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감상

설 연휴를 이용해 어머니를 모시고 일본 간사이 지방을 다녀왔다.

10년 전 같은 곳을 여행한 적이 있다. 세부(細部)를 보지 못하는 여행객의 시선 탓이겠지만 오가는 풍경, 수 층을 자랑하는 도다이지(東大寺) 본당의 기둥, 기요미즈데라(靑水寺)를 올라가는 계단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수 백년 동안도 변하지 않은 유적 사이에서 오직 나 만, 십년의 세월만큼, 그 인생의 십분지 일 이상을 늙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의 세월이건만 그 십년의 세월이 마치 진공같다. 십년 전 지겹게 먹은 야키소바 빵의 맛이 마치 몇 주 전의 기억처럼 생생하다.

아직 젊다는 말로, 건강하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이러한 현실도 저런 십년 전으로 사라져버린 소소한 기억마냥 쉽게 사라져버리는 것이구나. 소년이로(少年易老)라면 청년은 얼마나 더 늙기 쉬운가. 부단하지도 않은 인생은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가.

부산 & 홍콩 여행 2010

일년 동안 휴가를 2일밖에 쓰지 못했다. 주말을 비우고, 평일을 비우고 휴식을 취했지만 두 밤, 세 밤이 지나도록 회사 일을 잊어 본 적이 없는 지난 일년을 뒤로 하고 일주일 간의 휴가를 즐기기로 했다.


지난 일년 내내 있었던 서울을 떠나 어딘가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또 욕심 가득히 다양한 도시를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부산홍콩을 선택했다. 더위와 태풍, 끈적한 습도가 함께한 여행이었지만 잠시나마 머리를 끈적한 회사의 마수에서 떨어뜨려 놓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참을 수 있었다. 더위 따위, 태풍 따위. 아무것도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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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도쿄에 한참을 머물다, 야간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오사카에 내린 그 시점을 떠오르게 했다. 서울에서 한참을 기차를 타고 달려 내린 곳은 바다 냄새가 물씬 나고, 더운, 그리고 세련된 도쿄에 비해서 한적해 보이는 풍경이 가득한 오사카와 같은 부 산이었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골목들을 누비고 다니고, 위생 상태 불량해 보이는 음식들을 먹었지만 그것이 부산이라면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 다름을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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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날씨는 여행 온 신출내기에게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태풍은 그로 인한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스타벅스에 뛰어들어 샌드위치를 두 개나 주문하게 만들고는 오후 늦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동해로 사라졌다. 다행히 마지막 자비로 햇빛이 나지는 않게 만들어 나처럼 발발 거리고 돌아다니는 여행자에게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기는 했다. 쭉 늘어선 해운대의 파라솔은 나로써는 처음 실제 보는 것이라 즐거웠다. 날씨가 쨍쨍하고, 사람들도 쨍쨍했다. 돼지 국밥은 만족스러웠지만, 밀면은 불만족스러웠다. 뭐든, 대체제로 만들어진 물건은 별로다. 항상 The Original.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와서 피곤에 지친 몸을 하루 쉬게 하고는 바로 다음날 새벽부터 홍콩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홍콩은 영화에서 (사실 그렇게 많이 보지도 않았다) 본 모습 뿐, 어떤 먹거리가 있고, 어떤 가볼 곳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떠나게 됐다. 사실 부산도 그렇고 홍콩도 그렇고 이번 여름의 여행지들은 준비 없이 떠났다. 나름 매력이 있다. 소개팅도 다 알고 나가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가 있다.


