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하나를 다 쓰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유니볼 검은색 하나를 다 썼다. 펜 하나를 끝까지 다 쓴다는 의미는 1300원짜리 물건이 세상에 태어나 충분히 자기 역할을 다 했다는 것 이외에도 내가 무엇인가 크나큰 시련과 시험을 통과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약 1년 가까운 시간동안 사용했던 펜, 깨끗하게 비워진 잉크 공간을 보기 위해서는, 그 동안 혹시라도 펜을 떨어뜨려 펜 끝의 볼을 빠뜨려도 안되고, 어딘가에 칠칠맞게 흘려서 잃어버려도 안된다. 내 책상 위에 놓여있는 펜을 슬쩍 들고가서 쓰고는 다시 돌려주지 않는 누군가에게 발견 되어서도 안되고 중간에 다른 펜이 더 좋아져서 필통 속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서도 안된다. 마치 화분 하나를 꾸준히 일년동안 가꾸고 돌보아 꽃을 틔웠을때의 그런 느낌이 이 빈 펜 속에서 느껴진다.

이런 단순하고 명쾌한 시험을 나는 좋아한다. 꾸준하기만 하면 달성할 수 있는 확실한 목표들을 하나씩 달성할 때마다 소소한 성취감을 느끼고 그러한 작고 꾸준한 일상들이 모여서 내 삶을 한조각 한조각을 채워나간다. 마치 운동을 매일매일 하는 것처럼, 영어로된 책을 꾸준히 읽어내려가는 것처럼. 내가 하는 일들이 모두 이런 작지만 의미있는 것들이고 하나씩 하나씩 쌓여가는 느낌이 들기를 간절히 바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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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하루하루 만족을 위해 살아

특별해지고 싶은데, 인생의 중심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화려한 시절은 보내고 싶은데 생각해야 될, 수 없이 많은 허들 때문에 그게 쉽지는 않다.

마라톤을 뛸때는 미리 코스를 분석하고 어디서 힘을 빼고 어디서는 전력을 다하고 어디서는 다른 사람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고 하는 사전 답사가 가능할테지만 앞으로 있을 50년에 달하는 세월은 칙칙한 암흑으로 가려져 있어 한걸음 한걸음 희미한 램프에 의존해서 내딛기 바쁘다. 그나마 몇 년의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20대에 비해서 30대는 더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냥 현재 하고 싶은 것, 가장 만족을 주는 것만을 선택해서 근근히 일주일이나마 보면서 나아간다.

뭐, 별다른 것이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구만을 근근히 채워가면서 살고 있을 뿐이다. 나와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다. 외로우면 누구를 만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스포츠를 즐기고 쇼핑을 하고. 취미는 뭐에요? 같은 질문에 나올 대답따위 뻔하다. 다양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왜 그걸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인생 모든 Activity들이 다섯 손가락 안으로 분류될 수 있으리라.

강렬한 욕구에 뛰어다니는 묵직한 삶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 나의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이 보고 듣고 느껴야 하나. 아니면 내 스스로를 돌아보며 마음가짐을 다시 해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