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일회용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딱히 환경을 보호하자는 목소리에 공감하거나, 국가 경제를 위한다는 생각은 없다. 곰곰히 생각해봐도 적절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말이 떠오르진 않는다. 그냥,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새로운 것을 가지고 그렇게 짧은 시간동안 사용하고 영원히 그 ‘가치’를 폐기 시킨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내 머리는 그렇게 단기간에 의미를 가지고 또 영원히 삭제되는 그런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종이컵을 집어들고,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신 후에 버리기 전에 망설이는 것이다. 뭐, 무슨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내 책상위에는 늘 종이컵이 쌓여있고,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것이 몇날 며칠에 걸쳐서 입증되고 나서야 큰 마음을 먹고 쓰레기통으로 보낸다.
왠지 이러한 조그만 녀석들의 삶에도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훌륭하게 성장했고, 어떻게 드라마틱하게 활약을 했으며, 무엇인가를 위해 장렬히 최후를 맞았다. 쓰레기통 속에서도 이 녀석이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주위 친구들에게 이야기 했으면 좋겠다. 고작해야 내가 버린 이 녀석이 “정수기의 물을 몇 초간 담기 위해서 세상에 존재했었다” 라는 무미 건조한 말을 하면서 자기의 삶을 요약하는 것, 또 내가 그렇게 사용했다는 것은 종이컵 자체에게나, 또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거쳐야 했을 수많은 과정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토테미즘이나 이런 걸 바탕으로 생각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냥 세상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넘쳐나기를 바라는 사람 중에 한명이다.
비슷한 관점에서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고 ‘일회성’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Talking이 아니라 Story다. 거대하고 빽빽하게 밀려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에 영향 받지 않는 하나의 Channel이 너와 나 사이에 뚫려있기를 바란다. 그 Channel을 통해 예전의 기억이 현재의 사건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의 행동이 미래의 너와 나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상호작용을 상상해보자. 기적과도 같은 만남에 이어서 다시 만나고 떨어지고를 반복한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아름다운 매듭들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서 인생이 보다 풍요로워 지도록 돕는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Channel을 ‘사랑’ ‘우정’ ‘가족’등으로 한정시키는 것보다는 더~ 많은 범위로 확장하면 그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넘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 현실적으로 없을 수 없는 그 ‘일회용품’ 만남에 대해서 나는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부쩍 사회적인 활동을 늘리려는 노력에 발 맞추어 이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누군가가 편리함을 위해 ‘일회용품’을 만든 것 처럼 이러한 ‘만남’도 만들어 낸 것이라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으련만, 새로운 누군가를 많이 만날 수록 다음에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될 가능성은 더 적어지는 당연한 현상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시간을 소비해서 익숙함으로 적당히 가린채 살아야 하는 건지, 혹은 다른 사람이 그러한 노력을 대신하도록 성장해야 하는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