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office life

대출이 있다보니 돈이 나올 구석을 생각해본다. 문득 나도 회사를 오래 다녔다는 생각이 들어 사내 인트라넷의 퇴직금 계산 페이지를 들어가 보았다. 어느 덧 근속년수에 숫자 16이 찍힌다. 오랜 시간이다. 초등학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모두 합친 시간 만큼이다. 채우기 위해 학교를 다녔고 쏟아내기 위해 또 그만큼 회사를 다녔다.

나는 꾸준히 오래하는 것을 잘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개근이라는 것은 나의 자부심이다. 조퇴는 몇 번 있었지만 결석은 없었다. 몇 차례 학교에 가지 못할 위기가 있었지만 여행, 시상식, 외부 행사 등을 포기하고서라도 꼬박꼬박 나갔다. 회사도 몇 년에 한번 도저히 근무할 수 없는 것처럼 아플때 휴가를 쓴 것 외에는 꾸역꾸역 출근했다. 친구들과 같이 시작한 영어 회화 학원도, 수영 강습도 늘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은 나였다. 40여명의 동기들로 시작한 직장 생활이지만, 아직까지 여기 남아 다니는 것은 한자리 수로 셈할 수 있다. 물론 다른 곳에서 다들 열심히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회사 생활을 오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비결이었을까? 20년, 30년 다닌 분들도 많으니 사실 이 정도야 어느 정도의 근면 성실함만 있으면 가능한건가? 아니면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 그런건가? 자리에 앉아 오분 정도 생각해보니 아래 두 가지가 가장 가장 큰 위기이자 비결이라면 비결인 것 같다.

‘추상화된 대상에 감정을 가지지 않기’

큰 목적을 위해 사람이 쌓아올린 조직은 반드시 추상화된 대상물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권위를 부여한다. 회사 내에는 팀, 랩, 부문 등이 존재하지만 실체는 없다. 소속원들에게 어떤 조치나 행동이 취해질때는 권위를 가진 주체 명의로 이루어진다. 친구 두 명이 닭싸움을 하더라도 본격적이 되면 심판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임원이 아닌 직장인은 보통 그 조치나 행동의 대상이 된다. 득이 될때는 잠시 기쁘고 말지만, 해가 될때 내 마음속에 생긴 분노, 좌절은 꽤 긴 시간 마음을 갉아 먹는다. 승진 누락이나 복지 축소, 업무 전환 등은 달가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 나는 절대로, 절대로 추상화된 대상물에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어떻게 회사가 내게 이럴 수 있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 나에게  회사를 사랑하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어떻게 회사나 조직을 사랑할 수 있지요? 물론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순 있습니다.” 내게 있어서 회사는 애정의 대상이 아니다. 비슷하게 어떤 조직, 혹은 팀과의 갈등이 생긴다고 그 조직을 괴물로 여기거나 어떤 팀을 타도해야 할 악으로 여기지 않는다. 반면 그 조직의 최고 의사 결정권자를 미워하거나, 어떤 팀장의 인간성을 의심할 수 있다. 그게 훨씬 편하다. 싸울 수도 있고, 패배하고 인정할 수도 있다. 그가 보이지 않으면 감정도 사라진다.

간혹 회사 상사나 그 보다 더 높은 관리자에게 이런저런 불만 사항을 쏟아내는 직장인이 있다. 문제를 느낀다면 그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으며, 그럴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가서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 (물론 대안도 같이 들고 가야한다.) 해결할 수 없는 사람에게, 들어줄 수 없는 문제를, 감정의 발산을 통해 표현하는 것 만큼 최악이 없다. 최선을 다해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고 만약 안된다면 그 책임자의 능력과 자질, 의지를 의심해도 된다. 그것은 내 자유다. 하지만 그러기에 앞서 사람이 아닌 회사나 조직이 문제가 있다고 갈음해서 생각한다면 그건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 또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결국 그 책임자가 조직이고 조직이 곧 책임자라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동일시는 문제를 너무 어렵게 만든다. 조직이나 추상화된 개체를 움직이는 동력은 정보의 비대칭 때문에 쉽게 알기 어렵고, 무수히 많은 변수들의 결과이며, 단 하나의 솔루션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메시지에서 감정을 읽어내지 않기’

회사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직원들 사이를 가로지른다. 회사 생활을 가끔 전쟁에 비유하는데, 이는 경쟁사, 경쟁 조직과의 싸움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사내에서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을 오가는 총탄에 비유한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전화, 이메일이나 사내 게시판은 이미 전 세대의 수단이고, 위키 페이지, 슬랙 등 인스턴스 메시징, Teams 나 Zoom  같은 화상회의 솔루션들도 널리 쓰인다. 소프트웨어 개발 조직은  Jira와 같은 업무 관리 도구를 사용하기도 하며 여기에도 수 많은 메시징 기능이 결합되어 있다. 이들 모두는 키보드와 스크린을 매개로 한 의사소통이다. 최근에는 소통이 많아질 수록 역설적으로 조용해지고 키보드 소리만 가득한 사무실이 된다.

