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너를 통해서 인생을 두번 산다

그 동안 나로만 살았기에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새롭게 발견한다. 아마 아이를 키워보지 않았으면 절대로 발견하지 못했을 관계의 빈틈, 시간의 풍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많은 순간들이 다시 선명히 떠오른다. 아들아, 너의 존재 자체가 나를 두 번 살게 만드는구나.

어머니는 당신의 어떤 노력으로 나를 키웠구나. 수십년의 세월동안 아쉬운 소리 할때마다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 살짝살짝 한탄하던 어머니의 말씀이 나에게는 너무나 가벼웠다. 그건 대단한 무게의 표현을 가볍게 하셨던 탓이다. 그 노력의 밀도, 무게를 새롭게 마주하고 고개가 숙여진다.

아버지는 나를 어떻게 대했구나. 이미 많이 희미해진 아버지의 기억이 내 행동을 통해서 재현된다. 내가 무심코하는 아이에게 하는 말투, 행동이 데자뷰 처럼 느껴진 순간, 이는 데자뷰가 아닌 진짜 과거의 재현임을 깨닫는다. 그 때 느낀 어릴 때의 내 감정을 쫓아가보지만 이미 내게는 아들은 희미하고 아버지만 남았구나.

나는 그때 어떤 생각을 했구나. 나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현재를 미래에서 보고, 과거에서 본다. 너로 인해 인생을 경주마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걷는 철학자처럼 살게 된다. 두 번은 돌아보게 만들어 주는구나.

무한히 상승하는

무한히 상승하는 느낌의 음악이 좋다.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이나 블라디미르 마르티노프의 Come in! 같은. 감정의 고조, 솔로 악기의 아름다운 선율이 반복되어 질려갈 때 쯤 끝이 나는 그런 곡들을 좋아한다. 이런 곡을 들을 때면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높아지고, 나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몇 년 전까지는 이러한 무한히 상승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휴식은 나태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고, 멈춤은 퇴보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상승에 방해가 되는 옷에 매달린 모래 주머니 같은 것들을 무수히도 던져버렸다. 하지만 여기에는 모래가 아닌 보석들도 있었을 것이다.

인생의 반환점, 그리고 ‘무한히 상승해왔다는 느낌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알기 위해 주위를 둘러본다. 아주 소소한 것들만이 남았다는 자각이 든다. 펜로즈의 계단처럼 계속 걸어 올라왔지만 결국은 출발점과 큰 차이가 없다. ‘소유’라는 측면에서는 틀림없이 얻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내 자아와 자신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영민하지 못해진 두뇌와 계단을 더 빨리 올라가지 못하는 체력을 소진하는 사이 나는 무엇이 되었는가?

이제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내려가는 일만 남아 있을 지도 모르겠다. 사회가 만들어낸 어떤 측면에서는 더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껍데기를 벗어 던진 나 자신이 더 이상 성장할 수 있을까, 상승할 수 있을까. 무한히 하강하는 느낌도 좋아질 수 있는 것일까.

행복과 공포의 양면에서

아이가 부쩍 아빠,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아이가 요즘 즐겨보는 동화책의 엄마, 아빠에서 떨어져 혼자 세상을 헤쳐나간다는 내용이 원인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 계기야 어떻든 아이는 아빠, 엄마와 헤어질 수 있다는 것, 또 그 헤어짐이 영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아침마다 출근하는 아빠를 보면서 울고, ‘아빠 엄마랑 오래오래 같이 살자’는 60살 먹은 할아버지가 할법한 말을 자주 한다. 그 아이는 현재를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하진 않겠지만, 이 따뜻함과 안온함의 시간이 영원히 계속 되기를 아주 간절히 바라는 것 같다.

