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고 죽는 것 사이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는 머리 속을 떠나지 않은 숙제다.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알면, 갈림길에 섰을 때 명확히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판을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무엇이든 별다른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민하고 머뭇거리는 시간이 큰 낭비처럼 여겨졌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 많은 예시 답안들이 있다. 나의 아버지가 말해 준 것이 있고, 종교에서 가르침을 주는 것이 있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써서 책으로 만들어 놨고, 문화와 사회를 통해 끊임 없이 주입되는 답들도 있다.
이를 고쳐서 쓰기에는 부끄러움이 크다. 사실 지난 십여년간은 아버지의 생각과 해답이 옳다고 생각하고 누가 묻거나 판단이 필요하면 내가 들었던 것을 살짝 고쳐 답을 했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가 될 정도로 시간이 흘렀고, 아직도 같은 대답을 하려니 솔직히 이 것은 내 답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내 답을 찾고 싶은 생각이 오랜만에 들었고, 이 답을 찾기 위한 독서를 많이 했다. 이를 통해 몇 가지 생각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세상에 대한 이해를 끊임없이 넓히는 나의 모습으로 인생을 채우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의 사회적 위치를 옮겨 감에 따라 그 위치에서 밖에 보이지 않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더 할 수 있게 된다거나, 내 아이를 교육 시켜감에 따라 인간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이해하는 지평을 넓혀 간다거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며 이해 되지 않던 현상을 해석하는 눈을 얻는다거나.
내가 어떤 선택을 할때 그 기준은 내 이해를 넓혀 갈 수 있는 것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옳으며 따라서 무엇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다른 미지의 것을 위해 새로운 노력을 경주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을 이해했는지도 중요하지만 늘 새로운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아직까지는 매우 추상적인 생각이지만 이렇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언젠가는 내가 아는 것과 내가 하는 행동이 물리적인 나, 또는 무엇을 소유하는 나보다 큰 나라는 존재를 정의한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아는 만큼 내 세상이 넓어지는 것을 느끼고,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나만의 우주를 가지게 되면 결국 나의 소멸이란 의미가 없음, 즉 삶의 마지막을 극복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