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나들이

과천으로 이사 온 후, 휴가를 쓰는 날 오전에는 미술관에 방문한다. 가까이 있는 것은 과천 현대미술관 본관으로 총 3층 전시관에서 6개월 남짓마다 새로운 전시를 선보인다. 따라서 몇 개월에 한 번 있는 공휴일이 아닌 나만의 휴가일에는 매번 새로운 전시를 볼 수 있다. 물론 마음이 가는 전시도 있지만 관심이 없거나, 너무 현대적이거나 전위적이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시들도 있다. 하루 전날 어떤 전시를 하는지 미리 홈페이지에서 확인한다.

홈페이지 주소이자 과천 현대미술관의 약자 표기는 MMCA라고 쓴다. 이것은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s를 줄여 쓴 것이다. 여기서 ‘Modern’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 정도를 의미하고, ‘Contemporary’는 말 그대로 20세기 말부터 현재까지의 ‘동시대’를 뜻한다. 따라서 이름으로 보면 이 미술관은 주로 19세기부터 현재까지의 미술을 전시한다. Modern은 사전적 의미로는 현대이지만 ‘동시대’는 아닌 특정 시대를 지칭하는 말로 살짝 의미가 틀어져서 재미있다.

현대미술관은 과천관이 본관이다. 덕수궁, 서울, 청주 등 다른 미술관보다 가장 먼저 생기기도 했고, 가장 규모가 크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국립미술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많은 시설물들(올림픽공원이나, 잠실주경기장, 미사리조정경기장과 과천경마공원)과 마찬가지로 아시안게임, 올림픽을 앞두고 1986년 건축, 개관하였다. 아마 대한민국도 스포츠와 예술을 즐기는 선진 국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으리라. 내가 초등학생 때 종종 방문했던 기억이 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백남준의 다다익선에 압도되었었다.

이번 5월 연휴 시작에도 미술관을 방문했다. 아침 운동이 끝난 후 동네 김밥집에서 가장 저렴한 김밥 한 줄을 샀다. 김밥 봉지를 자전거 핸들에 끼운 다음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옆 샛길로 달린다. 아파트 단지 사이 길을 지나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꺾으면 5분 만에 서울대공원리프트가 출발하는 건물이 나온다. 여기부터는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없으니, 자전거 거치대에 묶어 놓는다. 방치된 자전거가 가득하더니 웬일로 넓은 거치대에 자전거가 한두 대 뿐이다. 현대미술관 과천관은 교통이 불편하다고 욕을 먹지만, 반면 이렇게 평일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쾌적한 관람 환경이 보장되기도 한다.

3800원의 김밥 한 줄을 한 손에 들고 숲길을 지나 다리를 건너, 일본 원숭이 가족의 안부를 확인한 후 미술관 앞에 도착한다. 한국에서 가장 큰 미술관이 자전거로 5분 남짓 거리에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조금 일찍 어린이날 나들이를 나온 가족, 체험 학습을 나온 중고생들도 동물원 앞, 미술관 앞이 가득하다. 연휴의 시작은 다들 즐겁다. 미술관에서는 5월 1일부터 새로운 전시를 선보였는데, “한국근현대미술1″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 초반부터 전쟁 이후의 삶을 그린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건희 회장의 기부로 풍부해진 컬렉션을 자랑하는 본격 전시이다.

“한국근현대미술1″은 향후 2년 정도 전시될 예정이다. 따라서 이는 기획전이라기보다는 상설 전시에 가깝다. 팸플릿에도 전시 종료 일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예전 상설 전시에는 관람료를 받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관람료 3,000원을 받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수익을 내기 위해 사실상 관람료 정책을 바꾼 것과 같아 보인다. 물론 3,000원의 전시료로 관람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큰 혜택이다. 요금을 더 높게, 자주 받고, 이 수익으로 다양한 전시를 선보이는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전시 내내 보인 관람자 수를 봤을 때 이마저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나에게는 유튜브를 보거나, 멋진 경치 속을 하이킹하거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을 보는 것보다는 재미있지는 않다. 도파민이 분출하지 않는다. 평면의 화폭에 담긴 이야기는 깊이 있는 서사나 원근감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신선한 초록 잎 내음이나 빨려 들어갈 듯 솔깃한 이야기가 들리지도 않는다. 음식으로 따지면 밋밋한 콩국수마냥, 자극적이지 않고 또 오랫동안 즐길 만한 것 같지도 않다.

