다.

부산히 돌아다니며 벽에 붙은 스위치들은 모두 끄고 몇 가지 조명만 켜둡니다. 새로 임무를 부여받은 녀석들은 자기에게 허락된 아주 조금의 공간만을 은은한 노란색으로 비춥니다. 고개를 떨구고 바닥 만을 바라보는 아주 소심한 녀석들 입니다.

창문은 모두 닫습니다. 이중창 모두 닫습니다. 쓰지 않은 방문도 닫아둡니다. 간혹, 적당한 온도의 공기 속에 은은한 냄새가 섞여 있을 때, 함께 있고 싶은 기분이 들때는 아주 살짝만 창문을 열어 바람을 초대합니다. 하지만 아주 엄격하게 초대장을 살펴봅니다.

낮 동안 존재감을 뽐내며 자리를 차지하던 가구들은 대부분 희미한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춥니다. 일부는 어둠 속 각 진 모서리가 남아 있지만 그외 많은 부분은 사라집니다. 웅크리고, 해가 뜨기를 기다립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입니다.

시계는 벽지 속에 녹아 들고, 빛을 받고 있지 못하고, 목소리를 내지 않지만 자꾸 내 눈길을 사로 잡습니다. 오직 나만이 주인공이 되는 소중한 시간이 끝났다고 알려주니까요. 이 시간을 꽉꽉 채워넣지 않으면 오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입니다.

빛과 일, 시간과 목소리, 내일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하지 않으면 안되는 많은 것들은 하루 종일 내 주변을 날아다닙니다. 내 얄팍한 껍데기를 안쪽과 바깥쪽에서 퉁퉁 두들겨댑니다. 이런 완력은 내 성대를 두들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원치않는 걸음을 꽤나 많이 걷게 합니다. 어느 세상의 물리법칙을 따르는지 몰라도 나에 대한 동정이나 휴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통은 하루가 끝나가는 때 내 주변에 얇은 어둠과 진공의 장막을 칩니다. 내 사고의 반경을 내 몸에서 고작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나를 움직이는 동력을 오직 내부의 목소리에서만 얻고 싶습니다. 해야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80세를 살지만 10살만 사는 것과 같습니다.

From the new universe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너무도 큰 변화이다. 따라서 아이가 없는 시절의 경험이나 언어로는 묘사할 수가 없다. 차원이 다른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행동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시기나 질투 혹은 오해와 서운함 등의 감정이 이전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면 아이가 생긴 이후 아이와 느끼는 감정은 이러한 감정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섞어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로 표현하려 해도, 역시 불가능하다. 언어는 아이가 없는 사람과의 의사 소통을 고려해서 만들었나보다.

우주에 가는 것과 아이를 낳는 것을 비교하면 아이를 낳는 것이 인생에 훨씬 더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우주에 가는 것은 먼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라면, 아이를 낳는 것은 마치 블랙홀을 거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변화, 이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조금은 아쉬울 뻔 했다.

Among us

아들이 좋아하는 어몽어스 놀이가 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어몽어스 게임을 보고 만든 듯 하다. 아들은 어몽어스 스티커를 잘 보이는 곳 군데군데 붙인다. 유치원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날에는 어몽어스 마스크를 쓰고 나간다. 집에서 무기력하게 있는 나에게 어몽어스 놀이를 하자고 간청한다. 제발 아빠. 응?

규칙은 이렇다. 우주선을 조종하는 승무원(크루) 중에 임포스터라 불리는 사기꾼이 있다. 그 악당은 몰래 다른 평범하고 선량한 승무원을 해치우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숨어서 엔진을 고장내거나 하는 등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들키지 않고 미션을 완수하면 승리, 임포스터라는 정체를 들키면 패배로 놀이는 끝나게 된다.

놀이를 할 때면 아들은 엄마 아빠에게 귓속말로 “엄마는 임포스터야”, “아빠는 크루야” (배역은 늘 정해져있다) 알려주고 자기 역할은 비밀로 한다. (임포스터다) 거실은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 긴장감 넘치지만 겉으로는 평화로운 우주선이 되고, 잠시 후 나는 임포스터 아들에게 최후를 맞는 선량한 아빠로 끝나는 그런 놀이이다. 나는 아들과 엄마가 임포스터인지 의심만 하다가 끝끝내 밝히지 못하고 배신을 당한다.

