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나는 운전을 싫어한다. 도로에 나가면 머리가 아프다.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어깨가 아프고 발 끝이 저린다.

도로에는 질서가 없다. 정직하게 줄을 서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반반이다. 빠르게 달리는 사람과 느리게 달리는 사람이 반반이다. 참는 사람과 못참는 사람이 반반이다. 매순간 사고가 없는 것이 신기하다. 강력한 벌금이 질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다.

도로에서의 운전이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게임이라면 머리가 덜 아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른 룰을 가지고 다른 게임을 하는 중첩된 공간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질서가 없다. 어떤 이에게는 생계의 수단이자 밥벌이의 공간이고, 누구에게는 비오는 날 음악을 들으며 낭만을 즐기는 데이트 장소이자, 누구에게는 그저 한시 바삐 어디로 가야하기 위해 이용하는 통로이다. 각자는 도로를 이용하는 목적이 다르고, 지켜야 할 규칙이 다르다. 하나의 ground rule 을 만들기 어렵다. 모두가 다른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규칙을 어겼을 때 주는 패널티의 경중마저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런 공간에 있을 때 지켜야 할 원칙들을 정했다. 최대한 나의 손해가 없도록 보수적으로 움직일 것, 나의 책임이 없도록 최소한의 규칙은 준수할 것, 그리고 다른 규칙을 따르고 있는 사람을 이해할 것. 무질서에서 질서를 찾으려 하거나, 왜 질서가 없는지 탓하지 말고 그저 한 발짝 물러서 있는 것이 좋겠다.

특별한 것이 없는

특별한 재능이나, 딱히 물려받은 재산, 하다 못해 인생을 걸 용기도 없어 그저 부모나 선생이 알려주는 안전한 선택만을 해왔다. 나로서는 조그만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그저 열심히 하는 것 밖에 더 해볼 것이 없다.

문득 그 와중에 열심히 하기 위해 행복을 불태우고, 행복이 있을 것이라 더욱더 열심히 하는 자기모순적 삶의 굴레를 느낀다. 나 뿐 아니라 같은 길을 겉고 있는 수많은 소시민들의 모습이 위로가 될까. 도대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세상을 보는 여러가지 방법

1차원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 세상은 다양한 이분법의 조합이다. 모든 사람들을 무엇을 가졌나 아닌가를 가지고 판단한다. 자가와 전세, 국산차와 수입차, 남자와 여자, 강자와 약자, 필요한 것과 불필요 한 것. 우리편과 남의편을 가르고 우리편만 남아 있는 세상을 꿈꾼다.

2차원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의 특기는 줄 세우기다. 산수만 할 수 있으면 이렇게 세상을 볼 수 있다. 우리 회사의 매출은 몇 % 증가 했는지, 한국은 OECD 국가 중 몇 위 인지, 올림픽에서 몇 등을 했는지, 상위 몇 % 연봉을 받고 있는지. 세상은 줄세우기의 결과물이다.

3차원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 그리고 또 다른 사람과의 거리를 측정하고 입체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위치와 입장을 살펴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가진 따뜻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4차원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회적 현상, 다른 사람의 주장을 시대적 패턴에 의해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다. 사람의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상상하고 미래를 그려 본다. 현재의 시대정신을 지랫대 삼아 미래의 이상향을 그린다. 이를 위한 키는 역사와 철학이다. 아마 다독가일 것이다.

사람들 중 8할이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우리 시대가 원하는 것이 이런 분포인지, 인류의 본성이 이렇게 만드는 것인지 작게나마 걱정된다. 단 하나의 세대 만큼 짧은 시간이 흘러도 더 입체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한다.

 

자격

끊임없이 ‘나는 자격이 있는가?’ 묻는다.

나는 이 돈을 벌 자격이 있는가? 나는 이만큼의 석유를 탄소로 바꿀 자격이 있는가? 나는 휴식 시간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 나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나는 이렇게 안락한 집에 살 자격이 있는가? 나는 이렇게 고된 노동 없이 많을 것들을 누리고 살 자격이 있는가? 나는 나에게 주어진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는가? 나는 칭찬을 들을 자격이 있는가?

세상을 살면서 남들이 가진 것을 보고 나는 손해본다는 느낌이 종종 든다. 남들처럼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얻었을 기회와 이익을 지레 포기해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후회가 들때가 많다. 하지만 이 후회가 진짜 후회가 아닌 잠깐의 아쉬움에 머무르는 것은 ‘내가 자격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질문에 당당하고, 주저없이 ‘나는 자격이 된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러한 끊임없는 물음은 내가 과도한 욕심에 사로잡혀 내 능력과 자격을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고 급기야 탈이나는 것을 막아준다. 내가 자격이 있을때 무엇을 누리면 그것은 있다 없다 하다가도 결국 나에게 돌아오게 된다.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을 목표로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가 자격과 능력이 없을때 무엇을 누리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라진 대상을 그리워하며 불행해지거나 다시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하게 된다. 그런 어리석음 보다는 늘 손해본다는 우둔함이 낫다.

결혼

결혼이라는 단어에는 묶는다는 결(結)자가 있다. 결혼은 분명히 결합이기도 하다. 하지만 새로운 분리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과의 결합이자 익숙한 것과의 분리이다.

내 것과 아내의 책들을 하나의 커다란 책장에 정리할 때 결합이라는 관념이 실체화 되는  느낌이 들었다. 각자 일생을 읽었던 책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렬된다. 집들이 때 누군가 이 책장을 본다면 우리 가정의 표상으로서 받아들일 것이다.

새로 산 손톱깎이를 보며 결혼은 분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생 손톱깎이를 사본 적이 없다. 하나의 가정에는 하나의 손톱깎이. 그리고 새로운 손톱깎이는 새로운 가정.

내가 결혼할 때를 생각해보면 새로운 결합을 중시 여겨 익숙한 것과의 분리를 가벼이 여겼던 것 같다. 분리에 따르는 아픔을 느끼는 사람이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