나는 정확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요즘 같이 유연 근로가 일상화된 시대에 업무의 속도를 따라가려면 꼭 그럴 수는 없다. 정보나 의견의 ‘즉시’ 확인이 필요할 때는 전화번호를 누르거나 슬랙 DM을 보낼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는 나의 조급함이지 이메일이나 슬랙 DM을 받은 상대방이 즉시 답장을 보낼 의무는 없다. 꼭 전화를 받을 필요도 없다. 그런 기대는 하지 않으며 직장인으로서의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인 시간 관리는 각자가 더 효율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

중요한 두 번째 원칙은 간절히 기다려서 받은 이메일이나 슬랙 DM에서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답장을 보내는 상대방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한다. 잠시 그런 감정이 떠오를 때는 어떤 상상도 배재한체 무미건조하게 활자 읽기를 수행한다. ‘단답’은 무례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미건조하고 사무적인 답변’은 나에 대한 무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빈정대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내 머리속의 시뮬레이션일 뿐이다. 그 결과에 따라 이어지는 내 감정들도 역시 근거 없는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100%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노력하되, 절대로 나의 상상을 덧붙이지 않는다. 상대방의 선의를 믿고 우리 모두는 직장에서 최선을 다한다 생각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Code of Ethics를 준수한다.

만약 이 사고선에서 벗어나면 회사는 인간성(Humanity) 없는 공간으로 보일 것이다. 모두의 모두에 대한 투쟁이고 진짜 전쟁터가 된다. 예전 일련의 경영학 수업을 들으면서 느꼈다. 여기에 인간은 어디 있는가? 같은 공간을 두고 누구는 전쟁터로 묘사하지만, 나는 다양한 배려들로 채워진 공동체 공간으로 보고 싶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원칙의 공통점은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상상과 그에 따른 감정의 회오리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점이다.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돈키호테처럼 내 마음 속의 허상의 대상물을 향한 분노, 미움은 내가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나도 안다, 16년 동안 때로는 미련하거나 미숙할 정도로 순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더 터프한 리더를 요구 받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나를 지키고 나를 목표하는 지향점으로 끌고가기 위한 전략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내가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더 좋은 사람이 되면, 자연스럽게 더 좋은 모든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 갈등은 어떻게든 해결되거나 잠잠해지거나 흘러가지만, 내 상상 속의 실체도 없는 대상에 대한 감정은 없어지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떤 가당치도 않은 유추와 회상에 의해 되살아난다. 내가 생각하기에 오랜 회사생활을 위한 가장 큰 장애물이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회사 생활에만 적용되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책을 읽는 법

나는 일 년에 40권 정도의 책을 읽는다. 아들이 태어난 해에도 30권의 책을 읽었다. 밤새 잠든 아이 옆을 지키는 일이 많아 우려했던 것만큼 책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이때는 아이가 규칙적으로 숨소리를 내며 꿈나라로 갈 때까지 희미한 독서등 아래서 책을 읽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어느덧 40여 년 책을 읽어오면서 나만의 책을 읽는 방법이 완고하게 생겼기에 몇 가지 적어보려고 한다.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일은 거의 없기에, 책은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그래서 집을 구할 때 도서관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중요하게 여긴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큰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도시가 만족스럽다. 걸어갈 수 있는 큰 도서관이 두 곳에 있다. 토요일 아침에 운동을 하고 점심을 먹기 전에 늘 도서관에 간다. 일주일 동안 읽은 책을 반납하고, 읽을 책을 빌려온다.

읽을 책, 읽는 책, 읽은 책은 모두 기록한다. 그 전에는 이런 습관이 없었다. 10여 년 전, 언젠가부터 내가 읽은 모든 책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예전 언젠가 읽고 있는 책이 너무 익숙해서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보니 이미 수 년 전에 읽었던 책이었다. 그때부터는 읽는 것을 시작할 때, 그리고 다 읽거나 중도에 포기할 때 기록을 한다. 일 년 동안 몇 권을 읽었는지 세어보기도 편하고, 나의 독서 취향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기도 편한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한 감상평을 남겨 놓기도 한다.

