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간의 일본 기차 여행 – 구마모토, 히로시마

구마모토 성을 보러 가기로 한다. 일본 여행을 역사와 유물을 중심으로 다니면 성, 절, 신사, 정원, 성, 절, 신사, 정원을 반복하게 된다. 이럴 때는 색다른 볼거리를 찾게 되는데 네이버 같은 대한민국 포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대다수는 한국 관광객들을 위한 광고 글로 의심된다. 인플루언서라는 분들도 공짜로 인플루언싱을 해주진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나는 구글 맵에서 ‘sightseeing spot’을 검색한다. 경험상 한국인이 덜 가면서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볼거리들을 추천해주곤 한다.

구마모토 성 까지는 나가사키에서도 봤던 오래된 노면 전차를 타고 간다. 노면 전차를 아직도 생산하고 있을까? 전기차 시대에 아마 아닐 것이다. 일본의 구형 기차들은 단종되면 부품이 다시 생산되지 않아 오래된 기차에서 여분의 부품을 빼내어 돌려 막기를 한다고 한다. 이 것이 큰 사고의 원인이 된 적이 있다고도 한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보다 오래된 것을 유지하는 것이 더 비쌀 지경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노면 전차란 녀석은 승하차도 불편하고, 탑승 인원도 적고, 정해진 노선만 다닐 수 있기 때문에 불편한 대중교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이 휘어지는 저상 전기 버스 등 탈 것이 훨씬 나은 대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나 저기나 뭔가를 바꾼다는 것은 여기나 저기나 쉽지 않겠지.

노면 전차는 우리나라 지하철처럼 양쪽에 마주 앉는 곳이 있고, 가운데 두 명 정도가 설 공간이 있다. 사람이 많을 때는 가방을 앞으로 맨다던지, 내릴 곳 한 정거장 전에 앞 쪽으로 이동한다던지 하는 규칙이 있는 것 같다. 역에서 사람들이 내릴 때마다 혼란스럽지 않고 모두가 자기의 다음 위치를 알고 있는 듯 움직인다. 나는 그런 규칙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니까 적당히 자리를 띄어 앉는다. 폭이 좁아 마주 앉은 사람은 조금 과장해서 쎄쎄쎄를 할 수 있어 보인다. 시선이 자주 마주쳐서 민망하기도 하다. 다행히 일본도 한국과 다르지 않아 모두 스마트폰을 하고 있다.

구마모토 성은 2016년의 지진으로 많은 곳이 무너져내리고 현재도 보수 공사 중이다. 성벽이나 천수, 건물 등이 무너져 내렸는데 이를 모두 보수하고 개관 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성 입구 위로 거대한 공중 통로를 설치하고 관광객들은 그 위로 돌아다니게 하였다. 추가 붕괴할 수 있는 위험한 곳에 관광객의 접근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인 것 같지만 굽이굽이 걷지 않아도 되고 성벽을 위쪽에서 조망하기에는 이쪽이 더 나은 듯 했다. 무너진 곳은 임시로 콘크리트를 부어 추가 붕괴를 막아 놓았는데, 아마 하나 씩 복원해 나가지 않을까 싶고 복원 공사를 위한 기부를 받고 있었다. 위 사진은 옛 벽의 경사가 너무 완만하여, 급경사로 만들기 위한 추가 공사를 한 흔적이라고 한다.

세계의 오래된 랜드마크 건축물을 보면 그 당시 사회 전체가 어떤 것에 매진 했는지 상상이 된다. 피렌체의 두모오 성당이나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에 들어간 돈으로 적어도 수년간의 빈민을 구휼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시 사람들은 대신 위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선택을 했다. 여기 동원된 수만명의 사람들은 단순히 누가 시켜서, 혹은 돈을 받기 위해 이러한 건축물을 만든 것이 아닌 것이다. 그 들은 무엇에 두려움을 느끼고 이를 극복하여 현생 혹은 내세를 살기 위해, 더 잘 살기 위해 돌을 깎고 쌓았던 것 같다. 구마모토 성벽을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 성을 쌓은 것은 무사 계급의 사무라이들이 아니라 그들이 부리고 있던 양민들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돌을 깎고 나르고 쌓았던 것은 본인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다. 무사 계급의 유지나 그들에 대한 복속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 시대는 전쟁이 잦고, 패배의 댓가는 잔혹 했을 것이다.

구마모토 성의 내부는 옛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콘크리트 건물이다. 두번이나 방문했던 오사카성과 마찬가지로 겉모습은 그럴 싸 했지만 내부는 박물관 같은 모습이다. 스마트폰 앱을 다운 받으면 한국어 안내도 지원해주고 있었다. 안내 내용은 영어나 일본어에 비하면 훨씬 부실 했다. 구마모토까지 방문하는 한국인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기에 당연한 일이겠다. 내가 방문한 성 중에는 히메지 성과 마츠모토 성이 내부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성을 관리하는 일도 꽤나 힘든 일인지 기둥을 해체했다 다시 새 것으로 교체하고 복원하는 대공사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이 성을 축조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선봉에 서서 한국을 침략했고 울산왜성 등 한국에서도 성을 쌓았다. 이때 얻었던 여러 차례의 축조 경험을 집약한 구마모토 성은 일본 성 중에서도 최고의 기술과 견고함을 자랑한다고 한다. 실제 메이지 유신 때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당시 최신의 무기로도 함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덧붙여 정유재란에서 패배 후 퇴각할 때 울산에서 많은 한국인 포로들을 끌고 갔는데, 그들이 구마모토에 정착한 울산정(울산마치)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도 역사적인 왜인촌이 있을까? 동부이촌동이 그것일까?

