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가치

내가 중학교 때 사모았던 수십장의 클래식 음악 CD 들은 지금 저장된 수백, 수천의 음원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주었다. 무엇이 과도하면 오히려 나에게 주는 기쁨의 총량은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

추억이라는 것이 너무 많아 어떤 것을 골라 되새김할지 그 선택이 고민될 정도라면 가치가 별로 없는 것 아닌지, 그것을 아련한 추억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몇 가지 없는 추억이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평생을 간직하며 두고두고 되새기는 것이 아닐까?

 

조그만 낡은 동전 지갑

내가 꼬마였던 시절부터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돈 씀씀이에 대해서 칭찬하셨다.  “너희 아버지 젊었을 때 용돈으로 쓰라고 돈 3만원을 지갑에 넣어 주고, 몇 주가 지나서 다 썼겠거니 하고 다시 채워 넣어 주려고 지갑을 열어 보면 그 돈이 그대로 있어. 어떻게 저렇게 돈을 안 쓰고 살까?”

아버지는 그런 돈 씀씀이에 대해서 별로 닮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시면서 절약 정신이 투철한 게 아니라 돈을 잘 쓰는 방법을 몰라서라고 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아버지는 물건을 돈 주고 사 본적이 극히 드문 사람이었기에, 단지 익숙하지 않은 것 뿐이었겠지만 어머니에게는 그 모습이 근검 절약의 표상처럼 여겨 졌나 보다. 따라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고 꼬드겨도 아버지의 지갑을 보기는 정말 힘들었을 것이고 그것은 아들인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정말로 어렸을 시절 부터, 아버지는 주말이면 가기 싫어하는 아들들을 데리고 운동이 필요하다면서 관악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셨다. 그리고 가는 길, 버스를 탈 때마다 조그만 가죽으로 된 동전 지갑에서 토큰이나 동전을 꺼내어 나누어 주셨다. 관악산을 올라가는 초입에는 각종 솜사탕이나 번데기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 많았고, 나는 친구들과 동네에서 노는 것을 더 좋아했는데, 억지로 주말을 뺏긴 것에 대한 보상 심리로 군침 도는 그런 먹거리들을 내심 아버지가 사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단 한번도 아버지는 그 지갑을 꺼내어 먹을 것을 사주는 일이 없었다. 그 까만 색 동전 지갑은 오직 버스를 탈 때만 볼 수 있는, 아쉬움의 대상인 물건이었다.

얼마 전, 아버지와 마지막 이별을 하는 날, 고인의 모든 물건을 태우는 것이라고 하여 아버지의 모든 물건들은 담아 가져온 가방을 불 길에 뒤집어 털자, 옷가지와 함께 그 까만 색 동전 지갑이 색이 바랜 낡디 낡은 모습으로 푹 불 속으로 떨어지며 순식간에 오그라들었다. 동시에 내 찰랑이던 마음에도 20년 전, 그 동전 지갑과 함께 시작해 쌓여 왔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거대한 무게로 떨어졌다. 추억과 회한, 상심 등이 범벅이 된 그 것 때문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났다. 어린 마음에 그렇게 아버지가 꺼내 주길 바라던 그 지갑을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왜 20년 동안이나 그 꼬질꼬질하게 낡은 지갑을 안 버리고 계속 쓰신 거야!” 하면서.

추억은 세월의 길이 만큼 높게 곱게 퇴적되어 현실을 지탱해 주는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축들이 꾸준히 퇴적되는 가운데 그 한 축이 더 이상 쌓아 올려 지지 않으니 조금만 주의하지 않으면 덜컹 거리는 마음이 그 무엇인가의 부재를 뼈저리게 아프고 후회하게 만든다. 주위 사람들은 그 하나의 쓸모 없는 받침대를 버리고 나머지 것들로만 새롭게 인생을 꾸려 나가라고 충고하지만, 쓸모 없다고 여겨 지는 그 것이 나와 아버지가 세상에서 만든, 또 남은 유일한 공동의 작품이기 때문에 쉽사리 그러하지는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