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와 규제

아이를 관찰하는 것은 재미있다.

성인을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들면 여러가지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이건 저럴까 저건 이럴까 살펴봐야 하는데 반하여, 아기들은 단순한 몇 가지 요소들로 파악이 가능하다. 또 몇 번이고 똑같은 실험을 해도 짜증을 내지 않고 일관성있게 받아준다. 아마 어른이라면 화를 내거나 지루하다고 핸드폰을 찾을 것이다.

예를 들면, “아기가 언제 재미를 느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내 결론을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관찰 결과 아기는 내가 하지 말라는 행동을 반복해서 하고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을 살피면서 재미를 느낀다. 이를 테면 내가 누워 있으면 내 배 위에 올라타서 말을 타고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나 한다. 또 나를 때리고 내가 아파서 하지 말라고 말하면 이번에는 조금 살살 때리고 나의 반응을 본다.

일반화 해서 말하면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경계가 어느 쯤인지 파악하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것 관심이 많다. “내가 혼나지 않을 만큼의 자유는 어느 정도지?” 외줄타기를 하듯 말이다. 그리고 거의 매번 그 경계를 넘을 때 아이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간다. 내가 아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화를 낸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착한 아이로 돌아가거나 대번 울어서 나의 처벌을 회피한다. 맞다. 아이는 태어날때 부터 말괄량이나 악동이다.

그러면 꼬리를 무는 생각이 “왜 그럴때 재미를 느끼도록 했을까?”라는 것이다. 아주 어릴때는 나를 올라타거나, 소꿉놀이 모래를 거실에 쏟아 붓고, 나이가 들면 학교 선생님을 상대로 장난을 치거나 더 큰 일탈을 반복한다. 마치 어른들을 시험하는 듯한 아이들의 행동은 무슨 가치가 있고, 아이들은 왜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 정말 100% 순수하게 쓸데 없는 일이라면 왜 그런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인가?

나는 규제를 넘나드는 행동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사회를 건전하게 변화시키기 위해 너무 보수적이지 않게, 또 너무 모험적이지 않게 적절하게 사회화 되는 것에 대한 인센티브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아이가 부모의 말을 하나의 어김없이 듣고 아무런 문제 될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면, 그 사회의 변화의 동력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사회에 새로운 구성원을 수용하기 위한 규제 완화의 동력은 어디 있을까? 아마 어른들이 합의한 세상, 소위 요즘 말하는 꼰대들의 세상이 천년 만년 계속 될 것이다.

또 규제를 벗어나는 것에만 재미를 느끼고 이에 대해 어른들이 어떻게 반응 하는지 관심조차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사회가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까? 사회를 공통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정의한다면, 사회를 유지하려는 인력보다 원심력이 강해서 사회가 더 작은 단위로 분열을 반복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축소 지향적인 사회보다는 팽창 지향적인, 다소는 이질감이 있는 사람과 문화라도 수용하는 사회가 더 영속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어떤 행동이 수용되는 범위, 나와 조금은 다른 행위를 해도 공동체로 끌어 안을 수 있는, 끊임없이 넓혀가면서 팽창 하려는 속성은 완전히 사회화 되기 전 단계의 아이들이 끊임없이 사회의 규제가 어딘가를 실험 하면서 발생하는 외적으로 가해지는 압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다소는 미성숙한 속성을 가진 아이들을 가진 사회가 지난 수백 만년 간 보다 정체 되어 있는 사회와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 남은 것이고 이는 우리 악동 아이들의 성취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