구마모토 성을 둘러보고 노면전차에 몸을 실어 다시 역으로 향했다. 밤에 잠들때 마다 욱신거리는 다리 때문에 내일은 더 편한 일정으로 다녀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아침에 다리의 통증이 없어지면 생각이 달라진다. 오늘도 히로시마로 가서 걸어다녀야 할 일정이 잔뜩이다. 시간이 없고 마음이 급하다. 구마모토 역 안에 있는 요시노야에서 간단하게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10시와 11시 사이, 식사를 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다. 명품 가방을 든 날씬하고 세련된 수트 옷차림의 중년 아주머니와 둘이 식사를 했다. 기업의 임원처럼 보이는 이런 분도 요시노야에서 토핑이 없는 규동을 먹는다.

구마모토 역 대합실에서 잠시 대기했다. 온통 할머니, 할아버지 뿐이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 어딜 간 걸까? 50세 이상 이용가능한 대합실과 50세 이하 용 대합실이 나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1분도 늦지 않게 도착한 신칸센에 올라 히로시마까지 달려간다. 남쪽으로 내려온 길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하로 뚫고 혼슈 섬으로 진입한다. 신칸센을 타면 상상했던 물리적 거리와 이를 이동하는데 드는 시간 개념에 혼란이 생긴다. 서울-부산 간 거리는 되어 보인다. 사악한 가격이지만 약 한시간 40분이면 히로시마에 닿을 수 있다.

히로시마에 내리면 규슈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규슈는 동양인 관광객, 특히 한국과 중국인이 대다수였다면, 히로시마나 오사카, 도쿄는 서양 관광객의 수가 크게 늘어난다. 신칸센 1등석 그린샤의 요금은 일반적인 직장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싸다. 기본적인 신칸센 요금이 우리나라의 KTX보다 두 배 정도 비싸다고 느끼는데, 여기서 1등석은 30% 정도는 더 내야 한다. 오늘 아침 달려온 구마모토-히로시마 구간도 15만원은 족히 든다. 신칸엔은 사실상 비행기와 경쟁한다. 따라서 신칸센 1등석은 기업 고위직이나 대표, 돈에 구애 받지 않고 업무를 위해 탄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보인다. 나 같은 배낭에 반바지, 샌들 차림의 여행객은 거의 보지 못했는데 히로시마 구간 부터는 가족 동반의 서양 여행객이 급격히 늘어났다. 아마 모두들 JR패스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리라.

숙소는 Guesthouse akicafe inn라는 삼만원 남짓의 도미토리 룸을 예약했다. 신칸센은 그린샤를 타지만, 숙소는 최하급이다. 시설이 좋지 않고 비싸더라도 많이 걸을 수가 없기에 최대한 역 근처의 숙소를 잡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떠나야했기 때문에 역에서 먼 숙소를 잡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오로지 위치만 보고 선택한 숙소였다. 하지만, 이번 여행 최악의 숙소가 되고 말았다. 아직 체크인은 이른 시간이라 배낭을 숙소에 두고 서둘러 히로시마 평화기념 박물관으로 향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곳이라 역에서 가는 버스들이 잘 되어 있고 미리 만들어 놓은 파스모 패스를 편리하게 이용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만난 곳이다. 특히 절반 이상은 서양 사람인데,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을 찾아오고 있다. 누구는 승리를 기념하려고, 누구는 단순 호기심으로 찾아 왔을 것 같다. 여기서 모두들 원자폭탄의 피해를 간접적으로 나마 느껴보면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 들은 어린이 원폭 피해자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며 눈물 짓고는 한다. 폭탄은 군인만 골라서 살해하지 않는다.

나가사키보다 규모는 훨씬 크고 둘러볼 전시품도 많았지만, 나가사키 전시관보다 낫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아마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고 전시를 기획한 사람의 메시지보다는 더 직접적인 참상을 적나라하게 느끼고 싶다면 나가사키 쪽을 방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주로 한국인은 어떤 피해를 입었고 왜 피해를 입게 되었는지가 더 궁금하여 관련 전시물이 있다면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전시관에서 유명한 원폭 돔으로 가는길의 왼쪽에는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도 있으니 한번 들러보는 것도 좋겠다. 위령비 앞에 생수를 놓고 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피폭시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는 후일담을 듣고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게 해주기 위한 기원인 것 같다.

애매한 시간에 먹은 요시노야 김치 규동 밖에 먹은 것이 없어서, 히로시마풍의 오코노미야키를 먹어보고자 했다. 멀리 걸어갈 수 없어 근처의 나가타야 라는 곳을 검색해서 들어간다. 의외로 혼자 온 사람은 없고 일본인도 별로 없어 보인다. 혼자 왔다고 말하니 카운터 석으로 안내해주었다. 철판에서 직접 만들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생각보다 만드는 시간이 꽤 걸리고 다 만들어 지면 이제 먹어도 된다고 말해준다. 하루종일 배고픈채 돌아다녀서 맥주 한잔과 먹는 오코노미야키는 정말 맛있었다. 흔히 한국이나 오사카에서 먹는 오코노미야키는 양배추와 밀가루 반죽? 등으로 베이스를 만드는데 여기는 우동이나 소바 중 하나를 선택해서 먹을 수 있다. 혼자 먹기에는 정말 많아서 여자 셋이 온 분이면 두 개만 시켜도 되지 않을까 싶다.

