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ist] Heavy handed (쓸데없이 엄격한)

New film: “The Great Gatsby”

May 17th 2013, 9:40 by N.B.

바즈 루어만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의 트레일러가 작년 공개 되자마자, 스콧 피츠제럴드의 이 위대한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빠르고, 번뜩이는지, 바즈 루어만 풍 모든 것들에 대해서 불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판은 영화 그 자체로도 누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댄싱 히어로”나 “물랑루즈”의 감속에게 우리들이 기대해왔던 것처럼 그의 “개츠비”는 재즈보다는 쿵쿵대는 힙합, 그리고 실제 촬영보다는 더 많은 CG들을 통해 화려하고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카메라들은 휙휙 제트 프로펠러를 단 것처럼 지나다니고 소용돌이 치며, 흥청망청 대는 파티는 리우 카니발을 무색케 한다. 소설에서 크립스프링거가 연주하는 피아노는 거대한 금빛 파이프 오르간으로 바뀌어 영화의 엠블럼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비록 “위대한 개츠비”는 랩 비디오와 향수 광고의 끔찍한 3D 결합을 닮았음에도, 그것의 근본적인 약점은 원작 소설에 대한 존경이 너무 과하다는데 있다. 루어만 감독은 비츠제럴드의 짧은 이야기를 웅대하고, 비극적인 오페라처럼 보고 있다. 또한 우리도 그런 방식으로 보게 하리라 결심했다.

그는 마지막 장의 대부분을 잘라냈지만, 그 외에는 원작의 모든 부분을 스크린으로 옮겨놨다. 젊은 채권 판매인인 닉 케러웨이(토비 맥과이어)는 1920년대 초반 롱 아일랜드에 있는 작은 집을 빌리고, 그 이웃의 궁궐 같은 맨션에는 신비에 싸인 제이 게츠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살고 있다. 게츠비는 케러웨이의 사촌이자 우락부락한 귀족 남편 톰(조엘 에저턴)과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데이지(케리 멀리건)을 짝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대부분은 이야기가 전개 되는 것 뿐 아니라, 케러웨이가 이들을 묘사하는 나레이션을 들려준다. 몇 군데서는 피츠제럴드의 실제 글이 3D 자막으로 화면에 뿌려지기도 한다. 우리가 내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 루어만 감독은 캐릭터들이 그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분명히 이야기 해주거나, 또 케러웨이가 그 시대의 경제 상황이 어떤지를 가르쳐주는 추가적인 대화를 삽입하기도 했다.

감독은 의욕 과잉의 학생처럼 다가온다, 따라서 우리의 옷깃을 움켜쥐거나 모든 것들의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나 중요한지를 소리쳐서라도 우리가 원작의 진가를 알아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결과물인 2시간 30분짜리 영화는 학교 학생들이 원작을 공부할 때는 요긴할 것이다. 모든 의문에 대답하고, 모든 빈칸을 채워준다. 하지만 피츠제럴드의 원작이 가진 애매함과 미묘함은 사라져버렸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는 원작의 각색이기도 하고, 각주이기도 하다.

루어만 감독이 그의 관객과 배우들에게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물러나서 그저 스토리가 전개되도록 내버려두었으면 많은 것들이 더 나았을 것이다. 특히 디카프리오는 그의 골든 보이로서의 매력으로 모두를 사로잡는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개츠비를 연기했다. 하지만 항상 다물어진 그의 턱과 주위를 살피는 작은 눈은 이러한 것이 발각될까 두려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멀리건은 묘한 매력이 있는 창백하고 가녀린 데이지를 연기했고, 에저턴은 킹콩과 같은 몸의 톰 뷰케넌 그 자체였다. 하지만 관객들은 루어만 감독이 끼어들어 집중하고 있는지 확인하지 전까지, 캐릭터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아마 감독도 이 소설에 대해 개츠비가 데이지에게 느꼈던 것 과 같은 경이롭고 신비로운 사랑을 느꼈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만약 케러웨이가 조금 더 개츠비를 부정적으로 보고 거리감을 두었더라면 감독이 가진 소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그 자체로 좋은 영화 한편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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