책 속에서 다음 읽을 책을 찾는다. 예전에는 무작정 도서관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 (새것이고, 표지 디자인이나 제목이 마음에 들고, 내 눈높이 즈음의 책장에 꽂혀있는)을 고르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읽고 있는 책이 마음에 든다면 책의 인용 부분이나 내용 중 언급되어 있는 책 혹은 작가의 작품 중에 다음에 읽을 책을 고른다. 한 분야에 대해서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게 되고, 도서관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읽을 책을 고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물론 특별히 다음 읽을 책을 찾지 못했다면 도서관 둘러보기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두세 권 정도의 책을 동시에 읽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잘 납득이 안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집중력 저하와 시간 부족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대응이다. 억지로 책을 읽을 수 없으니,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책을 읽을 환경을 잘 갖추어야 한다. 책을 읽는 상황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하나는 소파와 침대 독서이고 또 하나는 책상 독서이다.

소파와 침대 독서를 위해서는 소프트 커버나 페이퍼백으로 제본된 책을 고른다. 무게도 가볍고 내용도 가벼운 것을 읽는다. 읽다가 언제 잠들어도 괜찮고, 책을 덮고 생각할 시간이나 인터넷을 검색해볼 시간도 딱히 필요 없다. 대중교통을 탈 일이 있다면 가방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기도 좋다. 이런 책을 읽을 때는 문장, 문장을 뛰어다니듯 읽는다. 순식간에 문단을 읽고 축약한 내용만 머릿속에 보관한다. 소설이나, 자기 계발서, 수필, 입문서 등이 여기에 속한다. 휴식이 필요한 시간에 이런 독서를 한다.

반면 책상 독서는 엄숙, 근엄, 진지하다. 책상 (지금은 내 책상이 없으므로 주로 식탁) 에 정자세로 앉아서 읽는다. 적당한 Task Lighting이 필요하고,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주위에 잡동사니들은 모두 치워놓는다. 단어와 단어, 그리고 그 사이의 연결까지 꼼꼼하게 읽지 않으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책은 500페이지 이상의 하드커버들이 주를 이룬다. 사실 책의 제본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을 몇 차례 되풀이하여 읽기도 한다.

책상 독서를 위해서는 지적 도약이 필요한 책을 중심으로 읽는다. 나의 지적 도약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저자도 놀라울 정도의 지적 압축을 통해서 저술한 책이어야 한다. 가볍게 읽어서는 이해가 되지 않으며, 오랜 시간 걸쳐서 읽는다. 물론 저자도 오랜 시간 걸쳐서 쓴 책들이 많다. 지금 읽는 책 <사고의 본질>은 올해 봄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7개월을 넘겨 읽고 있다. 한 번 앉아서 읽을 때 10장을 읽기가 만만치 않다. 내 독서 목록에서 이런 책을 꼽아보자면, 같은 저자의 <괴델, 에셔, 바흐>, <위대한 지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멜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 <앙시엥 레짐과 프랑스 혁명>,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와 같은 책들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지식과 생각, 사상의 전달 체계가 있다. 특히 최근에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800페이지의 책, 50페이지 정도의 리포트(report), 20페이지 남짓한 논문, 5페이지 정도의 블로그 포스트, 몇 단락 정도의 ChatGPT 답변, 300자 미만의 X 포스트 (구 트위터)가 있다. 또 수십 시간 길이의 시리즈 다큐멘터리, 한두 시간 길이의 영화나 TV 프로그램, 수 분 정도의 광고나 유튜브(YouTube) 콘텐츠, 15초 내외의 숏폼 등 미디어(Medium)와 그에 따른 콘텐츠들이 넘쳐난다.

나는, 고루한 생각일지 몰라도 그 안에 담긴 생각 전체를 고스란히 전달받으려면 반드시 매개체가 책이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책을 읽는 데 쓰이는 시간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중고등 수준까지 배우고 익히게 되면, 그다음의 ‘지적 도약’을 위해 책 한 권 때로는 수 권이 필요하게 된다. 5페이지짜리 블로그 포스트 100개를 읽는 것과 500페이지짜리 책 한 권을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요구르트 한 병과 30년산 위스키 한 병만큼의 차이가 있다.

언제까지 지금처럼 책을 즐기고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지적 능력이 살아있는 한 꾸준히 읽고 즐기고, 또 지금처럼 쓰고 싶다. 다른 누구보다도 도서관 책상에 정자세로 앉아 흐트러짐 없이 수 시간이고 책을 읽는 할아버지들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