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협상 타결과 세계화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많은 부분이 더 조정될 뿐 아니라 실제 실행까지는 남은 길이 멉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수많은 찬성과 반대가 있을 것이고, 생산적인 토론과 소모적인 싸움이 반복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자의 수많은 신문들부터 협상의 득과 실을 따지는 분석 기사를 내보내고 있고, 정치권, 시민단체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저는 자세한 협상 내용이나, 개방 시기등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앞으로 겪게 될 이러한 일들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며, 궁극적으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보통신 기술의 엄청난 발달로 지구촌이라는 말조차 이제 구식으로 느껴질 만큼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 속에 포함된 그 무시무시한 영향력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준비해야 할 필요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많은 다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산업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간단히 말해 지구상에서 가장 나은 제품을 가장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기업이 결국 그 산업의 대부분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서 한 국가가 지배하는 것이아니라 시장 논리에 따른 기업이라는 점입니다.) 물리적인 운송수단과 통신수단이 발달할 뿐더러 더 이상 국가라는 틀이 시장을 좌지우지 할 능력을 상실해 갈수록 더욱 더 가속화 될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은 인터넷에서 이러한 비유를 보았습니다. “구멍가게 밖에 없는 우리나라에 미국의 대형 할인 마트가 들어온다고 합시다. 기업의 규모나, 더 저렴한 제품을 공급하는 능력에서 우라나라의 구멍가게들은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결국 치열한 가격 경쟁 속에 다 망했습니다. 이제 독점이 되어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이 할인마트는 마음대로 가격을 올리는 횡포를 부렸고, 이에 한국 국민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비싼값을 주고 물건을 구입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언제까지 국가 단위로 생각하는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셨군요. FTA와 세계화는 이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현상을 막기위해 하는 것입니다. 거대 할인 마트가 가격을 독점으로 올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전세계 어딘가의 나라에서는 더 싼 가격으로 물건을 팔 수 있으니 한국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보고 개방된 우리나라에 진출하는 기업이 분명히 생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산 쇠고기가 우리나라에 수입되어서, 우리나라의 축산 농가들을 모두 망하게 하고, 나중에는 그 독과점에 의한 횡포로 가격을 올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우리나라에 쇠고기를 수출하는 모든 기업들이 연합해서 가격을 담합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미국이 그렇다면, 호주산을 소비하면 되고, 호주가 그렇다면 우루과이 산을 소비하면 됩니다. 더 이상 국가와 정치논리에 의한 시장 통제가 가능한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많은 국내의 농민이 피해를 보고 경쟁에서 밀려 결국 산업에서 도태될 것은 확실합니다. 이 부분은 세계화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희생으로 보입니다. 결국 낮아진 장벽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품질의 농산물을 적은 자원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지역에서 농산물이 생산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구적인 차원에서 보면 옳은 이야기 입니다. 대신 그 지역의 사람들은 휴대폰이나 자동차를 수입해서 쓸 것이고 바로 그곳에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젊은이들 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젊은이들이 이공계를 기피합니다. 왜 그럴까요? 일이 힘들어서? 예, 어느 정도는 옳은 말입니다. 정답은, 세계화가 가장 먼저 이루어지고 있는 분야가 바로 첨단 기술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의 이공계인들은 이미 하나의 시장에서 경쟁하기 때문에 가장 치열한 경쟁 시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쟁에서는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노력 없이는 금방 도태되고 맙니다. 이러한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능력있는 이공계인들이 전공을 살리기보다는 공무원 시험 준비등의 더 안정적인 직장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경쟁이 없는 분야이지요. 이러한 모습은 FTA와 매우 닮아있습니다. 개방으로 치열한 경쟁 사회로 나아가서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느냐, 아니면 울타리 안에서 경쟁 없이 보장되어있는 안정된 삶은 누리느냐. 지금까지는 후자의 삶을 선택해도, 훌륭한 선택이라고 말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후자를 선택해도 예전의 안정적이고 경쟁이 없는 삶을 누릴 수는 없어보입니다. 그 근거가 되는 몇가지 현상은 굳이 예로 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떤 분야에서건 세계와 경쟁해야 하는 시기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이공계가 먼저 그 포문을 열었지만, 앞으로는 서비스업, 농수산업이 줄줄히 뒤를 따를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이 옳다 그르다 평가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거대한 흐름이 시작되었고, 앞으로는 점점 더 가속화 될 것이고, 그 누구의 힘으로도 막기는 힘들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처하는 현명한 자세는 우리 주위에 장벽을 더욱 더 높게 쌓는 것이 아니라 이 거대한 흐름속에서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싸워야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산업도,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생소한 한자 공부를 하는 공대생이 아니라, 세계와 경쟁하기 위해서 영어를 공부하는 모습으로 바뀌어야 합니다.(물론 한자보다 영어가 낫다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FTA는 그러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기를 모두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아마 대다수는 경쟁에서 뒤쳐지고 양극화라는 세계화의 부산물로 인해 나뉘어진 사회 계층에서 낮은 쪽으로 추락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하거나, 아니면 뒤쳐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에서 승리한 소수에게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이득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세계라는 시장이지요.