홍콩은 무더위와 습기가 지배하는 나라 같았다. 적어도 여름의 홍콩은 그런 것 같았다. 인간이 무엇을 어마어마 하게 소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여기에 와서 구경하면 될 것 같다. 에너지를 소비하고, 욕망을 소비하고, 시간을 소비한다. 그러한 끝없는 인간의 배출을 영양분으로 하여 이 거대한 도시는 살아간다. 그래서 육식동물의 냄새가 나고,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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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머리 속에 복잡한 생각들을 넣고 걸어 다니다 보면 마치 오마쥬처럼 그러한 생각들이 실 세계의 상이 되어 눈앞에 펼쳐지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손에 들고 있는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신중하게 누르게 된다. 영상을 눈과 머리 속, 양쪽에서 잡아 낸다. 사진을 찍는 것은 주로 세상이 나에게 하는 말을 받아 들이는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발견하기도 한다. 일 예로, 위의 사진은 세상이 나에게 하는 말 같았고, 아래 사진은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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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도 잠깐 시간을 내어 들러보았다. 배를 타고 가는 것은 신났지만, 또 다른 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야 하는 일은 귀찮았다. 입국 심사관은 불친절했지만, 호텔 카지노까지 태워다 주는 직원은 친절했다. 사람은 비록 표면적이기는 하겠지만, 돈이 보이면 친절해진다. 작은 유럽이라는 가이드 책의 소개가 조금 잘못되었다. 엄청, 작은 유럽이다. 미니어처 수준도 안 되는 것 같다. 유럽의 냄새가 살짝 난다고 표현 하는 게 좋겠다. 그래 봐야 길거리의 음식 냄새가 더 진동한다. 사람 냄새도 많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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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백만 불짜리 야경이라고 한다. 물론 홍콩의 백만 불짜리 야경을 만들기 위해서 수억 불을 썼겠지. 기라성 같은 타워들이 바벨탑을 올리듯 서있고, 밤 8시만 되면 휘황찬란하게 빛난다. 그 속에서 충분히 즐기지 못하면 왠지 나약함을 느끼고 만다. 바다 바람은 시원하지만 거대한 빛의 발산 속에서 오롯이 혼자 설 수 없는 허세가 심한 인간 군상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야경은 일주일 간의 여행을 매듭짓는 클라이맥스로는 최적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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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배낭여행 2009 [6]

07.19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


따뜻한 쿠셋 칸의 꼭대기에서 잠이 든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사이엔가 날이 밝아 햇살이 커튼을 뚫고 벽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6인용 쿠셋이라 사람이 가득 차면 복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데, 다행히 나랑 동행 둘이서 전체를 독차지 할 수 있어서 여유 있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불행히 이후에는 항상 복닥복닥 거리는 쿠셋 칸에서 잤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확인한 사항이긴 했지만 동유럽 유레일 패스로도 쿠셋을 이용하려면 항상 추가금을 내야 했다. 계산을 해본 결과 나처럼 오스트리아에서도 열차를 이용할 것이라면 동유럽 유레일을 사는 것이 낫고, 헝가리, 폴란드, 체코 같은 국가들에서만 열차를 이용할 것이라면 그냥 그때그때 돈을 내고 티켓을 구입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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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에서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이윽고 차장이 안에 초코렛이 든 빵과 커피, 그리고 어제 맡겨두었던 여권을 들고 잠을 깨우기 위해서 찾아왔다. 열차는 곧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화려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도시와 전원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풍족함과는 다르게 헝가리에 들어서자 조금 다른 창 밖의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나지막하고 획일적인 건물들, 잘 관리 되지 않은 외벽과 정원 등으로 여름인데도 황량함을 느끼게 했다. 여기부터는 구 동유럽으로 분류되던 국가들이다. 코카콜라는 여기서도 마실 수 있겠지만 그 맛은 서쪽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열차가 잠시 서다가다를 반복하더니, 이것이 슬슬 지겨워질 무렵 둔중한 움직임으로 부다페스트 역에 도착했다. 열차를 통한 교통이 일찍이부터 발달한 유럽에서는 이러한 느낌을 사람들이 모두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으리라. 나처럼 열차를 평생에 손꼽아 볼만큼 타본 사람은 옛날 흑백 영화 속에 반복되던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의 공간 기차역이 연상되어서 다소 신기했다. 아주 오래된 역사와 아주 오래된 플랫폼이었다.


가득 짐을 채워 넣은 배낭을 둘러매고 내리자, 열차 안이 오히려 조용했다 싶을 정도로 번잡하고 시끌시끌했다. 아침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외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다가가서 숙박이 필요하냐고 물어보는 소위 삐끼들이 넘쳐난다. 빈 방을 놀리느니 여행객들을 재워주고 얼마간의 돈을 받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일반인들까지 이러한 숙박업에 종사하고 있는 듯 하나, 역시 허가를 받지 않는 것은 다 불법으로 간주된다 한다. 안전과 가격을 위해서라면 정식으로 운영되는 유스호스텔을 찾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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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충한 날씨에 비까지 내린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유로화를 헝가리 화폐로 바꿀 수 있는 환전소를 찾는 것이다. 역에서 운영하는 환전소는 항상 비싸다. 아침 일찍이지만 근처의 괜찮은 환전소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서쪽 중심가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 이른 시각, 게다가 일요일이라 문을 연 환전소는 몇 없었지만, 그나마 있는 것 중에 괜찮은 것들을 추렸다. 우리나라 주유소들처럼 입구에 어떤 비율로 교환이 가능한지가 적혀있었다. 한 시간 쯤 돌아다니면서 살펴보고 가장 나은 곳에서 일단 내일까지 쓰이게 빠듯할 것 같은 양을 교환했다. “이렇게 환전소가 많은데, 나중에 다시 바꾸면 되지 머.”라는 생각이 이었는데, 이 때문에 내일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된다 – _-


