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책을 읽는 법

나는 일 년에 40권 정도의 책을 읽는다. 아들이 태어난 해에도 30권의 책을 읽었다. 밤새 잠든 아이 옆을 지키는 일이 많아 우려했던 것만큼 책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이때는 아이가 규칙적으로 숨소리를 내며 꿈나라로 갈 때까지 희미한 독서등 아래서 책을 읽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어느덧 40여 년 책을 읽어오면서 나만의 책을 읽는 방법이 완고하게 생겼기에 몇 가지 적어보려고 한다.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일은 거의 없기에, 책은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그래서 집을 구할 때 도서관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중요하게 여긴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큰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도시가 만족스럽다. 걸어갈 수 있는 큰 도서관이 두 곳에 있다. 토요일 아침에 운동을 하고 점심을 먹기 전에 늘 도서관에 간다. 일주일 동안 읽은 책을 반납하고, 읽을 책을 빌려온다.

읽을 책, 읽는 책, 읽은 책은 모두 기록한다. 그 전에는 이런 습관이 없었다. 10여 년 전, 언젠가부터 내가 읽은 모든 책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예전 언젠가 읽고 있는 책이 너무 익숙해서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보니 이미 수 년 전에 읽었던 책이었다. 그때부터는 읽는 것을 시작할 때, 그리고 다 읽거나 중도에 포기할 때 기록을 한다. 일 년 동안 몇 권을 읽었는지 세어보기도 편하고, 나의 독서 취향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기도 편한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한 감상평을 남겨 놓기도 한다.

책 속에서 다음 읽을 책을 찾는다. 예전에는 무작정 도서관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 (새것이고, 표지 디자인이나 제목이 마음에 들고, 내 눈높이 즈음의 책장에 꽂혀있는)을 고르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읽고 있는 책이 마음에 든다면 책의 인용 부분이나 내용 중 언급되어 있는 책 혹은 작가의 작품 중에 다음에 읽을 책을 고른다. 한 분야에 대해서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게 되고, 도서관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읽을 책을 고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물론 특별히 다음 읽을 책을 찾지 못했다면 도서관 둘러보기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두세 권 정도의 책을 동시에 읽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잘 납득이 안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집중력 저하와 시간 부족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대응이다. 억지로 책을 읽을 수 없으니,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책을 읽을 환경을 잘 갖추어야 한다. 책을 읽는 상황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하나는 소파와 침대 독서이고 또 하나는 책상 독서이다.

소파와 침대 독서를 위해서는 소프트 커버나 페이퍼백으로 제본된 책을 고른다. 무게도 가볍고 내용도 가벼운 것을 읽는다. 읽다가 언제 잠들어도 괜찮고, 책을 덮고 생각할 시간이나 인터넷을 검색해볼 시간도 딱히 필요 없다. 대중교통을 탈 일이 있다면 가방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기도 좋다. 이런 책을 읽을 때는 문장, 문장을 뛰어다니듯 읽는다. 순식간에 문단을 읽고 축약한 내용만 머릿속에 보관한다. 소설이나, 자기 계발서, 수필, 입문서 등이 여기에 속한다. 휴식이 필요한 시간에 이런 독서를 한다.

반면 책상 독서는 엄숙, 근엄, 진지하다. 책상 (지금은 내 책상이 없으므로 주로 식탁) 에 정자세로 앉아서 읽는다. 적당한 Task Lighting이 필요하고,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주위에 잡동사니들은 모두 치워놓는다. 단어와 단어, 그리고 그 사이의 연결까지 꼼꼼하게 읽지 않으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책은 500페이지 이상의 하드커버들이 주를 이룬다. 사실 책의 제본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을 몇 차례 되풀이하여 읽기도 한다.