영어로 주문하면 내가 일본어를 전혀 못한다고 생각하고 직원끼리 방심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직급이 낮은 직원이 완성된 오코노미야키를 건네어 주면서 피자를 떠 먹을 수 있는 것 같은 조그만 철제 스푼?을 주는 것을 깜빡했다. 나는 그런 것을 주는 줄도 모르고, 공용 철판에서 젓가락으로 집어 먹고 있었더니, 상급자가 내가 들리도록 ‘저사람 저러고 먹고 있잖아.’ 라고 질책하니 직원이 나에게 스푼을 가져다 주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이른 저녁 혹은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원폭돔을 보러 간다. 원폭이 폭발한 곳은 원폭돔에서 수백미터 떨어진 곳 상공이라고 한다. 따라서 주면의 목조 건물들은 즉시 폭풍에 의해 다 무너졌지만 당시 유일한 석조 건물 (상공회의소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었던 이 건물의 골조는 가까스로 살아 남았다. 이후 이를 보존해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보존하기로 결정한 이후로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많은 보수를 했다. 덕분에 모든 것을 쓸어버린 히로시마 원폭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이 되었다. 공중에서 이놀라 게이가 유명하다면, 지상에서는 원폭돔이다.

원폭 돔에서 다시 히로시마 성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오전에 구마모토 성을 본지라 들어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다다르니 이미 관람시간이 지나 있었다. 나처럼 바삐 걸어온 다른 관광객들도 들어가지 못해 발을 돌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내부 관람은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걸어왔지만 그래도 코 앞에서 입장 불가라고 통보 받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히로시마 성은 전쟁 후에도 미군이 임시로 주둔 했던 흔적들이 있다. 배낭 여행자만 둘러볼 수 있는 성 구석구석을 둘러보고는 숙소로 향했다.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했고, 하교하는 고등학생과 직장인들이 많이 보였다. 숙소 까지는 이 길을 3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거리다. 걸어갈 체력이 남았으니 걸어가기로 한다.

생각보다 기진맥진해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더 이상 무엇을 먹을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으므로 오는 길에 이제는 익숙하게 생수 한 병과 빵 하나를 샀다. 영어에 능숙한 아가씨가 체크인을 해주었다. 배게와 침대 시트를 나한테 준다. 내가 직접 씌워서 쓰라고 했다. 잠시 나와서 방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굳이 왜 직접 보여주려하는지 의아했지만 곧 이해가 되었다.

도미토리 룸은 옆 건물 3층에 있다. 체크인을 할 수 있는 까페 건물을 나와 옆 건물로 아가씨를 따라 들어갔다. 3층이니 엘레베이터는 없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집이 무겁거나 크다면 쉽지 않겠다. 올라가서 발견한 좁은 방에는 어찌나 많은 침대를 넣었는지, 두 사람이 마주보고 지날 공간이 없다. 그 정도가 아니라 왼쪽 2층 침대로 올라가는 사다리와 오른쪽 2층 침대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나란히 마주볼 공간이 없어 서로 교차하며 사다리를 설치해놨다. 내가 배정 받은 가장 안쪽 침대의 2층으로 가기 위해 온전히 바닥을 걸어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사다리를 장애물 넘듯이 넘어서 건너가야 했다. 걸어가는 도중에도 퀴퀴한 땀 냄새가 빠지지 않았다. 내 침대 옆에 이 방의 유일한 창문이 있고 조그만 선풍기를 달아서 환기를 시키고 있었다. 그래, 이 것이 내가 원한 최저 수준의 여행이다.

히로시마는 외국인 배낭여행객이 많아 이른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커튼이 처진 침대가 많았다. (사람이 쓰고 있다는 뜻) 나는 내일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미리 짐을 싸고, 씻고, 그리고 방에 더 땀 냄새가 가득차기 전에 잠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씻고, 빵을 하나 먹고 내일 출발해야 하는 기차 시간표를 확인하고, 입을 옷을 발 아래, 아니 옆에 개어 놓고 (워낙 침대가 작아 내가 누우면 발이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다) 잠들었다. 오늘은 지옥불 위에서도 잠들 수 있을 지경이다.

12일 간의 일본 기차 여행 – 구마모토, 아소산

4일차 여행, 이제 규슈의 남쪽으로 내려간다. 짧은 일정 때문에 규슈 일주 같은 계획은 다음으로 미루고 북규슈 레일패스로 갈 수 있는 가장 남쪽 도시인 구마모토까지만 가보기로 한다. 구마모토에서는 구마모토 성과 스이젠지만 구경하기로 하고, 오전에는 아소산을 일정에 넣었다. 하카타역에서 구마모토행 신칸센을 타는 것으로 아침 일정을 시작한다. 아침 8시가 안되어 숙소를 나왔다. 조용한 게스트하우스는 비수기라 그런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샤워와 쓰레기 분리수거를 할 수 있었다.

아소산은 아직 활발하게 활동하는 활화산으로 활화산이 없는 한국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광경을 선사한다. 하지만 후쿠오카나 구마모토 관광객들에게 방문은 꽤나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후쿠오카에서 출발한다면 후쿠오카에서 신칸센을 타고 구마모토까지 이동 (50분) 후 아소역까지 기차를 타고 간다. (1시간 반) 중간의 히고-오즈 역 등에서 갈아타야 할 수 있다. 아소역에서는 아소산조 터미널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하고 (35분), 마지막으로 아소 산조 터미널에서 화구 근처까지 운행하는 셔틀을 타야한다. (5분) 걸어갈 수도 있다. 대부분의 서양인은 걸어가고, 대부분의 일본인과 한국인 그리고 중국인은 셔틀버스를 타는 것이 흥미롭다.

후쿠오카에서 쉬지않고 달려가도 3시간은 걸린다.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에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하루를 온전히 써야 한다. 배차가 넉넉하지 못해 기차 시간표, 버스 시간표 등을 잘 맞추지 않으면 중간에 30분 기다리는 일은 흔하니 꼭 유의해야 한다. 구글맵 등으로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여 전날 계획을 세워 움직이는 것이 좋다.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팁을 주자면 아소역의 코인락커보다 아소 산조 터미널의 코인락커가 훨씬 저렴하니, 짐을 들고 버스를 타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짐을 들고 버스를 타는 것도 좋겠다.

