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목서를 만난 행운에 대하여

금목서가 피는 가을의 한복판에 광주를 방문한 것은 행운이었다.

이렇게 향기로운 냄새의 근원이 나무인 것도, 황금빛 작은 꽃이 만발하는 나무가 금목서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리고 이 향이 내가 어린시절 궁금하던 것임을 알게 된 것도 모두 운이 좋은 일이었다.

금목서는 짧게는 2주 길게는 한달 정도 강한 향을 내며 꽃을 피우는 중국산 나무다.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주로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에서 자란다. 잠깐 검색해보니 광주, 목포, 진해, 순천 등에서 목격담이 있다. 짧은 시기, 그리고 좁은 지역에서 자라기 때문에 명성에 비해 실제 그 향을 맡아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 맡아 보았더라도 이 것이 금목서 향임을 알지는 못하리라. 나 또한 35년 동안 알지 못했다.

과천에서 차로 4시간 가까이 달려 광주 아시아문화전당 근처에 주차를 하고 내렸다. 확연히 따뜻한 공기와 함께 바람이 불 때마다 달콤한, 하지만 과일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향기가 간질거린다. 아시아문화전당 가까이 걸어갈 수록 향이 강해지는데, 이 때는 향이 나무에서 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좋은 향기가 나무에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향기롭다는 모과에 비하면 이는 10배는 진하고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놀랍게 복잡한 구조의 현대식 건물, 그 근처에 가서야 이 황금색 꽃잎이 향기의 근원임을 알게 되었다. 이 거대한 컴플렉스 전체가 향기로 가득차 있었는데, 오목한 분지 형태로 지어진 건물 안쪽에 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향기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마치 향기를 뿜어내는 건물 디퓨져와 같았을 것이다.

향기에 취해 있자니 문득 저 먼 시절 기억의 조각이 소환되었다. 이것은 내가 10살 남짓했던 소년 시절, 오랜 시간 다녔던 피아노 학원에서 늘 나던 향기였다. 꽤 넓어서 피아노 3대 정도 들어가던 1층과 피아노 한대가 간신히 들어가던 1.5층 다락방, 그리고 조그만 부엌이 있던 0.5층으로 이루어진 작은 피아노 학원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2학기에 이 곳을 떠나왔지만 성인이 된 후 3번 정도는 시간을 내어 이 동네를 거닐었다. 딱히 고향이라는 의식이 없는 나에게는 이 곳이 내 기억 가장 오래된 풍경인 것이다.

10살 소년이 당겨 열기에는 무겁고,  절삭면이 거칠게 마감된 검은색 알루미늄 손잡이 를 당겨 들어가면 늘 이 향기가 났다. 그 때는 왜 이런 ‘냄새’가 나는 지 알 수 없었다. 향이란 무언가에서 나는 것이지 일부러 향기를 내기 위해 무엇을 뿌리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88올림픽과 98년 사이의 활기넘치던 시절, 그 활기만큼 아이들이 바글바글하던 학원을 혼자 운영하시던 선생님은 어떻게 이 향을 가득하게 만드셨던 것일까. 아이들이 몰려오기 전 청소를 마치고 늘 이런 준비를 하셨던 것일까. 아니면 선생님이 쓰시던 향수의 향일까.

지금은 알 수 없다. 놀라운 것은 91년의 냄새와 2025년의 냄새가 정확히 같은 것임을 내가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35년을 뛰어넘어 사진이나 글, 녹음 같은 기록이 없이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 향. 그것은 오히려 글이나 말로 기록될 수 없으며 무엇도 매개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내 몸 어딘가에 강렬히 복제되었던 것이다.

조막만한 손

우리 집 세차 당번은 나다. 차를 새로 산 지는 2년 쯤 되었다. 아직은 차에 애정이 남아서인지 기계식 자동 세차를 거부하고 있다. 덥거나 추우나 손 세차장에서 극세사 천으로 부드럽게 문지르고 있는 것이다. 손 세차장은 3천원의 고압수 뿌리기, 1~2분 동안의 스노우폼 분사, 열심히 미트로 문지르기, 다시 남은 고압수 뿌리기 순서로 이용한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거의 2만원을 내고 세차를 한 적도 있다. 지금은 2년 간 익숙해진 덕분에 낭비하는 시간이 조금도 없다. 단돈 7천원에 차를 깨끗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

처음에는 도움이 될까 싶어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가봤다. 하지만 도움되는 것에 비해 도움을 주었다는 유세가 너무 커서 그 이후 혼자 고생을 하고 있다. 세차를 하다 보면 몇 군데 팬 자리, 깨진 자리, 광택이 죽은 자리들이 발견된다. 마음이 아플 때가 있지만 그래도 깨끗하게 세차를 하고 물기를 닦고 바라보면 반짝반짝한 모습에 흡족한 것이다. 차를 바라보며 흐뭇함을 느끼는 사람들만 손세차장에 올 수 있다. 내 차지만 참 예뻐. 내 아들이지만 참 잘생겼어.

