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루 하루를 버티는 힘은 앞으로는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실제로 나아진 것을 체감하는 데서 온다. 기대도 충분하고 체감도 충분할 때 그럭저럭 버텨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아파트 평수 늘리다가 젊음이 다 갔다’는 많은 한국 사람들의 한탄이 아닌게 아니라 ‘아파트 평수’로 상징되는 주거 환경의 개선의 체감이라도 있어야 아침 6시반에 일어나서 추운 현관 문 앞을 나설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요즘 이 체감이 어렵다. 왜냐하면 나라는 사람은 이 체감에도 시간을 충분히 쓸 수 있는 여유로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식이 풍요로워진 것을 알기 위해서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이 필요하고, 체력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기 위해선 운동이 필요하다. 유머나 사교가 늘었다 한들 대화와 친목이 없으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만히 누워서 음악을 들으며 유체 이탈을 통해 내 1m 위에서 나를 살펴보는 시간을 통해 내가 나아졌다는 것을 안다.
내게 또 이 시대를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속도로 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직 가능한 것은 소비를 통한 체감 뿐이다. 이것은 위에서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길 밖에 찾을 수 없는 많은 사람들과 내가 공통으로 가진 딜레마이다. 소비는 진득한 시간이 필요없이 즉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곳에서 자고, 좋은 차를 타고, 나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곳에 간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나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돈이 나를 나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는 것에 돈을 쓴다.
노동과 소비 만을 무한히 반복하는 삶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삶의 진정한 의미와 행복을 노동과 이를 통해 벌어들인 재화의 소비에서 찾는다. 소위 ‘노비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내 문제 의식은 현대 사회는 노동과 소비의 쳇바퀴를 도는 삶 이외의 삶을 사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가 더 느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만 그 과실을 나누어주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더 효율적이고 빠르게 만드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지불해야 할 실질적인 비용과 상대적 박탈감과 불안이 매우 크다. 스스로 느린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비교적 따뜻한 공간을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이것이 완전한 낭비가 아니며 사회를 유지 시키는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