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로(吐露)

영어 숙어 중에 stick in이라는 표현을 보면 늘 일본 영화 "오늘의 사건사고" (きょうのできごと) 중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불법 도박 단속을 피해 도주하던 직원이 사이가 매우 좁게 세워진 두 빌딩 사이에 끼이는 일이 발생하고 출동한 경찰들이 구조를 위해서 노력하지만 결국 하루 밤을 건물 사이에 끼인체 보내게 된다는 이야기.

해가 떠오른 후에야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는 그 장면을 볼 당시에는 단순히 코믹한 해외 토픽감으로 치부했을 뿐이지만, 지금까지 몇 번이고 머리 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을 보니 꽤나 단단한 상자속에 담아 마음속에 보관했었나 보다.

요즘 나도 모르게 내쉬는 커다란 한숨에 스스로 놀라는 일이 많다. 런닝머신 위에서 30분을 달릴때, 수영을 하다 물 속에서 숨을 크게 참을 때 등등, 이런 경우 밖에서부터 산소를 갈구하는 숨이라면, 가끔씩 내쉬는 한숨은 내 안에서 무엇인가를 내뱉기 위해서 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운동 할때는 신체적인 필요에 의한 호흡이라면, 이러한 토로(吐露)는 정신적인 필요에 의한 호흡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100m를 숨가쁘게 달리는 것처럼 인생을 숨가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회반죽으로 사이를 단단히 메꾼 벽돌들 같은 인생을 조금 관망하고 있자면(이도 쉽지는 않지만), 역시 터져나오는 한숨은 여유와 토로에 대한 동경이겠지만, 그렇다고 쌓아올린 벽돌들을 무너뜨리거나 부실공사로 연명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싶은 것이다. 주말이 점점 소중하게 느껴질 수록 그만큼 열심히 주중을 살았다는 반증이지 않은가? 그냥 묵묵히 쌓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것이 빌딩 사이에 끼인 사람에 투영되서 보이는 요즘이다.

불면증

눈을 감아도 온통 푸른 빛으로 가득찬다. 이쯤 되면 사실 눈을 뜨나 감으나 별로 차이가 없다. 이른 아침을 위한 이른 수면이 이렇게 방해받고 나면 당분간은 다시 잠에 빠져들 생각이 들지 않는다. 푸른 빛을 거슬러 올라가, 푸르름이 뿌옇게 서리 맺히는 창문을 지나 밤하늘을 포물선으로 날아가다보면 도착하는 곳은 몇 달전인가 오래된 아파트를 헐고 지은 최신식의 하얀색 건물이다. 대지를 꼼꼼하게 매꾼 설계와 번쩍이는 외벽을 자랑하는 이 건물은 낡은 주위 건물 사이에 유독 우뚝 서있다. 그리고 그 상반신 전체에 갑옷처럼 두른 번쩍이는 간판은 밤이 되면 그 존재가 더욱 더 부각된다. 시야를 자극하는 보색의 대비와 전혀 아까워하지 않고 내뿜는 전방위적인 빛의 분출은 아마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고 있을 것이다. 하찮은 일개 학생이 품은 소박한 내일의 계획마져 방해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 되었으니 말이다.

딱 한번 이 건물을 방문한 적이 있다. 5층 건물의 5층에 위치한 치과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서 였는데, 번쩍이는 대리석 바닥을 지나 아직 채 안내판이 붙지도 않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하의 잡동사니를 파는 대규모의 마트, 일층의 약국, 이층의 피부관리실, 비어있는 삼, 사층을 지나 문이 열리는 오층에서 본 것은 거대한 서울대 마크, 진리는 나의 빛. 이 그려져 있는 커다란 유리문. 아직 채 개업한지 두달이 되지않아 어느 곳의 먼지도 용납되지 않은 모습의 병원은 건물의 외벽만큼 깨끗했고 탁상시계 속에까지 들러붙은 서울대 정문은 밤에 빛나는 찬란한 네온사인만큼이나 뭔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어하고 있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불면증의 초기증세는 보통 새벽 2시까지 달라붙어있다. 불쾌하게 하는 것은 이 녀석이 근성은 없지만 부지런하다는 것인데, 즉 2시라는 비교적(?) 이른시간에 사라지지만, 일주일간은 꼬박 같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머리 속이 제대로 정리가 안되어있어서 그런 것이다. “꿈이라는 녀석은 현실의 위에 위치해야 부스러지지 않는다.” “현실과 노력은 같은 크기로 같은 무게로 또 같은 밀도로 꿈의 두 받침대가 되어야 안정감이 있다.” “운이라는 녀석은 별도의 상자에 넣어서 정리해야지 뒤섞어 놓으면 다른 것들이 썩어버리고 만다.”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참 크고 정리하기에 좋은 박스이지만 내구성이 별로 없어서 영원한 것을 넣기에는 마땅치 않다.” 하루 동안에 보고 들은 겪은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이지만, 이것들을 너저분하게 어질러 두고는 도저히 잠이 오질 않는다. 그 중에는 버릴 것이 태반이다.

12시가 되면 네온사인의 외침도 뚝 그친다. 감은 눈 속에서 더 이상 푸른 빛이 느껴지지 않으면 나는 지금이 정확히 열두시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전까지 힘겹게 밖으로 또 안으로 싸우면서 지켜내려했던 나의 수면시간에 조금은 평화가 찾아왔구나 안도한다. 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은 멀다. 정신을 차리고 마음의 정리를 다시 시작하면, 푸른 빛을 타고 온 무엇인가가 마음 속에 잔뜩 잡동사니들을 남기고 갔음을 깨닫고 부지런히 정리를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그것들은 모두 버려져야 할 것이다. 이것들을 모두 분리수거 한 이후에 나는 잠들 수 있다. 새벽 2시 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