반면 작가와 내가 다른 어떤 자극적 요소 없이 얇은 캔버스 하나를 매개로 정서적 공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예술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매력이다. 소설은 글과 글자, 음악은 소리와 리듬, 동영상은 자막, 음성, 그리고 변화하는 프레임을 매개로 한다. 소설은 표지와 종이로 구성된 책, 라이브 음악 (내가 주로 듣는 클래식 장르)은 오케스트라, 동영상은 스크린이라는 매개물이 있다. 그림은 작가의 손길이 내 마음에 닿는다. 무한한 해석과 상상으로 작가와 나를 시공간 어느 곳에든 위치시킬 수 있다.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나 중심의 해석이 가능하다.

이 해석은 전적으로 나의 몫으로 오디오 가이드나 전시 팸플릿, 작품과 나란히 붙어 있는 해설은 작성자의 것일 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나는 작품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 심상에서 출발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의 정보를 많이 얻을수록 올바른 감상은 아닌 것 같다. 감상의 시작은 ‘나’여야 한다. 그래서 유명한 작품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작품과 사조를 찾아내고 이 위주로 감상을 해보려고 한다. ‘맛 칼럼니스트’가 의미가 없는 것처럼, 예술에서의 ‘평론가’도 나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또 하나의 감상법은 작가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작가는 무엇을 찬미하거나 무엇을 알리고 싶어 한다. 작가가 본 풍경이나 사랑하는 여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리고 싶어 붓을 들기도 한다. 또 내가 들은 이야기가 크게 비극적이라 절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게 직접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또 은근히 감춰져 있는 경우도 있다. 이에 공감하거나, 혹은 숨겨진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있다. 이 전시에서 금강산을 그린 다양한 산수화들을 보고 있자니 ‘금강산 혹은 세상이 아름답다’ 다들 외쳐대는 콘서트장에 온 느낌이다.

맥락에서 약간 벗어나 다양한 동양의 산수화를 보고 있자니 약간 역설적인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흐름과 에너지를 가진 동적인 요소, 예를 들면 구름이나 계곡물, 폭포들은 오히려 공백으로 표현하고, 가만히 멈춰 있는 정적인 요소들, 예를 들면 바위나 나무, 정자 같은 것은 오히려 세밀한 몇 겹의 붓 터치로 표현한다. 따라서 서로 강렬한 대비를 느끼게 한다. 역동적인 것을 ‘무’로 그리고, 정적인 것을 큰 질감으로 그린다. 이는 동양과 서양의 대비로도 볼 수 있다.

다시 돌아와 더 나아가면 예술은 내가 정의한 예술부터 시작, 또는 시작은 예술을 정의하는 것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이 예술인지는 온전히 감상자가 정의할 수 있다. 양재천에 핀 야생화 한 송이가 예술일 수도 있고 대가의 일생의 작품만 예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술사나 미술사에서 정의한 예술에 도저히 동의가 안 된다면, 내 나름대로의 예술을 정의하고 거기 포함된 작품만 감상할 수도 있겠다. 나는 폭넓게 인간 생존을 위함이 아니라 유희를 위해 만들어낸 결과물, 혹은 요소들은 모두 예술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두 시간 정도를 들여 나만의 정의와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전체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전시를 시대순으로 구분하고 작품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지호나 이중섭 같은 작가의 작은 전시실을 따로 마련한 기획이 좋았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큐레이터들도 새로운 시도를 통해 지루한 전시의 틀을 깨려 노력한다.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비극적 생애가 표현된 이중섭의 편지 등도 같이 전시하고 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1층에는 예술 서적 도서실이 있다. 정식 명칭은 ‘미술 도서실’이지만 건축과 같은 다른 예술 서적도 소장되어 있다. 매표소 왼쪽, 무료 짐 보관함이 있는 곳으로 가면 입구를 발견할 수 있다. 오직 평일에만 운영하고, 거의 사람이 방문하지 않은 곳이다. 예술에 파묻혀서 하루 종일 보낼 수 있는 비밀의 장소이다. 이곳에 잠시 들러 베르메르와 샤갈에 대한 책을 잠깐 넘겨 보았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한 작품을 가지고 쓴 책 한 권이 있다.

아, 최근에는 과천 사기막골에 호반 아트리움이라는 새로운 미술관이 개장한 모양이다. 천천히 걸어서 다녀올 만한 거리여서 방문해보려고 한다. 현대미술관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미술관들이 생겨서 만족스럽다.