  위기를 보지말고 기회를 보고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희생이 있겠지만, 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우리나라 정부가 한 일이 아니라, 세계의 흐름과 시장의 흐름이 일으킨 일입니다. 누구의 탓을 하거나 누구의 칭찬을 할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위치의 범위는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고, 그 중 어디를 점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먼저 변화하는 사람이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부디 국가의 틀을 벗어던지고 세계의 틀로 사고하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아날로그

  세상이 점차 디지털화 될 것이라는 증거가 넘쳐나는 요즘이다. 전기로 동작하는 기기를 몇 개나 가지고 돌아다니는지 생각해보고 그 숫자를 과거와 비교해보는 것도 그 증거를 알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되겠다. 고작해야 삐삐와 G-SHOCK이 디지털기기로 이룰 수 있는 우월감의 전부였던 나의 중학교 시절과 비교해보면, 요즘은 마치 온몸을 갑옷으로 둘러싼 전사처럼, 온몸의 각 부분에 디지털 기기를 무장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휴대폰은 정신병까지 초래할 정도의 중독성으로 온 국민의 필수품이 되었고, MP3도 유행의 최신 아이콘이 되었다. PSP, NDS등의 휴대용 게임기들은 집에서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않아서야 할 수 있었던 게임을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사람들의 시간을 더욱 더 잡아 먹으려고 하고 있다. 경량화 된 본체와 대용량의 베터리를 장착한 노트북은 이 모든 기기들을 자신에게 컨버젼스 시킬 수 있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대다수는 이러한 디지털 기기들의 대규모 공습을 공습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축복이라 생각한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물리적인 거리의 개념은 사람들 머리 속에서 점점 좁아지고, 이진부호는 부피를 무시하는 공간속에 저장되고, 이 결과로 얻어지는 당연한 축복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어보인다. 세상은 사람들의 욕구가 흘러가는데로 발 맞추어 흘러가기 마련이다. 휴대폰이 급격하게 퍼진것은 1000원에 준다는 소위 공짜폰의 자극적인 문구도 아니고, 이효리나 김태희가 TV CF에서 발산하는 매력때문도 아니고, 레이져에 슬림함에 혁명이라 이름을 붙인 사람들의 놀라움도 아니고, 단지 사람이 사람의 목소리는 원하고 사람이 사람의 흔적을 언제나 어디서나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은 그 이후 문제인데 결국 욕구의 표현 방법에만 영향을 끼칠 뿐이다. 디지털화된 편리한 세상의 매력에 중독된 사람들은 결국 그것을 가속화 시킬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개인 단위에서 전체 단위로 옮겨갈 수록 이는 더욱 더 확실해진다.

  외부의 모든 것을 디지털화 시키면, 자연스럽게 사람 자체도 디지털화된다. 나의 어떤 동작의 반응은 항상 동일하고 예상 범위 안에 있는 것이며 학습된 것과 동일해야 한다는 가정하에 우리는 행동하고 있다. 만약 동일하지 않은 결과가 얻어지면? Reset 한다. 디지털과 대면하는 인간의 자세는 항상 이렇다. 놀랍도록 세상을 단순화 시켜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는 디지털을 읽는다.

  디지털 화된 세상의 비인간성이니, 인스턴스 화된 인간관계니 이런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자는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은 사회학자나 윤리 선생님에게 맡겨두자. 인간의 저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아날로그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 당연한 이야기를 또 하고 싶은 것이다. 지겨운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자주 반복해두지 않으면 1.5v로 작동되는 조그맣고 딱딱한 녀석들에 의해서 머리속이 점령 당할지도 모른다. 그건 중요한 문제다.