책상 독서를 위해서는 지적 도약이 필요한 책을 중심으로 읽는다. 나의 지적 도약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저자도 놀라울 정도의 지적 압축을 통해서 저술한 책이어야 한다. 가볍게 읽어서는 이해가 되지 않으며, 오랜 시간 걸쳐서 읽는다. 물론 저자도 오랜 시간 걸쳐서 쓴 책들이 많다. 지금 읽는 책 <사고의 본질>은 올해 봄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7개월을 넘겨 읽고 있다. 한 번 앉아서 읽을 때 10장을 읽기가 만만치 않다. 내 독서 목록에서 이런 책을 꼽아보자면, 같은 저자의 <괴델, 에셔, 바흐>, <위대한 지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멜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 <앙시엥 레짐과 프랑스 혁명>,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와 같은 책들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지식과 생각, 사상의 전달 체계가 있다. 특히 최근에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800페이지의 책, 50페이지 정도의 리포트(report), 20페이지 남짓한 논문, 5페이지 정도의 블로그 포스트, 몇 단락 정도의 ChatGPT 답변, 300자 미만의 X 포스트 (구 트위터)가 있다. 또 수십 시간 길이의 시리즈 다큐멘터리, 한두 시간 길이의 영화나 TV 프로그램, 수 분 정도의 광고나 유튜브(YouTube) 콘텐츠, 15초 내외의 숏폼 등 미디어(Medium)와 그에 따른 콘텐츠들이 넘쳐난다.

나는, 고루한 생각일지 몰라도 그 안에 담긴 생각 전체를 고스란히 전달받으려면 반드시 매개체가 책이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책을 읽는 데 쓰이는 시간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중고등 수준까지 배우고 익히게 되면, 그다음의 ‘지적 도약’을 위해 책 한 권 때로는 수 권이 필요하게 된다. 5페이지짜리 블로그 포스트 100개를 읽는 것과 500페이지짜리 책 한 권을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요구르트 한 병과 30년산 위스키 한 병만큼의 차이가 있다.

언제까지 지금처럼 책을 즐기고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지적 능력이 살아있는 한 꾸준히 읽고 즐기고, 또 지금처럼 쓰고 싶다. 다른 누구보다도 도서관 책상에 정자세로 앉아 흐트러짐 없이 수 시간이고 책을 읽는 할아버지들이 부럽다.

나보코프와 라벨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모리스 라벨이다. 소설 롤리타와 피아노 협주곡 G장조 2악장이기도 하다. 나는 롤리타를 읽으면 피아노 협주곡 G장조 2악장이 들리고 라벨의 곡을 들으면 롤리타가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십여년 전 우연히 이 소설과 음악을 함께 읽고 들은 후 이 둘은 음악이 나오는 그림책처럼 묶여 머리 속 서재의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놓였다. 그리고 두 작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서 꼭 주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롤리타라는 소설을 단순히 금기시 된 어른과 아이의 사랑, 그것도 육체적인 사랑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아마 소설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는 이 소설이 지금은 나에게서 사라져버린 찬란한 생명력에 대한 묘사로 바꿔 해석된다. 10대에 들어선, 육체적으로 성장을 마치고 성적 매력(reproduction)을 발산하기 위해 응축된 생명력을 폭발시키는 그 잠깐의 시기, 그것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나보코프의 글에 집중하면 한글자 한글자가 마치 피아니시모와 포르테의 강약을 가지고 아름다운 주제를 반복하는 악보인 듯하다.

피아노 협주곡 G장조 2악장의 주인공은 전면에 서있는 오케스트라의 관악기가 아니다. 사실 주인공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오른손이다. 작고 연약한 듯, 느리게 연주하는 높은 음들은 오케스트라가 내는 소리 속을 휘저으며 발레를 하는 무용수처럼 움직인다. 두 작품의 연결 고리는 오른손이 내는 소리들이다. 이 글리산도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Step down) 하는 소리들은 다시 나보코프의 첫 문장에 나오는 움직임으로 돌아와 멈춘다.

음악의 마지막에 그 유명한 첫 문장으로 소설이 시작되고 소설은 다시 롤리타의 움직임을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My sin, my soul. Lo-lee-ta: the tip of the tongue taking a trip of three steps down the palate to tap, at three, on the teeth. Lo. Lee. Ta. She was Lo, plain Lo, in the morning, standing four feet ten in one sock. She was Lola in slacks. She was Dolly at school. She was Dolores on the dotted line. But in my arms she was always Lolita.

아르헤리치나 미켈란젤리의 연주를 많이 듣지만 사실은 훨씬 더 느리게 한음 한음을 마치 타자기의 자판을 누르듯 해야 더 어울린다. 최근 캐천(Julius Katchen)의 연주를 들었는데 추천할 만하다. 유투브에는 적당한 동영상이 없어 그리모의 연주를 링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