신칸센은, 이미 두 번을 타 보았다고 그리 흥분되는 일은 아니었다. 어제는 새로 개통한 나가사키행 카모메를 탔고, 오늘은 개통한지 20년 된 구형 규슈 신칸센을 탄다. 확실히 열차가 오래되었다. 그래도 그 속도는 여전하여 구마모토까지 수 많은 마을을 배경으로 돌진한다. 아마 대구에서 부산 정도 거리가 될 것이다. 구마모토 역에서 빨간색 열차로 갈아탔다. 갈아 탄 열차는 아소역 직통 운행하는 열차였다. 좋은 계절, 여름방학 동안에는 관광열차가 다니는 구간이라고 한다. 관광열차는 아소보이?라는 이름으로 오이타까지 규슈를 횡단한다고 한다.

갈아탄 구형 열차도 지정석 권을 예매 했는데 주위에 중국 관광객이 많았다. 소수의 서양 관광객(의외로 혼자 오는 서양 관광객이 많다), 더 소수의 한국 관광객, 다수의 중국 관광객, 통근이나 등학교 목적으로 타는 일본 사람들이 내가 탄 열차의 한 객차에 모여타고 출발했다. 신칸센을 타다 느릿느릿 마을을 휘감는 열차를 타고 달린다. 빨리 달릴 때는 눈치 채지 못했던 자동차, 가로수, 꽃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서두를 것 외에는 빨리 가는 열차를 탈 이유가 없다.

기차는 꾸준히 고도를 높여서 고원의 산 지형으로 들어간다. 몇 년전의 구마모토 지진의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다. 붕괴한 산의 사면, 끊어진 다리 등도 지켜볼 수 있게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기존 다리를 철거하는 것도 돈일 테니, 끊어진 채로 관광 할 수 있도록 남겨 놓고 옆에 새로 다리를 하나 만들었다. 오즈-히고 역을 지나서 호히선으로 접어 들어서는 스위치 백 형태로 운전한다. 정차 후 차장이 기차를 가로질러 뒤 쪽의 운전석으로 걸어가 열차를 후진 시키고, 다시 어느 정도 가서는 다시 앞 쪽의 운전석으로 걸어가 열차를 전진시켜 몰고 간다. 예전에 우리나라 영동선에서도 이와 같은 열차를 한번 타 보았는데, 이제 우리나라는 선로 평탄화 작업이나 터널 개통으로 없어진듯 하다.

이윽고 아소 분지로 진입하는데, 험한 산지 지형을 뚫고 올라오니 또 다시 넓게 펼쳐진 평야가 나타났다. 오른쪽에는 아소산이 나타난다. 이제 다 왔다. 아소역에 열차는 멈춰서고 사람들은 줄지어 아소산으로 가는 버스 티켓을 사러 오른쪽의 버스 터미널로 이동한다. 티켓은 자동판매기를 통해서 사도록 되어 있는데,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은 사용이 서툴기 이를데 없다. 점원이 한 두명이라도 나와서 도와주면 좋을 텐데. 내 앞에 줄 선 두 명의 중국인 아주머니 들은 한참을 돈을 넣었다 뺏다 하면서 기계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절대 이런 상황에 나서지 않는 난데 버스를 놓칠까봐 걱정되어 내가 돈을 집어 들고 구매를 도와주었다.

아소산은 바이커들의 성지이기도 하다. 굽이 굽이 와인딩 로드가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고, 굳이 여기까지 차를 몰고 올라오는 사람도 많이 없어 보기에도 바이크에 애정을 많이 가지신 분들이 떼를 지어 라이딩을 즐기고 있었다. 듣기로는 한국에서도 배에 바이크를 실어 규슈 곳곳을 누빈다고도 한다. 한국에 더 이상 갈데가 없다면 훨씬 넓은 땅을 가진 일본에서 타보는 것도 재미있는 방법일 것 같다. 듣기로는 차를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여행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아소산정상의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면 분화구까지 가는 버스가 운행한다. 시간이 없다면 타고 올라가는 것도 방법이고, 시간이 많고 충분히 걸을 수 있다면 굳이 탈 필요는 없어보인다. 대부분 타고 올라가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인양 휩쓸리기 좋다. 나는 갈때만 타고, 내려올때는 걸어서 내려왔다. 5분의 짧은 탑승을 마치고 내리면 유황 냄새가 고약하다. 하와이의 볼케이노 국립공원에서의 그 냄새지만 이쪽이 훨씬 광범위하고 농도가 짙다. 너무 분출이 심해지면 근처의 접근을 차단한다고 한다. 건강에 좋을리 없어 보인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유투브에 아소산을 검색해 보았는데, 갑작스러운 분출에 재빠르게 도망치는 사람들의 1인칭 시점 동영상들이 흥미로웠다.

오래 있을 시간이 없다. 다음 내려가는 버스를 타야 열차 시간을 맞추고 구마모토로 돌아갈 수 있어 3시간을 달려 보러온 정상의 풍경을 10분만 둘러볼 수 밖에 없었다. 풍경을 충분히 보지 못해 아쉽지만 아소산만의 고유한 풍경이나 느낌이 딱히 보이지 않아 아쉽지는 않다. 20분 정도 걸어내려가는 길은 시간 조절을 하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일본의 기차, 버스 시간표는 정확해서 절대 먼저 출발하거나 늦게 출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멋진 풍경을 보여주는 포토스팟이 있었는데 역시나 여기도 혼자 카메라를 세워놓고 인스타그램 릴스를 열심히 찍는 분이 있었다.