  조금 이야기를 다른데로 돌려서 내가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뉴턴의 물리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포물선으로 공을 던지면, 작용되는 힘이 수직방향과 수평방향으로 분해되고 수평방향의 속도는 그대로 유지되고, 수직방향의 위치는 중력가속도에 의해 영향 받는다는 놀랄만큼 분석적인 이야기. 나는 물리가 참 싫었는데, 그 이유는 시험지 위에서의 물리 같았기 때문이다. 답은 소수점 2자리까지 구해야 인정될 정도로 정밀함을 요구했지만, 그만큼 진공 상태여야 하느니, 지구 위여야 하느니 조건도 까다로웠다. 말 그대로 쓸모가 없어보였다. 당장 운동장에 나가서 시험지 위에 정밀하게 풀어내려간 공식대로 실험을 해도 결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공대로 진학할 사람들은 선택과목으로 물리2를 선택하라는 선생님의 추천에도 나는 지구과학2를 선택했다. 적어도 소수점 2자리까지 구하는 정밀함은 없었다. 계산을 해도 언제나 근사 값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감히 내가 상상할수 없는 거대함에서 나오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나에게 물리2는 디지털이었고, 자연과학2는 아날로그였다. 뭐,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뉴턴의 물리2는 역시 진리가 아니었다. (결국 대학에 와서 양자역학 관련 서적을 읽어보면서, 결국 물리도 아날로그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근의 초끈이론을 보면 더욱 더 그런 것 같다.)  

  나는 세상의 기본 원칙은 확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확률 중에 0과 1은 없다. 완벽하게 예측가능한 것도 없고, 또 완벽하게 옳은 것도 없으며, 사람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행동할 수 있으며, 그 중 절대적으로 틀린 것도 없다. 단지, 어떻게 될 확률이 있는 것이고, 어떻게 생각하게 될 확률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잘 이해하면 크게 화낼 일도 없고, 크게 잘못된 일도 없다. 내 머리속에서 확률은 아날로그와 동의어다. “자연스럽다.” 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다. 디지털의 화신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있으므로, 그 반대 급부일지도 모르겠지만, 자연은 아날로그가 지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사실, 반론의 여지도 없다. 아날로그는 자연이고, 디지털은 인공이다. 자연은 아날로그고, 인공은 디지털이다. 

  당연스러운 이야기를 안 당연스럽게 하려니 힘이 든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아날로그적인 세상이라는 말이고, 인간이 속하는 자연의 거대 원칙은 아날로그가 지배한다. 즉, 디지털화된 모든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에너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는 이유를 근래로부터는 산업화의 영향부터 과거 멀리부터는 문명의 발달등에서 찾고 있지만, 사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이 Digitalize 되어가기 때문인 것이다. 단지 요 몇년간의 디지털 혁명이라 불리는 예를 들었지만, 이러한 흐름은 사실 수천년, 수만년간 계속 되어 오던 것이라 생각한다. 기술이 뒷받침 되는 오늘날에 폭발적으로 증가할 뿐.

  이 생각을 채식주의자를 보는 미식가의 눈초리로 보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결론은 고기를 먹지 말자는게 아니라, 인스턴트 음식을 적당히 먹자는 쪽에 더 가까운 것이다. 디지털화가 가져다 주는 지극히 개인적인 편리함을 추종하는 한편으로 디지털화를 철저하게 컨트롤하는 능력을 키워두어야 하는 것이다.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 50%가 이어폰을 끼고 언제 어디선가 녹음되어 수천개로 복제된 “010” 부호를 듣고 있지만, 결국 나
에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내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속에서 중독적인 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찾아내는데 있다.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최근에는 복제에 더욱 편리하도록 디지털  필름을 많이 쓴다, 복제된 수천개중의 하나인 영상을 수백명의 사람들과 같이 감상하는데 8000원을 쓴다. 하지만, 살아있는 공연의 매력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었던, 그 순간, 그 위치의 그 몸짓과 그 소리다.     

  문화적인 측면이 아니어도, 아니, 어떤 면에서도 아날로그가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사람은 진정으로 휴식하고 긴장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어 보인다. 아날로그적인 취미 생활, 아날로그적인 사고방식, 아날로그적인 연애, 아날로그적인 식습관. 모든 것이 위기에 빠져있는 현대사회 이지만,   

  결국은 아날로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