문득 아버지가 처음 차를 샀을 때가 생각이 난다.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당장 차가 필요해서 가장 빨리 나오는 차를 주문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원래 사고 싶었던 차를 못 사게 되었다고 그 후 몇 년 동안 불평했다. 아버지가 48년 생이시니 첫 차를 샀던 91년 쯤이 딱 지금의 내 나이였을 것이다. 기계를 전공하고 엔진에 관심이 많던 아버지다. 얼마나 기뻤을까. 이 차는 특별히 DOHC 엔진이라고 자랑하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영어라고는 한마디도 모르는 초등학생이었지만 DOHC가 더블 오버헤드 캠(샤프트)의 약어인 것을 옆에서 외웠었다. 아버지는 아마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했거나, 나한테 아는 척했으리라.

아버지가 차를 사신 후 방학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차를 몰고 부산, 창원, 남해, 거제를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다. 여름 방학이 되면 은근히 어디를 갈까 기대했다. 며칠 안 되는 어머니의 여름 휴가에 맞춰 온 가족이 2박 3일이나 3박 4일 일정으로 떠났다. 아버지는 떠나기 며칠 전부터 전국 도로지도를 펴놓고 어딜 갈지 머릿속에 그리고 계셨다. 절대 어딜 갈지 가르쳐주진 않으셨지만 모든 여행 일정이 머릿속에 들어 있으셨다. 이때는 우리 가족만 이랬던 것은 아니다. 88올림픽이 끝나고 98년 IMF가 오기 전, 경제 호황기에 사람들은 모두들 마이카를 샀고 지금의 해외여행 붐처럼 국내 도로로 쏟아져나왔다. 전국 여기저기에는 도로변 휴게소와 식당이 생겼다.

내 차는 거의 혼자 타는 차다 보니 실내 세차를 자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끔 아들이 뒤에서 과자를 먹고 난 다음에는 다이슨 청소기를 가지고 내려가서 부스러기를 빨아들이고 있다. 차를 산 지 1년까지는 차 안에서 음식 먹는 것을 금지했지만, 이제 마음을 내려놓고 과자를 먹는 것까지는 허락해주고 있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불만이 많다. 며칠 전 오랜만에 실내 세차를 하러 내려갔다. 매트를 털고 시트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들을 청소한다. 뒷문을 열고 청소를 하는데 오른쪽 뒷문의 창문 아래쪽에 번들번들한 기름이 지하주차장 조명을 유난히 반사시키는 것을 발견했다. 뒷좌석에 타는 사람은 한 명뿐이니 범인은 명확했다. ‘아들’!

물티슈를 꺼내고 닦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조막만 한 손자국에 문득 손짓을 멈추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틀림없이 포테이토칩을 와그작 와그작 먹다가 손에 기름이 범벅인 채로 창문 아래를 만졌겠지. 그런데 기름진 손자국이 너무 작고 귀여웠다. 순식간에 짜증과 화는 사라졌다. 짜증은 불판 위의 연기처럼 이렇게도 사라지는구나. 지금은 손을 활짝 펴도 내 손바닥 안에 들어갈까 싶은 작은 손이지만, 몇 년이 지나 고학년이 되면 달라지겠지. 이 녀석은 엄마 키를 훌쩍 넘어 어른을 향해 부쩍 클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시간인데 고작 뒷문짝의 기름기쯤이야.

나도 아버지를 도와 차를 세차했던 기억이 있다. 페이스리프트가 되어 번쩍이는 크롬 은색에서 투박한 플라스틱 도색 그릴로 바뀐 기아 캐피탈의 그곳을 작은 손으로 문지르며 닦았던 기억이 있다. 얇고 반짝이는 이전 모델의 그것이 더 예쁜 것 같은데라고 상상하면서. 우리 아들처럼 나도 아버지를 도운 것은 그 뒤로 몇 차례에 불과했다. 하지만 늘 차는 반짝반짝한 상태를 유지했었다. 내가 도와드리지 않은 이후로는 어떻게 세차를 하고 계셨던 걸까? 역시나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셨을까? 차에서 나의 조그만 손자국을 발견하셨을까?

훨씬 좁고 시끄러웠던 그때의 차, 꿈도 못 꿀 해외여행과 일 년에 한 번 떠나는 국내 여행, 여행 중 국도변 휴게소에서 먹던 갈비탕 속의 하얀색 당면, 집 앞 도로에서 양동이에 물을 길어다 끼얹는 세차. 그때의 우리 가족과 지금의 우리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