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하는 사회

내가 누군가를 정의할 때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과, 사회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내가 미루어 짐작하는)의 두 가지 시선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가 바라는 나, 사회가 바라는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어 비록 지금은 문제가 없지만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 운동을 한다면 나 자신을 위한 운동이고, 연예인과 같은 몸이 되고 싶어 운동을 한다면 이는 사회적 시선을 위한 것이다.

대부분의 행동에는 두 가지 목적이 섞여있다. 예를 들면 고가의 외제차이자 안전의 대명사 볼보의 차를 구입 한다고 했을 때, 이는 사회적 나를 위한 과시적인 소비와 나의 안전 욕구가 섞여서 내려진 결정일 것이다. 문제는 어느 것에 중심을 둘 지 인데, 제한된 시간, 제한된 재화로 할 수 있는 행위들을 선택할 때 내가 생각하는 나를 중심으로 발전 시킬 것인지 사회가 생각하는 나를 중심으로 발전 시킬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내 생각에 한국 사회는 사회에서 바라는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이 크다. 이런 인식은 언론이나 지인과의 대화에서 자주 살펴볼 수 있다. 보편적 생각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얼마전 LVMH(Moët Hennessy Louis Vuitton) 그룹의 지역 별 매출 분석 자료를 살펴보았는데 인구 수나 개인 소득 대비 한국, 중국, 일본의 매출이 타 국가 대비 월등하다. 사실 많은 명품(Luxury Goods) 브랜드의 아시아 지역 매출의 성장세는 독보적이다.

이런 사례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중요시하는 사회를 잘 보여준다. 이를 단순히 태생이 그러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종족 특성’이나 ‘허영심 가득한 한국인’으로 포장하는 것 보다 왜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원인을 생각해보았다. 문득 드는 생각으로는 두 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었다.

첫 째로는 한국 사회의 급격한 사회 변동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사회적 지위의 욕구가 있는데 사회 변동성이 크고, 안전망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지위 상실에 대한 불안이 커진다. 이 불안의 해소를 위해 사람들은 사회적 모습과 그 견고함을 다른 이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고 이는 과시적인 소비, 허영심과 허풍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언행으로 이어진다. 이런 불안 심리 뿐 아니라 실제로 경쟁에서 도태되어 사회적 지위를 잃게 된 경우, 다른 사람이 보는 나의 모습과 이에 대한 평가는 이전 처럼 유지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이는 사회적 자아에 대한 과대한 집착을 유발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근 백년을 살펴보면 급격한 성장과 체제 변화에 따른 사회 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개인의 가치 판단과 사회적 자아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는 사회에서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상당부분 설명할 수 있다.

둘 째로는 전체 중심의 사고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을 중요시하는 사회를 경험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서양이 종교 권력이나 전제적 군주제로부터의 독립과 인본주의의 실현을 위해 수백년 간의 개인 존중과 자유의 권리를 발전시켜 온 반면 한국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지게 된 것은 고작해야 이십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그 이전의 삶이라는 것은 늘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상당한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을 받는 시대였다. 모든 사회 조직에서 공(公)을 중시하고 사(私)를 사사로이 하는 것이 권장 또는 강요 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이러한 오랜 시간의 경험이 남이 보는 나를 훨씬 중요시하는 습관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자신이 되지 못하고 늘 사회에서 강요된 모습과 비교하며 자신의 가치가 떨어질까 걱정하는 모습이 현대 한국인이다.

나는 이러한 사회적 자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이 기대하는 나로 변화하려는 노력은 항상 그 노력을 배신한다. 이는 그 타인의 시선은 일관적인 고정점이 없고, 사람은 어른이 되고 시간이 흐를 수록 변화를 이루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원인으로 인해 한국인은 나이가 들수록 불행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에서 기대되는 모습은 하나 둘 씩 겹겹이 어깨 위에 쌓이는데 이를 만족시킬 에너지, 시간, 돈, 유연함은 모두 점점 사라져간다. 가족, 시간, 꿈을 하나씩 희생해가며 노력해도 사회의 기대치와 나의 모습간의 괴리는 점점 커져서 몇몇 소수를 제외하고는 패배감에 사로잡혀 자존감을 잃어간다. 이는 현대 사회의 부의 분배 문제처럼 사회적 행복의 쏠림 현상이다.

자존감과 함께 행복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오래 지속되려면 나를 내부에서 찾는 편이 훨씬 더 유익하다. 일희일비의 기준은 사회에서 강요된 나의 모습을 얼마나 만족시켰는지가 아닌 나의 본질적인 모습에서 변화가 있었는지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 강요나 시선에서 벗어나서 시간이 지나도 변화하지 않는 기준을 정해 이것을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평가 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능숙하게 하는 외국어를 하나 쯤 배울 것, 사회적 약자를 항상 배려하고 친절하게 할 것, 철학이나 도덕적 신념을 세우고 이에 따라 행동할 것 등의 목표는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 전반에 걸쳐 이러한 문화를 만들고 사회적 강요를 완화하는 것은 쉽게 가능할 것인가? 안타깝지만 나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장 과정에서 교육과 사회화로 고정된 사고의 방식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개인 차원으로 그러한데 사회적으로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은 더 요원한 일이다. 세대가 흐르고 사회적 가치가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여야 한다. 새로운 사고와 가치를 추구하는 세대가 사회의 주류가 되기를 기대하며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에 대한 교육과 규범, 제도, 법 등 변화의 유인책을 정비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보는 방법

모델링(Modeling)

  모델링은 실제에 가까운 모형이다. ‘가까운’은 부정확함을 내포한다. 실제를 똑같이 복제할 수 없기에 모델링을 이용한다.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모델링되고, 추상적인 개념은 우리 머리 속에서 어떤 상(象)으로 모델링 된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개념은 이 과정에서 반드시 단순화, 축약 된다. 따라서 우리 머리 속의 상(象)은 실제와 많은 차이가 있다.