사실 이것은 어른인 나에게도 아주 오래전부터 묻어둔 공포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 이후에 나의 존재는 가족과의 관계와 동일한 것이 되어 버렸다. 오직 나 혼자만이 존재하는 나는 약 40년을 거슬러 올라가 태어날때의 벌거숭이로 돌아가거나, 약 40년을 미래로 가 모든 것을 잃기 직전에나 상상이 가능하다. 이미 나는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어쩌면 혼자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는 것도 괴로운 것일 수도 있다.

가족과의 관계가 나라는 존재가 되어버린 이후, 가족을 잃는다는 상상, 혹은 이 우주에서 이 관계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현실은 나의 죽음을 넘는 두려움이 되었다. 볼을 부비고, 살을 맞대고, 같이 웃고, 사진을 찍고, 즐거운 대화를 하고, 머리카락의 냄새를 맡는 것을 ‘사랑’이라는 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위로 표현한다. 하지만 반대로 그 ‘관계’를 잃는다는 엄청난 공포를 현재, 이 순간 이나마 잠시 잊기 위한 간절한 행위이기도 하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런 것처럼 무언가를 가졌을 때의 엄청난 기쁨은 그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공포이기도 하다. 나의 삶이 생겼을 때부터, 아이가 생겼을 때부터 이러한 기쁨과 공포의 동전이 주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또 이 동전은 삶의 매 순간마다 뒤집히기를 반복한다. 어떤 면을 보고 있을때의 공포는 때때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들지만, 이는 삶이라는 것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받아들이게 된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의 선택지는 완전한 공백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치 있는 것

생각해야 할 것이 참 많은 요즘이다. 많은 사람과의 관계, 많은 일의 미래를 가늠해보고 행동하고 하는데 정신없이 에너지를 쓴다. 문득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 “내 인생 동안 어디에 도달해야 하는가?”와 같은 결론 없는 문제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발걸음의 방향을 잃게 만든다.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무엇이 나에게 가치 있는가? 내가 평생을 걸쳐 바라봐야할 북극성은 무엇인가? 생각 끝에 지금은 세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것.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름다움이 퇴색되거나, 나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영원하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더 가치 있다.

사랑하는 사람. 내가 하는 행동이 누군가를 힘들게 하지 않는가? 이 행동이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과 일치하는가? 결국 나와 함께 뜻을 같이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중요하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것. 현재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나만 독식하는 아름다움이나, 내가 빠진 순간은 의미가 없어 진다. 같이 하는 순간이 가치 있다.

일요일 밤

달리고 오르내리던 아들은 기운이 다 빠진듯 숨소리도 조용히 잠들었다. 고른 날숨 소리가 방 밖으로 들려오는 듯 하지만 나지막히 잘 들리지 않는다. 꿈 속에서는 비행기를 타고 놀러 가거나 괴물에 쫓겨 달리고 있을지 몰라도 현실은 고요한 또 정적인 모습 자체다.

아내는 거실에 누워서 TV소리에 묻혀있다. 주말의 절반을 일로 보내고, 나머지의 절반은 아이와 그리고 나머지는 기어코 TV와 보내겠다고 한다. 나와 나누어 먹던 과자가 하나씩 줄어든다. 언제 잠들지 모르겠지만 주말 중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이 지금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누워서 거쉰을 듣다가 지금 시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브람스로 바꿨다. 내일은 늦잠을 자도 된다. 굳이 지금 잠들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누워있는 내 모습이 나름대로의 사치를 누리는 듯 하다. 평상 시 같으면 책을 읽을 시간이지만 주위의 모든 도서관이 문을 닫은 까닭에 읽고 싶은 책이 7~8권은 밀려있다. 쉽게 다시 열 것 같지 않다. 이제 사서 봐야하나?

우리 세 명은 아픈 사람도 없고 배가 고프지도 않으며 내일 일찍 일어날 일도 없다. 탐험에 나서야 할일도 없으며 치열해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이다. 그래 이정도면 훌륭하고 잘 지내왔으며 자랑스럽다. 각자가 지금 덮고 있는 이불의 따스함 정도만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