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이해

수학의 밀레니엄 난제들처럼, 내게도 오랜 시간 고민한 문제들이 있다. 나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다양한 책을 쓰고, 나름대로의 정답을 제시하지만 아직도 합의된 답은 없다. 납득되는 설명을 제시하는 사람도 없다. 인류가 존재하는 동안 해답을 알아낼 수 있을지 조차 불확실하다. 나의 난제들은 우주의 탄생, 생명의 탄생, 그리고 의식의 탄생이다.

나는  7살 때부터 유치원에 가는 대신 미술학원에 다녔다. 하루 일과 중 두 시간 정도를 미술로 채워 넣은 보육학원에 가까웠다. 집 바로 앞에 커다란 마당 놀이터가 있는 유치원이 있음에도 시장 골목, 지저분한 큰길을 한참 걸어가야 하는 미술학원에 가게 된 것은 새로운 것 하나라도 조금 일찍 가르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술학원에는 그림을 위한 다양한 사진책, 잡지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 내 눈길을 잡아 끈 것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어판이었다. 거기에는 백색왜성, 적색거성, 블랙홀, 시리우스, 페가수스 등의 사진과 상상도, 공룡의 탄생 과정과 다양한 화석, 태아의 주수에 따른 발달 등이 당시에는 보기 힘든 고화질의 컬러로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에 서툴고 그들처럼 미끄럼틀에 올라가지 않았다. 학원에 도착하면 가방을 던져놓고 늘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보는 아이였다.

유치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위 세 가지, 우주, 생명, 의식과 관련된 많은 책을 읽었다. 어릴 때야 그림책이나, 풀컬러 조판의 잡지였다면 20살이 넘은 시절에는 제법 어려운 책들도 읽은 기억이 있다. 그 범위는 점차 넓어져서 우주에서 물리학으로, 생명에서 진화의 역사로, 의식에서 심리학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관련이 있는 분야를 깊이 공부하게 되었다. 그 것이 나의 직업이자 밥벌이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치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 자신을 결정 짓는 수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면, 그 과정에서 내가 오랜 시간 품었던 고민들이 꾸준히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공지능을 공부하고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의식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무엇보다도 알고 싶었다. 앞의 두 가지 문제는 너무 거대하거나, 나와 관련이 적은 담론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선 내 머리 속을 이해하고 싶었다. 사람이 만든 것은 사람을 닮는다. 머리 속에서 동작하는 의식과 그 행동을 이해하면 세상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미래를 더 잘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래를 높은 확률로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상상하고 즐기는 것은 나 뿐은 아닐 것이다. 직장에서의 로또이야기 처럼 말이다. 내가 만들고 있는 인공지능이 현재와 같이 빠른 속도로 진화하면 근 미래에 불현듯 인공지능, 인공 의식의 탄생을 지켜보게 될지 모른다.

모든 학문이나 기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지만, 문제를 풀기 위해 연구하다 보면 또 다른 문제, 때로는 훨씬 더 큰 문제를 만나는 일이 생긴다. 의식이 수 많은 이야기와 신비를 간직한 우리 속의 새로운 우주가 아니라 단순히 뉴런과 시냅스의 복잡한 연결과 전기적 신호로 창발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의식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계적이고 결정적으로, 적어도 확률적(Stochastic)으로 설명할 수 있게될 가능성이 있다.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볼때 생명과 의식이 어떤 신비로움도 남겨두지 않을 수 있다. 마치 거대한 서버랙이 사람의 몸이라면, 의식의 작동은 HBM 내부의 얇은 실리콘 조각으로 분해되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앨런 튜링의 Machine이라는 표현처럼, 내 목 위에 붙어 있는 5kg 정도의 물건이 생존에 최적화된 감각과 반응 Machine 에 불과한 것 일 수도 있다. 사람은 복잡한 공식이 적힌 거대한 하나의 책이다. 그리고 이 것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미래의 사건이다.

