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끊임 없이 계획을 세운다. ‘계획 강박’. 이런 말이 널리 쓰이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표현하기에는 적절한 단어다. 오늘은 내일의 일을 생각하고, 내일은 주말의 일을 생각한다. 물론 주말에도 다음 달의 일을 생각한다. 계획을 세우려면 정보를 알아야 한다. 내가 주문한 옷이 옥천 Hub에 있는지 의왕에서 출발하는 택배차에 실려 있는지 알아야 한다. 도착할 곳의 주차장을 확인하지 않고는 차에 시동을 켤 수 없다.
계획대로 되어 가는지, 지금 계획대로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는지 끊임 없이 살피려면 많은 에너지가 든다. 요즘은 ‘주의’ (Attention), 주의 자본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주의는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며 한시도 잠자코 있지 못한다. 세 개의 모니터에 펼쳐져 있는 열 개의 윈도우를 넘나들며 바삐 움직이는 마우스 커서를 생각해보자.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주의의 바쁜 이동이 필요하고, 이는 현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오히려 주로는 하루와 시간, 한달과 요일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주의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측정하고 미래를 예측한다. 세 가지 시점의 정보를 알 수 있으면 우리는 현재를 미분하여 계획을 만들 수 있다. 계획을 더욱더 정확하고 실패 없이 세우려는 강박 때문에 현재의 방향과 가속도를 끊임 없이 반복해서 측정한다.
따라서 불안해진다. 이 불안의 원인은 예측 실패의 두려움이다. 예측한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내가 원하고 당연히 가지리라 생각했던 것을 잃게 된다. 주로는 돈의 손해, 자존감의 손해, 시간의 손해가 예상된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계획을 잘 세우면 이러한 손해를 최소화 할 수 있으리라 나는 기대한다. 하지만 이러한 충실한 계획의 반대 급부로 그만큼 충실한, 촘촘한 불안이 따라오게 된다. 늘 계획대로 되지 않을지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찬 삶이 되어 버린다. 불안이 현실이 되었을 때의 분노는 덤이다.
불안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 나 뿐 아니라 현대인은 큰 불안 속에 산다. 하지만 과거라고 달랐던 것은 아니다. 불안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불안을 통해 조금이라도 생존할 가능성을 높이고자 했던 진화의 산물이다. 불안을 느끼지 않는 인류는 사자 밥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현대는 극단적인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회는 아니다. 그러므로 조금 다른 해법을 찾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에 대비하는 최악의 경우는 계획을 확장하는 것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을 대비한 또 다른 계획을 세우거나, 계획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부분까지 고민하며 계획의 사슬을 끊임없이 늘려나간다. 당연히 불안은 더 커진다. 나의 경험 상 엑셀 파일의 시트를 늘려 만든 플랜 A, 플랜 B는 잠시 안심을 준다. 하지만 다시 이 플랜들을 점검하느라 스믈스믈 불안이 밀려든다. 생각 끝에 다른 접근을 하기로 했다. 불안을 계획으로 대처하면 안된다.
현재는 흘러가는 것이다. 내가 손댈 수 없다. 현재를 인식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과거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만드는 것이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고 있는 현재의 나는 약간의 응원과 함께 그대로 내버려두기로 한다.
계절 속에서 나를 바라 보는 것이 좋겠다. 나는 봄이 오듯 금방 바뀌는 것 같지만 일 년이 지나보면 또다시 봄이다. 다만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것이 또렷해진다. 조급함이나 초조함은 버리고 무엇이 계획대로 되었는지를 여유를 가지고 살펴봐야 한다. 내가 현재의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계절을 보낸 나와 그 전의 나를 바라봐야 한다. 옛사람들은 ‘절기’, 1년을 24번으로 나눈 계획이 있었고, 이 계획은 매년 그렇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임기응변’은 나쁜 말이 아니다. 계절의 계획이 있다면, 매번 상황에 맞닥뜨린 선택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계획을 세우는 노력, 계획을 점검하는 불안보다 더 효율적으로 주의를 쓸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열어줄 수 있다. 변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연습하는 것이 ‘임기응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때로는 나 자신을 세기(世紀) 속에서 봐야 한다. ‘세기’를 역사 속에서 끄집어 내어 내 인생을 설계할 때 이용해보면 좋겠다. 내 인생이 앞으로 반 세기 정도 남았다면 죽기 전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고 그 계획에 따라 산다면 당장의 불안은 없을 수 있다. 이러한 거시 계획이 잘못된다면 죽기 전에 큰 후회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 후회도 이미 곧 과거가 될 것이고, 우리 모두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후회조차 세상에서 소멸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삶을 산다. 수만 개의 계획을 사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