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그리고 생각함, 말함.

생각하고, 말한다.
상대는 듣고, 생각한다.

이로서 하나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휘정씨, 휘정님, 휘정군.

그러다가 내가 상대를 마음 한구석에 넣는다.
상대가 나를 마음에 넣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그럴꺼라고 생각한다. 확인할 길은 없다. 말하고, 생각하는 것으로는 항상 부족하다.

하지만 이로써 조금 편해진다.
휘정아, 휘정이, 휘정!

좋다. 이런 말을 듣는건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나를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모두와 같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외토리가 아니다. 물론 남도 나와 마찬가지 일꺼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마음속에 더 이상 넣을 공간이 없는 사람이 새로 무언가를 넣고 싶어한다. 하나를 버려야한다. 그게 내가 되질 않기를 바란다. 아니 대체적으로 바랄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다행한 경우라면..
삼각형에서 하나의 선이 빠지면 직선이 된다.

불운한 경우라면..
나에게서 뻗어나간 ‘관계’가 그 끝을 잃어버리고 허공을 떠돌기 시작한다. 나는 거둬들이기 시작한다. 불안정함을 없애고 싶어서 마음은 급하다. 힘든일이지만 늘 있는 일이다.

때로는 내가 내 속의 남을 버려야 하는 일도 생긴다. 대체적으로는 아주 쉬운일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설정한 ‘관계’를 그냥 끊으면 된다. 그는 내 마음속에 그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나쁜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쁘다고 해도 없앨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거다.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는 대가로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정해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주위의 벽을 두껍게 쌓나보다.
가벼운 누군가가 내 속에 흔적을 남기는 걸 원치 않아서..

나만의 유전자론.

어쩔수 없이 사람을 관찰하게 해야 하는 때가 있다.
지하철의 의자 구조가 그렇고, 옆으로 늘씬한 여학생이 지나갈때가 그렇고, 또 누가 우리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도 그러하다.

눈으로 사람의 모습이 각인되면 머리속으로는 늘 그것을 (의견을 덧붙인) 몇가지 묘사로 풀어내곤 하는데, 이를테면
저 아저씨의 쳐진 뱃살은 참 보기 안좋은데“, 혹은
볼살이 조금 더 붙어야 얼굴형이 이쁘겠는걸” 또는
저런 눈은 초등학교 동창 누구를 닮았군

재미있는건 간혹가다 이런 묘사가 거의 흡사하게 반복된다는 사실.
일 예로 내가 “XX누나 얼굴형” 이라고 부르는 (물론 마음속으로 부르지 입밖으로 낸적은 없다) 얼굴형과 흡사한 묘사를 하게 되는 사람을 한달에 한번정도는 꼭 어디선가 마주치게 된다. 그럴때마다 참 만났던 사람 처럼 반갑고 한데, 물론 혼자 생각이다;

이런 경우를 자주 겪다보니 그러한 “XX누나 얼굴형” 이라는 복잡하고 어쩌면 인권침해적인 요소도 발견할수 있는 묘사를 “네모얼굴 미간좁고 눈쳐진 얼굴 유전자”, (뭐 사실 이렇게 복잡한 경우는 별로 없지만 예를 들면 이런거고) 등으로 다시 바꿔부르는 수고스럽지만, 지하철에서 손잡이 붙들고 있을때는 하기 좋은 작업들을 즐겨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나만의 유전자론 분류가 쌓이고 쌓여서 왠만한 사람을 신체특징은 적절하게 “어느 유전자가 한 60%, 나머지 40%중 30% 정도는 무슨 유전잔데.. 나머지는 잡다한게 섞였군” 처럼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시간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보니, 마치 정말 그럴싸한 이론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수십만년전의 털북실북실 팔가죽 유전자는 오늘날까지 전해져서(정도는 약하지만) 주위의 누구누구의 팔에서 그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