이러한 불쾌한 결론에 맞닥뜨렸을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하는지 궁금했다. 몇 권의 인식, 그리고 의식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 이 책들은 모두 상당한 두께였다. 대부분 서구의 주류 과학, 이성주의를 옹호하는 저자들의 책은 다분히 반종교적, 무신론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최근의 뇌를 정밀 스캔할 수 있는 기술의 발달과, 인공지능 모델의 등장으로 한껏 고무된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과학의 진보가 많은 개인차원과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도 그것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위에서 내가 우려한 끔찍한 사건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찾기 어려웠다. 모두들 아주 짧게 다루거나, 얼버무린다. 의식을 원자 단위로 분해하던 그들은 그 원자들과 의식이 등호인지 여부는 결론내리지 못한다. 이래저래 쓸만한 답을 찾지 못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입자 단위로 분해된 인간 의식의 비인간성 문제다. 우리는 그간 ‘인간다움’을 과학과는 별개의 영역이라 생각해왔다.

나는 ‘인간다움’이 완벽히 인과적으로 해석된다면 이것이 우리의 뇌 속이 아닌 새로운 위치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 같다. 세상의 물질적 인과관계 외의 다른 층위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또 다윈의 진화론이 인류의 탄생 과정을 아주 훌륭하게 설명하지만 인류가 왜 탄생해야 했는가는 설명하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의식의 바닥 까지 샅샅히 알아낸다고 해도 의식이 왜 탄생했는지는 알아내지 못할 수 있다. 현재를 환원적으로 알아낼 수는 있지만 인간, 혹은 생명이 탄생한 수십억년 이전까지의 모든 시간을 낱낱히 상세하게 분해하거나 정보를 얻을 수는 없다. 또 인간성 자체를 뇌나 의식, 그리고 각 생명 개체 내 하나의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체 (인간 뿐 아니다) 간의 상호작용, 유대감, 공존을 위한 노력 등으로 확대 시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도피처이지만 그것이 진실일 가능성을 탐색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주적 의식의 일부로 동작하는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캔버스 위의 그림을 정밀하게 분석해 원작과 똑같이 만드는 작업이 진일보하고 있다. 어떤 경우는 정밀 스캐너나 투사 기술로 칠해진 물감의 양감이나, 서로 다른 색으로 덧칠된 부분까지 동일하게 재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왜 그림에 감동을 느끼는가, 사람마다 왜 감동을 느끼는 방식과 개개인에게 받아들여지는 의미가 다른가는 과학의 영역에 가둘 수 없다. 이 것은 그림을 원자 단위로 판다고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이는 단순히 나와 그림이 만나는 순간의 정보 뿐 아니라 작가의 삶과 같은 존재하지 않는 정보를 같이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을 동일 시간에 원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가정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으나 인간의 이성이 존재하는 계위에서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이것이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가 이런 인간다움의 중요한 부분을 만드는 것이다. 이 것은 현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인간이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거나 기대할 수 있는 한 기술이나 원자적 분해에 쫓기지 않고 영원히 계속 될 수 있지 않을까? 즉, 의식은 현재에 머무르지 않으며 시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다.

정리하면, 의식이 상자 속의 인형처럼 내 머리 속에 모두 담기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 같다. 내 몸 밖, 거대한 흐름의 일부를 순간 인식하는 도구로서의 의식은 할 수 있으나 그 단독으로는 분해하면 아무것도 남지않은 철저히 원자적 집합체일 가능성이 커보인다. 그리고 하루하루 보낼 수록 더 아름다운 것은 이 거대한 흐름을 대상으로 한 냉철한 이성과 인식이 아닌 내게 주어진 의식을 이 흐름에 담구었을 때 느껴지는 온기와 에너지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술관 나들이

과천으로 이사 온 후, 휴가를 쓰는 날 오전에는 미술관에 방문한다. 가까이 있는 것은 과천 현대미술관 본관으로 총 3층 전시관에서 6개월 남짓마다 새로운 전시를 선보인다. 따라서 몇 개월에 한 번 있는 공휴일이 아닌 나만의 휴가일에는 매번 새로운 전시를 볼 수 있다. 물론 마음이 가는 전시도 있지만 관심이 없거나, 너무 현대적이거나 전위적이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시들도 있다. 하루 전날 어떤 전시를 하는지 미리 홈페이지에서 확인한다.