돌아오는 기차를 타니 아침부터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해 몹시 배가 고팠다. 돌아가는 길에 구마모토의 맛집을 찾아보니 이 쪽은 돼지고기가 유명한 것 같아, 돈까스 정식을 먹기로 했다. 마침 돌아가는 기차역, 미나미 구마모토 근처에 유명 체인 돈까스 가게(카츠레츠테이)의 분점이 있어 잠시 먹고 다음 기차를 타고 가기로 한다. 무더위에 배낭을 매고 헉헉 거리며 걸어갔다. 평일 점심, 거의 세시가 다 되어 도착한 식당은 다행히 기다림 없이 먹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평생 먹은 돈까스 중 여기가 최고다. (사진은 너무 맛없게 찍혔네..) 돈까스의 풍미도 대단한데, 밥에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렇게 맛있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쌀의 품질에 민감한 편인데 한국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품종의 쌀인 것 같다. 미식을 즐기지 않는 편인데 이런 맛은 음식의 재료에서 나오는지 주방장의 솜씨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가족 또는 누군가와 구마모토를 방문한다면, 여기는 꼭 다시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평일 점심에는 그날의 정식을 1300~1600엔 정도로 싸게 먹을 수 있는데 외국인에게 주는 영어 메뉴에는 적혀있지 않다. 입구에 메뉴가 붙어있기는 하지만 일본어로만 적혀 있으므로 만약 평일 점심에 방문한다면 꼭 런치 정식 메뉴를 달라고 해야 한다. (https://maps.app.goo.gl/ToHZE59yFupHYamEA)

다시 두 정거장을 뒤로 돌아가 스이젠지 역에서 스이젠지 조주엔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신-스이젠지 역보다 스이젠지 역이 가까워보여 여기서 내려가기로 결정 했는데, 이 역은 코인락커가 공사 중이었다. 허리와 다리가 조금 쉬어야 된다고 소리를 지르지만, 어쩔 수 없이 배낭을 또 둘러매고 15분 여를 걸어간다. 길거리는 더워서 그런지 아무도 없고, 빈 신호등을 건너는 건 나 뿐이었다. 다행히 스이젠지에 입장하고 나니 무료 코인락커가 있었다. 참고로 일본인에게는 코인록커라고 해야 잘 알아듣는다.

일본식 정원은 교토에서 히메지에서 나라에서 도쿄의 이곳저곳에서 많이 둘러보았다. 흥미로운 정원들도 있었지만 (교토 은각사) 내게는 대체로 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소우주를 표현하는 정원의 각 나라별 양식은 어디에나 있었을 텐데, 우리나라는 보전되지 못하고 많이 사라져버린 것 같아 아쉽다. 최대한 자연을 손 보지 않고 정자하나를 세워 풍경을 즐기는 것이 우리 정서에는 더 맞았을 수도 있겠다. 한바퀴 돌다보니 인적이 드문 곳에서 어떤 중국어를 쓰는 아이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정원의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 미끄럼을 타고 어머니가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후쿠오카는 한국사람들이 많았는데, 여기는 중국 단체 관광객이 많이 보였다. 사진에 미끄럼의 흔적이 보인다.

사람이 없어 둘러보기 좋았다. 한달 전 교토에서 보았던 후시이 이나리 신사의 분점?이 안에 위치해 있다. 잠시 명당 자리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며 물과 풀, 바람과 시간을 느껴봤다. 5분이나 지났을까 오늘의 관람이 종료되었다며 모두 퇴장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아소산에서 부지런히 걸어내려 왔기에, 돈까스를 허겁지겁 먹었기에,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역에서 걸어 왔기에 이 5분이나마 주어졌다. 내가 원했던 극한의 배낭 여행이다. 그런데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오늘은 구마모토 역 앞의 캡슐 호텔(Hotel the Gate Kumamoto)을 예약했다. 로비나 시설은 좋았다. 입고 잘 수 있는 가운도 주고, 코인세탁실도 붙어 있었다. 힘들었기에 편히 쉴 수 있게 큰 마음 먹고 상당히 고가 (4만원)의 독실을 예약했다. 하지만 좋지 않았던 것은 모든 방의 천정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 즉, 실내 체육관에 칸막이를 적당히 치고 도미토리를 만들어 놓은 꼴이다. 옆 방의 누가 전화 통화를 시작했는데 마치 침대에 같이 누워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카운터에서 귀마개를 나누어주니 꼭 챙기는 것이 좋겠다. 구마모토에 출장 온 비즈니스맨이 아침 일찍 신칸센을 타기 위한 호텔 느낌이다.

후쿠오카에서 아소산 정상으로, 아소산 정상에서 다시 스이젠지로, 구마모토 역으로 이동거리가 긴 하루였다. 샤워를 하고 빨래를 돌렸다. 저녁을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구마모토 역까지 걸어가 모스버거를 하나 사먹고 들어왔다. 아, 피곤하지 않았다면 정말 먹지 않았을 것이다. 모스버거를 버거라고 부르면 안될 것 같다. 2층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예측 기계

최근에는 뇌의 작동 원리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있다. 인공 신경망의 연구자로서 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뇌 활동과 컴퓨터 속에서 시뮬레이션 되는 인공 신경망의 활동이 유사하다는 것에 놀랄 때가 많다. 학습과 예측, 그리고 결과 되먹임이 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이며, 이는 인공 신경망 구조에서도 동일하다. 최근 나의 몇 가지 발견 중 인상 깊은 것을 기록한다.

놀람은 예측의 실패이다. 예측의 실패는 인공 신경망에서는 Loss 가 높다고 표현된다. 뇌는 예측(Prediction) 기계이다. 가능하면 많은 행동과 추론을 거의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예측에 의존한다. 뇌는 예측을 신속하게 하도록 진화했다. 예측은 사전 확률과 수집 된 데이터 샘플로 이루어진다. 여기서의 데이터 샘플이란 우리의 감각 기관에서 들어오는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이다. 데이터 샘플이 사전 확률 분포, 즉 예측에서 벗어날 경우 뇌는 끊임없이 사전 확률을 업데이트 한다. 사전 확률을 얼마나 업데이트 할지, 어느 주기로 업데이트 할지 등이 사람마다 다르다.