내가 사는 세상에는 임포스터가 있나? 놀이할 때는 눈에 보이는 임포스터 아들을 모르는 척 한다. 반면 우주선 밖 진짜 세상에서는 임포스터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자부심을 가진 조그마한 신념 들이다. 예를 들면, “내가 상처 받는 것은 오해 때문이다. 오해는 치열하게 100%의 소통을 하면 없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악해보이는 것은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배경과 상황 때문이다.” 와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생각은 나를 편하게 해준다. 내가 더 좋은 사람으로 세상을 살 수 있게 해준다. 내가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해준다.

만약 어몽어스 놀이를 하는 것처럼 ‘우리 중(Among us)에 적이 있다’라고 생각해보자.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반드시 불안과 걱정, 경계와 의심이 싹튼다. 늘 하나의 수를 더 생각해야 한다. 임포스터와 같은 위선자를 만날 때, 상대가 말과 다르게 행동할 경우의 표정을 준비해야 한다. 하나의 변수이지만 방정식은 훨씬 더 풀기 어려워진다. 게다가 이러한 나의 고려가 뜻하지 않은 상처를 타인에게 주게 될 것이다. 머뭇거리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크루들은 임포스터가 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럴 바에 비록 내가 손해보는 일이 있고 배신당하는 일이 있어도, 세상은 선의로 가득한 사람들이 오해와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래, 오해가 바로 임포스터다!) 그게 현실과 다르더라도 말이다. 의심하는 생각보다는 바보같이 순박한 행위가, 복잡한 방정식 보다는 다른 사람의 위선이라는 변수를 제거한 간단한 수식이, 적어도 앞으로는 스스로 늘 임포스터 역할만을 하는 아들이 살아갈 세상을 훨씬 더 좋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가끔은 임포스터라고 거의 확신하게 되는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최선의 이해의 노력을 해도, 순수한 악당일지 모르겠다는 상대방을 마주치게 된다. 이 때는 뜨거운 냄비에 닿은 손가락 마냥 화들짝 놀라 손을 떼는, 관계의 단절 밖에는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배신을 당한 결과적 손해보다 신념을 무너뜨리는 근거가 더 무섭다. 안타깝지만 이러한 경험이 쌓일 수록 임포스터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주위를 돌고, 자리를 비우고, 대화보다는 가식의 웃음으로 말한다.

우주선을 타고 가는 일생이라는 항해는 어떻게 끝을 맺을까? 놀이의 결말은 (이론상으로는)두 가지다. 임포스터를 모두 찾아내어 평화로운 항해를 이어가거나, 임포스터에게 배신과 죽임을 당하거나. 현실의 결말은 조금 더 단순하다. 반드시 죽을 것이고, 반드시 임포스터를 만날 것이다. 다만 임포스터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고, 반대로 평화로운 내면으로의 항해를 목표로 할 수도 있다. 시나리오는 마찬가지로 두 가지고 다행히 이쪽은 미리 정해져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공감의 능력

“왜 저러고 살까? 나라면 안그래.” 라는 말을 할 때는 두 가지 상황이 있다.

첫 째.

완전히 다른 타인의 인생 작은 조각을 가지고 와서 내 인생에 끼워 맞춰보고 달라. 이상해. 마음에 안들어. 애초에 타인의 작은 부분이 만들어진 원인이나 배경을 이해하거나 이해할 시도를 하지 않는다.

둘 째.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인생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한 조각을 떼어내어 다른 사람의 평범함과 나란히 놓고 안어울려. 재미없어. 평범해. 다른 사람의 빛나는 순간은 외면하거나 별로 관심가지지 않는다.

나와 다른 사람의 파편화 된 삶의 조각들이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파되고 관음과 우월감이 범벅이 되어 스마트폰 스크린 위에 달라붙는다. 스마트폰의 뒷 면에는 좌절이나 패배감 매달려 있다.

왜 공감이나 위로는 시기나 편견에 압도 될까? 감정은 시간이 지날 수록 왜 더 날카로와 지는 것일까? 나를 남들 사이에서 정의하지 않고 오롯이 타인과 나를 잇는 선, 독립적인 관계 위에서 따뜻함 만을 주고 받을 수는 없는걸까? 이는 내가 ‘선함’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