홈페이지 주소이자 과천 현대미술관의 약자 표기는 MMCA라고 쓴다. 이것은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s를 줄여 쓴 것이다. 여기서 ‘Modern’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 정도를 의미하고, ‘Contemporary’는 말 그대로 20세기 말부터 현재까지의 ‘동시대’를 뜻한다. 따라서 이름으로 보면 이 미술관은 주로 19세기부터 현재까지의 미술을 전시한다. Modern은 사전적 의미로는 현대이지만 ‘동시대’는 아닌 특정 시대를 지칭하는 말로 살짝 의미가 틀어져서 재미있다.

현대미술관은 과천관이 본관이다. 덕수궁, 서울, 청주 등 다른 미술관보다 가장 먼저 생기기도 했고, 가장 규모가 크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국립미술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많은 시설물들(올림픽공원이나, 잠실주경기장, 미사리조정경기장과 과천경마공원)과 마찬가지로 아시안게임, 올림픽을 앞두고 1986년 건축, 개관하였다. 아마 대한민국도 스포츠와 예술을 즐기는 선진 국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으리라. 내가 초등학생 때 종종 방문했던 기억이 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백남준의 다다익선에 압도되었었다.

이번 5월 연휴 시작에도 미술관을 방문했다. 아침 운동이 끝난 후 동네 김밥집에서 가장 저렴한 김밥 한 줄을 샀다. 김밥 봉지를 자전거 핸들에 끼운 다음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옆 샛길로 달린다. 아파트 단지 사이 길을 지나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꺾으면 5분 만에 서울대공원리프트가 출발하는 건물이 나온다. 여기부터는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없으니, 자전거 거치대에 묶어 놓는다. 방치된 자전거가 가득하더니 웬일로 넓은 거치대에 자전거가 한두 대 뿐이다. 현대미술관 과천관은 교통이 불편하다고 욕을 먹지만, 반면 이렇게 평일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쾌적한 관람 환경이 보장되기도 한다.

3800원의 김밥 한 줄을 한 손에 들고 숲길을 지나 다리를 건너, 일본 원숭이 가족의 안부를 확인한 후 미술관 앞에 도착한다. 한국에서 가장 큰 미술관이 자전거로 5분 남짓 거리에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조금 일찍 어린이날 나들이를 나온 가족, 체험 학습을 나온 중고생들도 동물원 앞, 미술관 앞이 가득하다. 연휴의 시작은 다들 즐겁다. 미술관에서는 5월 1일부터 새로운 전시를 선보였는데, “한국근현대미술1″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 초반부터 전쟁 이후의 삶을 그린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건희 회장의 기부로 풍부해진 컬렉션을 자랑하는 본격 전시이다.

“한국근현대미술1″은 향후 2년 정도 전시될 예정이다. 따라서 이는 기획전이라기보다는 상설 전시에 가깝다. 팸플릿에도 전시 종료 일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예전 상설 전시에는 관람료를 받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관람료 3,000원을 받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수익을 내기 위해 사실상 관람료 정책을 바꾼 것과 같아 보인다. 물론 3,000원의 전시료로 관람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큰 혜택이다. 요금을 더 높게, 자주 받고, 이 수익으로 다양한 전시를 선보이는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전시 내내 보인 관람자 수를 봤을 때 이마저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나에게는 유튜브를 보거나, 멋진 경치 속을 하이킹하거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을 보는 것보다는 재미있지는 않다. 도파민이 분출하지 않는다. 평면의 화폭에 담긴 이야기는 깊이 있는 서사나 원근감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신선한 초록 잎 내음이나 빨려 들어갈 듯 솔깃한 이야기가 들리지도 않는다. 음식으로 따지면 밋밋한 콩국수마냥, 자극적이지 않고 또 오랫동안 즐길 만한 것 같지도 않다.