전례 없던 경험을 하면 새롭게 예측을 해야 한다. 모든 감각 기관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최대한 받아들이고, 새롭게 분석을 하며 어떤 예측 모델을 써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내 행동이 어떤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지 세심히 관찰해야 한다. 이 경우 뇌는 신체를 ‘긴장’ 시킨다. 감각 기관을 예민하게 하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주로 수행하던 언어 처리 기능을 약화 시킨다. 사람이 많은 군중 앞에서 드문 발표 기회를 얻었을 때의 신체 반응을 생각해보라.

예측이 실패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어야 한다. 늘 같은 것을 먹고, 같은 행동을 한다면 예측이 실패할 일이 별로 없다. 이 경우 점점 더 예측 의존성이 높아지며 우리가 완고하다, 고집이 세다라고 부르는 성격 특징이 나타난다. 세상을 몇 가지 확신으로 설명하려 시도 한다. 나이가 들면 들 수록 이러한 현상이 더 강해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뇌는 최소한의 에너지만 쓰게 된다. 뇌의 기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결국 확신 몇 가지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반면 어린이는 예측이나 확신에 많이 의존하지 않으며 고도로 민감한 감각에 의존한다. 자극과 수용된 감각이 훨씬 많으므로 뇌에서는 지속적인 사전 확률 수정이 일어나며 세계에 대한 새로운 상(Model)이 형성된다. 인공 신경망에서 Learning Rate 라고 불리는 수치가 굉장히 높다. 그들에게는 예측의 정확도를 높이는 것 보다는 정확도는 낮지만 예측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기능을 구성하는 것이 훨씬 시급한 일이다. 바스락 거리는 네 발 달린 커다란 동물을 근처에서 느꼈을 때, 사자와 호랑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자나 호랑이 비슷한 것이라도 나타나면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을 먼저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예측의 정확도는 객관적인 세상의 사실과 부합하느냐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하면 나의 생존에 유리하도록 판단하는 것이 예측의 목적이다. (Objective Function) 이 과정에서 객관적 현실과의 괴리가 발생하기도 하며, 감각을 다르게 왜곡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뇌는 세상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유명한 ‘사람은 그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라는 말을 다시 해석해보면 ‘사람은 자신의 뇌에 생성된 확신에 부합하는 형태로 감각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로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에너지의 30% 이상을 뇌의 활동에 쓴다. 이러한 뇌의 목적이 진리 탐구나,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있다고 생각하면 순진한 것이다. 뇌도 마찬가지로 개체의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뇌는 적응적인 예측 기계이다. 뇌가 기계와 다른 점은 끊임 없이 수정되는 예측 모델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뇌는 세상을 보는 눈이 없고, 만질 수 있는 감각이 없다. 뇌는 오직 생리학적인 신호로 외부와 소통한다. 생명이 탄생한 이래 극도로 제한적인 정보만을 취하며 살아 남았다. 예측이 틀렸을 때의 유연한 업데이트, 모든 자극을 취합해 순식간에 결론을 내리는 고도의 병렬 프로세싱, 감각과 예측 사이의 가중치 벨런싱, 언어와 시각, 청각 모두에 예민한 멀티모달리티 등은 인간의 뇌, 인공 신경망 모델 양쪽을 서술하는 말이다.

따라서 인공 신경망에서도 어느 순간 우리가 인격의 특징이라고 여기는 의지와 감정이 창발 되리라. 이와 함께 인간 사회도 그 생존을 위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다.

12일 간의 일본 기차 여행 – 다자이후, 규슈 국립 박물관

나는 박물관을 좋아한다. 여행을 가면 여행지의 대표 박물관들은 꼭 방문하려고 노력한다. 방문지를 돌아보기 전에 박물관을 들러 도시나 지역의 이해를 넓히고 싶다. 우리나라 박물관 중에는 진주 국립박물관이나 목포 해양 박물관 처럼 많은 내용을 소개하기 보다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박물관이 마음에 들었다.

같이 여행하는 가족이 있거나, 시간이 넉넉하지 못한 경우 원하는 박물관을 가보지 못한다. 또는 아주 짧은 시간만 방문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번 여행은 혼자 떠난 여행으로 원하는 박물관을 원하는 시간만큼 볼 수 있었다. 다리가 아파서 더는 못 서 있을 정도로 둘러보았다. 일본에는 총 4개의 국립 박물관이 있다. 도쿄, 교토, 나라, 규슈에 각각 하나 씩 있다. 나는 교토를 제외하고 나머지 박물관을 가보았고 이 번 여행에서 도쿄와 규슈에 있는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교토 국립박물관도 방문했지만 도저히 관람 시간이 나지 않아 그냥 지나쳤다)

동선 상으로는 후쿠오카 체류 중에 규슈 국립 박물관을 들러 구경한 후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내 경우 마침 방문 예정일이 박물관 휴관일이라 동선이 길어짐에도 불구하고 나가사키에 들렀다 다시 올라오게 되었다. 규슈 레일 패스를 가지고 있어 교통비 걱정이 없으므로 가능한 동선이다. 참고로 규슈 국립 박물관의 접근성은 매우 떨어진다. 다자이후의 구석진 곳에 있는데 후쿠오카에서는 니시테츠 철도를 타고 니시테츠 후츠카이치 역에서 환승 한 후 다자이후 행 관광 기차를 타면 된다.