계절과 세기 속에서 나를 바라보기

나는 끊임 없이 계획을 세운다. ‘계획 강박’. 이런 말이 널리 쓰이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표현하기에는 적절한 단어다. 오늘은 내일의 일을 생각하고, 내일은 주말의 일을 생각한다. 물론 주말에도 다음 달의 일을 생각한다. 계획을 세우려면 정보를 알아야 한다. 내가 주문한 옷이 옥천 Hub에 있는지 의왕에서 출발하는 택배차에 실려 있는지 알아야 한다. 도착할 곳의 주차장을 확인하지 않고는 차에 시동을 켤 수 없다.

계획대로 되어 가는지, 지금 계획대로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는지 끊임 없이 살피려면 많은 에너지가 든다. 요즘은 ‘주의’ (Attention), 주의 자본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주의는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며 한시도 잠자코 있지 못한다. 세 개의 모니터에 펼쳐져 있는 열 개의 윈도우를 넘나들며 바삐 움직이는 마우스 커서를 생각해보자.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주의의 바쁜 이동이 필요하고, 이는 현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오히려 주로는 하루와 시간, 한달과 요일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주의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측정하고 미래를 예측한다. 세 가지 시점의 정보를 알 수 있으면 우리는 현재를 미분하여 계획을 만들 수 있다. 계획을 더욱더 정확하고 실패 없이 세우려는 강박 때문에 현재의 방향과 가속도를 끊임 없이 반복해서 측정한다.

따라서 불안해진다. 이 불안의 원인은 예측 실패의 두려움이다. 예측한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내가 원하고 당연히 가지리라 생각했던 것을 잃게 된다. 주로는 돈의 손해, 자존감의 손해, 시간의 손해가 예상된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계획을 잘 세우면 이러한 손해를 최소화 할 수 있으리라 나는 기대한다. 하지만 이러한 충실한 계획의 반대 급부로 그만큼 충실한, 촘촘한 불안이 따라오게 된다. 늘 계획대로 되지 않을지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찬 삶이 되어 버린다. 불안이 현실이 되었을 때의 분노는 덤이다.

불안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 나 뿐 아니라 현대인은 큰 불안 속에 산다. 하지만 과거라고 달랐던 것은 아니다. 불안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불안을 통해 조금이라도 생존할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던 진화의 산물이다. 불안을 느끼지 않는 인류는 사자 밥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현대는 극단적인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회는 아니다. 그러므로 조금 다른 해법을 찾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에 대비하는 최악의 경우는 계획을 확장하는 것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을 대비한 또 다른 계획을 세우거나, 계획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부분까지 고민하며 계획의 사슬을 끊임없이 늘려나간다. 당연히 불안은 더 커진다. 나의 경험 상 엑셀 파일의 시트를 늘려 만든 플랜 A, 플랜 B는 잠시 안심을 준다. 하지만 다시 이 플랜들을 점검하느라 스믈스믈 불안이 밀려든다. 생각 끝에 다른 접근을 하기로 했다. 불안을 계획으로 대처하면 안된다.

현재는 흘러가는 것이다. 내가 손댈 수 없다. 현재를 인식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과거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만드는 것이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고 있는 현재의 나는 약간의 응원과 함께 그대로 내버려두기로 한다.

계절 속에서 나를 바라 보는 것이 좋겠다. 나는 봄이 오듯 금방 바뀌는 것 같지만 일 년이 지나보면 또다시 봄이다. 다만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것이 또렷해진다. 조급함이나 초조함은 버리고 무엇이 계획대로 되었는지를 여유를 가지고 살펴봐야 한다. 내가 현재의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계절을 보낸 나와 그 전의 나를 바라봐야 한다. 옛사람들은 ‘절기’, 1년을 24번으로 나눈 계획이 있었고, 이 계획은 매년 그렇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임기응변’은 나쁜 말이 아니다. 계절의 계획이 있다면, 매번 상황에 맞닥뜨린 선택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계획을 세우는 노력, 계획을 점검하는 불안보다 더 효율적으로 주의를 쓸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열어줄 수 있다. 변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연습하는 것이 ‘임기응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때로는 나 자신을 세기(世紀) 속에서 봐야 한다. ‘세기’를 역사 속에서 끄집어 내어 내 인생을 설계할 때 이용해보면 좋겠다. 내 인생이 앞으로 반 세기 정도 남았다면 죽기 전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고 그 계획에 따라 산다면 당장의 불안은 없을 수 있다. 이러한 거시 계획이 잘못된다면 죽기 전에 큰 후회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 후회도 이미 곧 과거가 될 것이고, 우리 모두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후회조차 세상에서 소멸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삶을 산다. 수만 개의 계획을 사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