반면 작가와 내가 다른 어떤 자극적 요소 없이 얇은 캔버스 하나를 매개로 정서적 공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예술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매력이다. 소설은 글과 글자, 음악은 소리와 리듬, 동영상은 자막, 음성, 그리고 변화하는 프레임을 매개로 한다. 소설은 표지와 종이로 구성된 책, 라이브 음악 (내가 주로 듣는 클래식 장르)은 오케스트라, 동영상은 스크린이라는 매개물이 있다. 그림은 작가의 손길이 내 마음에 닿는다. 무한한 해석과 상상으로 작가와 나를 시공간 어느 곳에든 위치시킬 수 있다.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나 중심의 해석이 가능하다.

이 해석은 전적으로 나의 몫으로 오디오 가이드나 전시 팸플릿, 작품과 나란히 붙어 있는 해설은 작성자의 것일 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나는 작품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 심상에서 출발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의 정보를 많이 얻을수록 올바른 감상은 아닌 것 같다. 감상의 시작은 ‘나’여야 한다. 그래서 유명한 작품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작품과 사조를 찾아내고 이 위주로 감상을 해보려고 한다. ‘맛 칼럼니스트’가 의미가 없는 것처럼, 예술에서의 ‘평론가’도 나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또 하나의 감상법은 작가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작가는 무엇을 찬미하거나 무엇을 알리고 싶어 한다. 작가가 본 풍경이나 사랑하는 여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리고 싶어 붓을 들기도 한다. 또 내가 들은 이야기가 크게 비극적이라 절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게 직접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또 은근히 감춰져 있는 경우도 있다. 이에 공감하거나, 혹은 숨겨진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있다. 이 전시에서 금강산을 그린 다양한 산수화들을 보고 있자니 ‘금강산 혹은 세상이 아름답다’ 다들 외쳐대는 콘서트장에 온 느낌이다.

맥락에서 약간 벗어나 다양한 동양의 산수화를 보고 있자니 약간 역설적인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흐름과 에너지를 가진 동적인 요소, 예를 들면 구름이나 계곡물, 폭포들은 오히려 공백으로 표현하고, 가만히 멈춰 있는 정적인 요소들, 예를 들면 바위나 나무, 정자 같은 것은 오히려 세밀한 몇 겹의 붓 터치로 표현한다. 따라서 서로 강렬한 대비를 느끼게 한다. 역동적인 것을 ‘무’로 그리고, 정적인 것을 큰 질감으로 그린다. 이는 동양과 서양의 대비로도 볼 수 있다.

다시 돌아와 더 나아가면 예술은 내가 정의한 예술부터 시작, 또는 시작은 예술을 정의하는 것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이 예술인지는 온전히 감상자가 정의할 수 있다. 양재천에 핀 야생화 한 송이가 예술일 수도 있고 대가의 일생의 작품만 예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술사나 미술사에서 정의한 예술에 도저히 동의가 안 된다면, 내 나름대로의 예술을 정의하고 거기 포함된 작품만 감상할 수도 있겠다. 나는 폭넓게 인간 생존을 위함이 아니라 유희를 위해 만들어낸 결과물, 혹은 요소들은 모두 예술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두 시간 정도를 들여 나만의 정의와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전체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전시를 시대순으로 구분하고 작품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지호나 이중섭 같은 작가의 작은 전시실을 따로 마련한 기획이 좋았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큐레이터들도 새로운 시도를 통해 지루한 전시의 틀을 깨려 노력한다.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비극적 생애가 표현된 이중섭의 편지 등도 같이 전시하고 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1층에는 예술 서적 도서실이 있다. 정식 명칭은 ‘미술 도서실’이지만 건축과 같은 다른 예술 서적도 소장되어 있다. 매표소 왼쪽, 무료 짐 보관함이 있는 곳으로 가면 입구를 발견할 수 있다. 오직 평일에만 운영하고, 거의 사람이 방문하지 않은 곳이다. 예술에 파묻혀서 하루 종일 보낼 수 있는 비밀의 장소이다. 이곳에 잠시 들러 베르메르와 샤갈에 대한 책을 잠깐 넘겨 보았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한 작품을 가지고 쓴 책 한 권이 있다.

아, 최근에는 과천 사기막골에 호반 아트리움이라는 새로운 미술관이 개장한 모양이다. 천천히 걸어서 다녀올 만한 거리여서 방문해보려고 한다. 현대미술관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미술관들이 생겨서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