아무튼 이 복잡한 동선의 일정을 소화하고자 나가사키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지난 번에 못한 나가사키 이야기를 하자. 나가사키는 일본에 가톨릭이 처음 전파된 곳이다. 하비에르 신부에 의해 전해졌다고 하는 일본의 가톨릭은 1600년대에 와서는 이곳 규슈 지방에 뿌리를 내렸다. 임진왜란의 선봉장 중 한명으로 한성에 가장 먼저 진입한 고니시 유키나가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의 하나로, 한국에서 전쟁 중인 임진왜란 중에도 신부를 일본에서 데려와 미사를 드렸다.

게스트하우스 바로 옆에 일본 최초의 순교 성인 26인의 처형터가 위치해 있었다. 몇 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바로 이곳에서 연설 했다고 하고, 그 전임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도 방문했었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종교가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와 같은 인간 본연의 질문은 일생을 거쳐 탐구해야 하는 대상이고, 종교인들은 나름대로 해답을 구한 것이라 생각한다.

주위를 조금 둘러보고 나가사키역으로 가서 카모메 신칸센을 탄다. 여행 내내 미리미리 기차 시간표를 알아서 역에 조금 일찍 나가는 것이 버릇으로 했다. 역까지 얼마나 걸릴지 가늠이 안되기도 하고,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신칸센 전체 여행에서 예정보다 열차는 빠르게 도착한적도 늦게 도착한 적도 없다, 따라서 빠르게 출발한 적도, 늦게 출발한적도 없다. 그러다보니 항상 역에서 10~15분을 기다리는 일이 많았다. 오래된 역사들은 딱히 대합실이 넉넉한 편이 아니다보니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벽에 기대어 쉬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나가사키역은 신축 역사라 그런지 넉넉한 대기실이 있어 잠시 배낭을 바닥에 놓고 쉴 수 있었다.

다케오온센역에서 갈아타야 하는데 어제 탓던 급행 열차가 아니라 각 역마다 조금 더 자주 서는 열차를 타고 간다. 후츠카이치역에서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열차 시스템은 참 복잡하기 그지 없다. 보통-쾌속-특급-신칸센으로 이어지는 열차의 등급과, 자유석-지정석-일반석-그린-그랑클래스로 이루어지는 좌석의 등급이 각각 존재한다. 게다가 요금도 열차의 등급과 좌석의 등급을 별개로 정산하니 복잡함이 배가 된다. 보통-쾌속-특급은 같은 노선을 달리돼 열차의 종류가 다르기도 하고, 특급으로 갈 수록 통상 서는 역이 점점 줄어든다. 신칸센도 마찬가지로 노조리, 히카리 등으로 정차역에 따라 구분되는데, 이건 지역 별로 명칭이 다 다르다. 이를 일일히 설명하다가는 포스팅 하나를 온전히 해야하므로 여기서 넘어가도록 하자.

JR후츠카이치역에 도착해 코인라커에 짐을 넣어 놓는다. 여기 JR후츠카이치역에서 20분 정도를 걸으면 니시테츠 후츠카이치역에 도착한다. JR 후츠카이치역은 한적한 동네로 아침 시간이라 한가한 것인지, 하루 종일 한가한 동네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상권이 전혀 없는 것으로 봐서 하루 종일 번잡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반면 니시테츠 후츠카이치역과 거기서 이어지는 다자이후역은 관광객으로 북적북적했다. 어디든 관광지, 그 중에서도 메인 스트리트만 북적 거린다. 그 사람이 많다는 교토 산넨자카나, 나라의 사슴공원도 두 블럭만 벗어나면 횡단보도 맞은 편에 사람을 찾기 힘들다.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다자이후역에 11시 정도에 도착했기에 늦은 아침을 먹기로 했다. 이치란을 포함해 유명한 라멘 체인이 많이 있었는데, 이치란은 기다리기도 싫고 나중에 먹을 기회가 있을 것 같아 단보라멘이라는 곳에서 먹기로 했다. 다행히 오픈 시간 즈음이라 기다림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익숙하게 자판기에서 티켓을 뽑아내고, 혼자 앉기 적당한 카운터 석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뒤꿈치 뒤에 있는 플라스틱 가방에 담는다. 어디든 혼자 먹는 사람들은 위해 최적화된 시스템은 비슷하다. 나가사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한국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왼쪽에도 한국 사람, 오른쪽에도 한국사람이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찍지 않으면 먹는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식당을 나서니 비가 내렸다. 우산을 가지고 올껄 하는 후회가 들었다. 다행히 워낙 상점이 많아 가게 앞에 있는 처마 밑을 따라가니 거의 비를 맞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침 비도 오고, 오늘 방문의 목적인 규슈 국립 박물관을 먼저 가보기로 했다. 박물관은 다자이후 동쪽의 야트막한 산에 위치해있다. 다자이후 오른쪽에 매우 긴 길이의 에스컬레이터와 무빙워크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다자이후만을 살펴보고 이 깊은 곳 까지는 오지 않는다.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래도 될 것 같다.

관람객보다 직원이 더 많아보이는 박물관에 들어섰다. 넓고, 최신식의 공간이었다. 이걸 짓는데는 틀림없이 지역 균형 발전에 기여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리라. 모든 유물을 설명하긴 어렵지만 몇 가지 느낀바를 적어보자면, 일본은 가능하면 오래전에 정착민과 농경문화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한다. 이는 도래 문화보다는 자생적으로 발생한 나름대로의 문명이 중요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리라. 아오모리의 조몬시대 유적이나, 시라카와고 같은 곳을 강조하는 것도 일본 고유의 것을 드러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일본 도자기 기술의 원천은 규슈지방이고, 이는한국의 기술자들로부터 전수된 기술 임이 틀림없다. 규슈 지방의 다양한 곳에서 번성한 채색 도자기 기술은 임진왜란 이후 시기 건너간 도공들이 발전 시켰음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도자기에 관한 특별 전시도 자주 있었고 친숙함을 느꼈다.