실제

  모든 존재는 영원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어떤 것은 오랜 기간 동안 변치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금’은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금이다. 따라서 금은 변치 않는 사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실제의 많은 부분은 그 자체 뿐 아니라 다른 실제와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되기도 한다. 금 거래소에서 금의 가치는 초 단위로 변한다.

  세상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첫 번째 이유는 위에서 말한 모델링의 과정에서 많은 단순화와 축약이 일어나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인식한 것은 이미 세상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식한 것과 실제가 동일하다는 고집을 피울때 편견과 오해가 생긴다.

문제들

  내가 인식한 것과 세상이 다른 것은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세상을 내 나름대로 해석할 자유가 있다. 많은 노력과 투쟁을 거쳐 이를 말할 자유, 글로 작성할 자유, 이를 배포할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실제와 다른 인식대로 행동한다면 돈키호테가 겪은 문제가 일어난다.

  이분법(二分法)은 모델링의 오류 중 대표적인 사례이다. 실제를 둘로 쪼개서 생각한다. 좌파와 우파, 우리 나라와 남의 나라, 부자와 가난한자, 남자와 여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중간 어디쯤에 선을 긋고 이를 기준으로 좌우로 갈라 생각한다. 실제를 쉽고 빠르게 모델링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리고 대표적인 동물의 판단 방법이기도 하다. 얼룩말은 사자인지 친구인지 판단해서 도망가야 한다. 1초라도 느리면 잡아먹힐 확률은 그만큼 늘어난다. 인간도 본능적으로 이분법적 판단을 한다.

  대신 이분법은 복잡한 세계와는 잘 맞지 않는다. 우리는 연속적(continuous)인 세계에 산다. 세상을 둘로 쪼개는 것보다 다섯개, 백개로 쪼개는 것이 실제와 가까운 모델링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인식의 정밀함보다 빠른 판단과 간편함을 선택한다. 빠른 판단이 강요되는 현대에는 당연한 선택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판단과 행동이 지배하는 사회는 그 만큼의 갈등과 오해를 감수 해야 한다.

  ‘꼰대’는 오래된 인식을 바뀐 세상에 강요할때 듣는 문제이다. 과거의 나의 삶과 현재 타인의 삶이 동일한 가치관에서 모델링 될 때 타인의 삶에서 잘못된 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못마땅한 시선에서 그치면 다행이지만 한마디, 두마디 참견하기 시작하면 영락없는 꼰대가 된다. 다른 시대와 세상에서 살고 있는 타인의 삶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른 세상의 다른 가치를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춰버리면 내가 사는 세상이 좁아진다.

노력

  세상을 정확하게 알기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고된 일이다. 우선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이 중 오래되어 현재와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계속 바로 잡아야 한다. 세상을 보는 여러 시각을 익혀야 한다. 나의 인식과 세상이 다르면 모델을 다시 세워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인식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지만 고된 노력을 해서 세상을 정확하게 인식한다고 해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고, 본능은 이분법 같은 간단한 방법을 쓰라고 유혹한다. 이 정도의 엄밀성을 갖추려면 공부가 곧 업(業)인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좋은 방법이 있다. 우리는 비록 생업 전선에서 시간에 쫓기는 일을 하느라 정교한 모델링을 해볼 시간이 없지만 이미 누군가 우리를 위해 해놓았다. ‘책’ 속에 그것이 있다. 물론 책도 실제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최소한 무지에 바탕한 나의 판단보다는 나을 것이다. 책을 바탕으로 나만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보상

  노력과 근면을 통해 세상을 보는 투명한 렌즈를 가지면 무엇이 좋은가?

  세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의 가치를 높이고, 따라서 나의 가치를 높인다. 앞으로 지식인으로서 나의 가치는 내가 세운 모델이 실제와 같은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독창적인지에 따라 결정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본능이 아닌 나만의 독특한 판단이 중요해진다. 지적 활동이 사회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미래에는 특히 그렇다.

  지식 노동자의 가치는 기업 전체 역량의 기여도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똑같은 모델을 세우고 같은 입력에 따라 같은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아무런 기여가 없는 것이다. 그 정확도는 나중에 판단하더라도 어떤 입력에 동일한 판단을 내리는 두 명이라면 기업에서 이 둘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본능이나 지식은 공유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상과 세상을 보는 모델은 공유되기 어렵다. 이는 단편적인 순간의 지식이 아니라 역학(力學)에 가깝기 때문이다. 공유되기 어려운 것은 따라하기 어려운 것이고 나의 독창성이 오랜기간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지식 노동자라는 말보다는 지혜 노동자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도 세상을 정확하고 독특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모델링’의 가장 큰 목적은 예측이다. 정확한 모델링은 정확한 예측을 가능하게 하며 따라서 잘못된 판단으로 초래한 실패와 비난을 줄여준다. 이는 모델을 발전시켜 나갈 새로운 기회와 시간을 얻을 수 있게 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주장이 옳은 것으로 입증되었을 때 보다 큰 희열을 얻을 수 있다. 또한 타인과 구분되는 자기의 주장, 자아를 입증하는 경험이 쌓이다보면 자신감, 확고함이 생기고 이를 통해 스스로의 시각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동력을 얻게 된다.

결론

  세상을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노력해야 한다. 이는 시험에 통과한다던지, 단 한번 경험한다던지 하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의 노력이다. 어떤 이는 이러한 노력이 바쁜 일상을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노력이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이나, 그 보다 높은 목표를 위해 사는 사람에게나, 누구에게나 현재보다는 더 발전된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의 시작점이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