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세차 당번은 나다. 차를 새로 산 지는 2년 쯤 되었다. 아직은 차에 애정이 남아서인지 기계식 자동 세차를 거부하고 있다. 덥거나 추우나 손 세차장에서 극세사 천으로 부드럽게 문지르고 있는 것이다. 손 세차장은 3천원의 고압수 뿌리기, 1~2분 동안의 스노우폼 분사, 열심히 미트로 문지르기, 다시 남은 고압수 뿌리기 순서로 이용한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거의 2만원을 내고 세차를 한 적도 있다. 지금은 2년 간 익숙해진 덕분에 낭비하는 시간이 조금도 없다. 단돈 7천원에 차를 깨끗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
처음에는 도움이 될까 싶어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가봤다. 하지만 도움되는 것에 비해 도움을 주었다는 유세가 너무 커서 그 이후 혼자 고생을 하고 있다. 세차를 하다 보면 몇 군데 팬 자리, 깨진 자리, 광택이 죽은 자리들이 발견된다. 마음이 아플 때가 있지만 그래도 깨끗하게 세차를 하고 물기를 닦고 바라보면 반짝반짝한 모습에 흡족한 것이다. 차를 바라보며 흐뭇함을 느끼는 사람들만 손세차장에 올 수 있다. 내 차지만 참 예뻐. 내 아들이지만 참 잘생겼어.
문득 아버지가 처음 차를 샀을 때가 생각이 난다.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당장 차가 필요해서 가장 빨리 나오는 차를 주문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원래 사고 싶었던 차를 못 사게 되었다고 그 후 몇 년 동안 불평했다. 아버지가 48년 생이시니 첫 차를 샀던 91년 쯤이 딱 지금의 내 나이였을 것이다. 기계를 전공하고 엔진에 관심이 많던 아버지다. 얼마나 기뻤을까. 이 차는 특별히 DOHC 엔진이라고 자랑하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영어라고는 한마디도 모르는 초등학생이었지만 DOHC가 더블 오버헤드 캠(샤프트)의 약어인 것을 옆에서 외웠었다. 아버지는 아마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했거나, 나한테 아는 척했으리라.
아버지가 차를 사신 후 방학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차를 몰고 부산, 창원, 남해, 거제를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다. 여름 방학이 되면 은근히 어디를 갈까 기대했다. 며칠 안 되는 어머니의 여름 휴가에 맞춰 온 가족이 2박 3일이나 3박 4일 일정으로 떠났다. 아버지는 떠나기 며칠 전부터 전국 도로지도를 펴놓고 어딜 갈지 머릿속에 그리고 계셨다. 절대 어딜 갈지 가르쳐주진 않으셨지만 모든 여행 일정이 머릿속에 들어 있으셨다. 이때는 우리 가족만 이랬던 것은 아니다. 88올림픽이 끝나고 98년 IMF가 오기 전, 경제 호황기에 사람들은 모두들 마이카를 샀고 지금의 해외여행 붐처럼 국내 도로로 쏟아져나왔다. 전국 여기저기에는 도로변 휴게소와 식당이 생겼다.
내 차는 거의 혼자 타는 차다 보니 실내 세차를 자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끔 아들이 뒤에서 과자를 먹고 난 다음에는 다이슨 청소기를 가지고 내려가서 부스러기를 빨아들이고 있다. 차를 산 지 1년까지는 차 안에서 음식 먹는 것을 금지했지만, 이제 마음을 내려놓고 과자를 먹는 것까지는 허락해주고 있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불만이 많다. 며칠 전 오랜만에 실내 세차를 하러 내려갔다. 매트를 털고 시트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들을 청소한다. 뒷문을 열고 청소를 하는데 오른쪽 뒷문의 창문 아래쪽에 번들번들한 기름이 지하주차장 조명을 유난히 반사시키는 것을 발견했다. 뒷좌석에 타는 사람은 한 명뿐이니 범인은 명확했다. ‘아들’!
물티슈를 꺼내고 닦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조막만 한 손자국에 문득 손짓을 멈추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틀림없이 포테이토칩을 와그작 와그작 먹다가 손에 기름이 범벅인 채로 창문 아래를 만졌겠지. 그런데 기름진 손자국이 너무 작고 귀여웠다. 순식간에 짜증과 화는 사라졌다. 짜증은 불판 위의 연기처럼 이렇게도 사라지는구나. 지금은 손을 활짝 펴도 내 손바닥 안에 들어갈까 싶은 작은 손이지만, 몇 년이 지나 고학년이 되면 달라지겠지. 이 녀석은 엄마 키를 훌쩍 넘어 어른을 향해 부쩍 클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시간인데 고작 뒷문짝의 기름기쯤이야.
나도 아버지를 도와 차를 세차했던 기억이 있다. 페이스리프트가 되어 번쩍이는 크롬 은색에서 투박한 플라스틱 도색 그릴로 바뀐 기아 캐피탈의 그곳을 작은 손으로 문지르며 닦았던 기억이 있다. 얇고 반짝이는 이전 모델의 그것이 더 예쁜 것 같은데라고 상상하면서. 우리 아들처럼 나도 아버지를 도운 것은 그 뒤로 몇 차례에 불과했다. 하지만 늘 차는 반짝반짝한 상태를 유지했었다. 내가 도와드리지 않은 이후로는 어떻게 세차를 하고 계셨던 걸까? 역시나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셨을까? 차에서 나의 조그만 손자국을 발견하셨을까?
훨씬 좁고 시끄러웠던 그때의 차, 꿈도 못 꿀 해외여행과 일 년에 한 번 떠나는 국내 여행, 여행 중 국도변 휴게소에서 먹던 갈비탕 속의 하얀색 당면, 집 앞 도로에서 양동이에 물을 길어다 끼얹는 세차. 그때의 우리 가족과 지금의 우리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