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달리기 열풍이다. 러닝을 안하는 사람이 없다. 유행이었던 골프나 암벽등반, 테니스가 지나가고 이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단순하면서 원초적으로 할 수 있는 달리기가 지배한다. 작년, 작은 시골 동네인 과천 마라톤 신청도 수분만에 마감되어 깜짝 놀랐다. 자전거길로 출퇴근을 여러해 하고 있는데, 두 열로 맞춰 뛰는 젊은 친구들, 그리고 혼자 달리는 여성분들을 작년부터 많이 본다.
모두 달리는 방식이나 장소는 제각각이다. 회사 앞 양재천이나 한강을 따라 달리는 사람도 있고, 본격적으로 원정을 다니며 정규 트랙을 달리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주로 쓰레드밀(러닝머신) 위를 뛰는 사람도 있다. 러닝 크루에 가입해서 뛰기도 하고 혼자 뛰기도 한다. 기록이나 심박수를 측정하는 사람도 있고 30분만 뛰자고 달리는 사람도 있다. 카본화를 신고 뛸 수도 있고 컨버스화를 신고 (그러면 정말 안된다) 뛸 수도 있다. 모두들 나름대로, 열심히 뛴다.
모두들 뛰고 있다. 이 모습이 예전부터 내 머리속에 담긴 어떤 관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러면서 이 열풍 속의 ‘뛴다’는 것이 꼭 발을 힘껏 내 차고 지면을 딛으며 앞으로 나가는 행위처럼 만은 보이진 않는다. 사실 사람은 모든 면에서 뛰고 있다. 운동을 위해 뛰는 것과 지하철 문이 닫히기 전에 뛰어들어가는 것처럼 목적이 다른 실제 뜀박질도 있거니와, 무엇을 달성하기 위해 ‘분주'(奔走)히 노력하는 것도 달리기다. 세상은 온갖 종류의 달리기로 가득차 있고, 그 중의 어떤 것들은 진짜로 달리는 것이다.
세상이 달리기로 가득차게 된 것은 아마 이 사회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리라.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걷기를 강요하고, 걷기보다는 달리기를 강요한다. 물론 달리는 것보다 온갖 수단이 있으면 더 빠르게 움직이기를 강요한다. AI 처럼. 다들 똑똑하고, 튼튼하고, 뛰어난 사람들이 좁은 틈바구니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기 때문에 뛰지 않으면 당장 내가 가지고 있는 것도 사라져 버릴 수 있다. 이러한 불안이 모든 면을 지배한다.
얼마전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현실도 쓰레드밀을 뛰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주말에 늦잠을 자면 더 이상 회사에서 목소리가 커질 수 없다. 이 모습이 무엇이든 더 빠르게 해내기를 집요하게 강요하는 현대 사회 때문이 아닌가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루이스 캐럴의 ‘거울나라의 앨리스(1871)’를 보면 나와 똑같이 느끼는 붉은 여왕의 말이 나온다. 달리기 강박은 유래가 깊다.
Now, here, you see, it takes all the running you can do, to keep in the same place. If you want to get somewhere else, you must run at least twice as fast as that! (여기서는 제자리에 있으려면 온 힘을 다해 달려야 해. 다른 곳으로 가려면 그보다 적어도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하고.)
– Through the Looking-Glass Chapter 2: The Garden of Live Flow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