또 일본은 적어도 근 500년 동안은 무력과 전쟁으로 점철된 군사 대국이다. 누구를 숭상하는지, 어떤 유물이 전시관의 처음에 위치 하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끊임없는 전쟁과 전투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지, 그 생존 전략이 현대 일본의 문화 속에도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잔인함에 대한 면역이나 낮은 신분 상승 욕구등이 그것이라 짐작한다.

규슈지방 위주의 전시로 국립박물관이라 일본 전체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기에 한국 또는 중국과의 연결 고리를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출정을 위한 준비 과정이나 침략 주역들의 그 과정에서의 친필 메시지 등은 흥미로운 사료로 보인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한국의 정벌을 준비하고, 그 결과 많은 군사와 자원을 일거에 보급할 수 있었다. 대비가 전혀 없던 한국은 그야말로 속수 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고 초기 전투에서 거의 궤멸에 가까운 상황에 처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임진왜란 직전 해에는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다녀갔다. 하지만 엇갈리는 현황 보고 속에 전쟁을 대비하지 않는 쪽을 택한 조선의 운명은 명에 의지하지 않고는 국가를 존속 시킬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이런 역사는 500년도 지나지 않아 똑같이 반복된다.

다자이후 덴만구로 다시 내려왔다. 가족이나 커플 단위 관광객도 참 많고, 군/면 단위의 향촌 부락 경로당 정도에서 단체로 놀러오신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많이 보였다. 워낙 한국과 가깝기도 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해외여행의 기분을 느껴볼 수도 있어 인기가 많은 것 같다. 이 곳은 수백년이 넘는 거목과 연꽃이 화려하게 꾸며진 신사였다. 가볍게 풍경을 즐기고 뻐근한 다리를 쉬게하며 앉아있기도 했다. 아무리 쉬어도 거의 네 시간을 박물관을 둘러보니 더는 걸어다니기 힘들었다. 다시 기차를 타고 후쿠오카로 가기로 했다.

오늘의 숙소도 역시 게스트하우스로 지난 번 후쿠오카 게스트 하우스 근처로 잡았다. 그나마 약간은 프라이빗하게, 벙커 침대와 그 앞에 약간의 탁자, 그리고 의자, 그리고 그 앞에 전부를 가릴 수 있게 쳐진 커튼까지가 나의 공간이다. 내 침대는 1층이고, 2층 침대를 쓰는 사람은 나와 반대 방향으로 내려와 비슷한 형태의 탁자와 의자, 그리고 커튼 파티션이 있다. 그러기에 만원이 비싸다. 공용 주방이나 식사 공간이 있지만 아무도 이용하는 사람은 못봤다. 사람이 그만큼 없는 것일까?

지난 후쿠오카 일정에서 유명 관광지를 휘뚜루 둘러보았으므로 오늘 저녁은 바로 코 앞의 신사, 상점가를 둘러보고 대형마트에서 8시 이후 할인 판매에 돌입한 스시를 사서 먹기로 한다. 정가 2000엔에 반 값 할인이 들어간 12피스 정도의 스시와, 포켓몬 빵, 이토엔 녹차가 오늘의 저녁 식사다. 내 침대 앞의 탁자에서 먹기에 냄새가 안나는 메뉴를 골랐다. 원래 게스트하우스 침대 내 취식은 금지이지만, 침대 안도 아니고 이 정도는 괜찮겠지.

삼일 째 되니 확실히 피곤했다. 무거운 것을 매고 많이 걷고 너무 부실하게 먹었나 싶었다. 허리 디스크가 있는 나는 아침에 운동을 하고 금주하고 물은 충분히 사서 마셨다. 다행히 허리는 별 문제 없었지만, 점점 숙소로 들어오는 시간이 빨라졌다. 더운 봄과 여름의 한가운데 더 몸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바닥까지 떨어지는 여행을 해보자고 시작한 것 이므로 맛있는 것을 못 먹거나 택시를 못타거나, 싸구려 스폰지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은 문제가 없었으나, 몸에 문제가 생겨 여행을 중도에 포기하기는 싫었다. 건강한 채로 바닥까지 떨어져, 돌아왔을 때 모든 곳과 것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었다.

얻을 것과 잃을 것

“앞으로 얻을 것은 무엇이고 잃을 것은 무엇일까?”

40살이 넘은 지금에 와서 문득 드는 생각이다. 몇 년 전까지는 앞으로 무엇을 더 얻을 수 있을지,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하고 노력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다. 아니, 아무리 노력해도 잃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있다. 그래, 나는 확실히 내리막 길이고 앞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많은 것을 잃어갈 것이다.

예를 들면, 내 생명과 건강은 이제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점점 잃게 될 것이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지속적으로 잃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내가 아는 친척, 가족들도 그들의 소멸과 함께 관계는 끊어진다. 지금까지 내가 가진 물건들, 영원하지 않다. 몇 달 전에 큰 마음을 먹고 구입한 “Luxury Sedan”은 점점 녹이 슬고 헐거워지며 광택을 잃을 것이다.

반면에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건강과 에너지는 잃을 수 있지만, 무엇을 새로 배울 수 있다면 그건 또 나름대로 얻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요즘 빠져있는 스키 같은 것이 그렇다. 열심히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 지방을 잃지만 근육을 얻을 것이다. 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 조금 더 괜찮은 실력을 가지게 될지 모른다. 가족과의 추억은 내가 소멸하거나 치매에 걸리지 않는한 영원할 것이다.

내가 자유 의지로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는 35년의 남은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더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너무도 갑자기 잃어가는 것이 많아져 당황스러웠지만, 시간이 가면 바스러지는 모래성을 짓기는 않기로 한다. 나의 삶과 영원히 같이 할 것을 위해 시간과 돈을 쓰자. 세월의 풍파에도 바래지 않는 것을 찾아 나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