그 다음으로는 하루 숙박할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내일 저녁에 부다페스트를 떠나 크라코프로 다시 야간 열차를 타고 이동하게 되기 때문에 하루 숙박이면 충분했다. 무작정 떠난 여행이기에 별로 숙소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지 못했다. 게다가 탄력적으로 일정을 조절할 수 있게 처음과 끝 여행지에서만 숙소를 예약했고 나머지는 다 직접 현지에서 구해야 하기 때문에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일단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여행 책자에서 괜찮을 것 같은 민박 (가장 저렴한)에 전화를 걸었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민박이라고 하고, 위치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을 것 같아서 연락을 해봤더니, 운이 좋게 오늘 남는 방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워낙 한국인이 많이 찾는지 한국어로 인사도 하고, 가격도 한국어로 말해주신다.


3정거장 정도를 지하철로 이동해 숙소가 위치한 곳으로 향했다. 지하철이 너무너무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영국을 제외하고는 전 유럽에서 가장 오래 전에 건설된 지하철이라고 한다. 한 100년은 되었을 것 같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숙소에서 마중을 나와계셨다. 역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해서 이러한 픽업 서비스가 없으면 찾지 못할 것 같았다. 환전을 위해 배낭을 매고 돌아다니느라 너무 진을 뺐는지, 막상 숙소가 정해지고 나자 다시 나오는 일이 쉽지 않았다. 잠도 5시간을 채 자지 못했고, 자리도 불편 했던 지라 편한 침대 위에 누우니 잠과의 싸움에 이겨낼 수가 없었다. 일단 몇 시간이라도 자고 그리고 다시 나서기로 했다. 이때가 오전 11시 남짓일 것이다.


헝가리, 중심가를 누비다


한참을 눈을 붙인 후 일어나, 오후의 한 중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일정이 고작 1박에 불과해서 한정된 볼거리로 제한을 두어야 했다. 근교의 관광지는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시내에 위치한 중심 시설들만 모아서 보아야 했다. 이래서야 패키지 관광과 뭐가 다른가? 싶기도 했지만, 애초에 탓할 것은 짧은 일정으로 기획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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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보면 훨씬 웅장할 것 같다 


나름대로 눈에 익은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이다. 영국 국회 의사당에 이어 두 번째로 거대한 국회 의사당 건물이라고 한다. 헝가리도 한때 부강한 나라였던가? 이쪽에서 강을 건너면 이 국회 의사당 건물과 호텔들이 밀집 되어있는 중심가가 나온다. 일단은 중심가 쪽은 내일 오후에 둘러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쪽의 다소 오래되어 보이는 유적지들을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다소 늦은 오후였지만, 이때가 일요일이어서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웅성웅성 대는 소리와 함께 우리에게는 소매치기 주의보가 내려졌다. 워낙 치안이 좋지 않기로 소문 난 나라인데다가,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특히 그런데, 우리는 먼 이국에서 온 꼬꼬마 동양인들로 좋은 사냥감 이었다 – ㅅ-.


오래되어 보이는, 옛날 아마데우스 시절에 나무 바퀴로 된 마차가 다녔을 것 같은 길을 한참 올라가보니 다리와 강 건너편의 현대식 건물이 차츰 멀리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도쿄나 뉴욕의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현대식 도심이 아니면 세련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그런 곳은 전 세계에 도쿄나 뉴욕 밖에 없다. 도심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러한 한적한 도심? 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서울도 꽤나 도심이고, 꽤나 세련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커다란 강이 도시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모습이 닮아서 문득 서울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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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강, 넓은 평야


저 멀리까지 지평선이 보이는 모습이고, 건물들은 이를 방해하지 않는다. 강을 건너는 다리들은 꼭 필요한 곳에만 있어서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 차 보다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더 편리한 도심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모여 살기를 좋아하지만, 또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사는 것도 좋지 않아 보인다. 유럽의 도시 같은 한적함이 서울에는 없는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외국인들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느끼는 활기찬 도시라는 인식이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결국 사람이 도시를 설계하고, 사람이 분위기를 만든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쉽게 올라올 수 있는 언덕을 힘겹게 걸어서 위쪽 부분에 다다르자, 어부의 요새가 나타나고 또 그 조각 상이 나타났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어부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다른 어부는 없지만, 조각상은 어부랑은 또 전혀 상관없이 생겼다. 외세의 침입에 맞서 여기서 싸워 지켜냈다고 하는데 언덕을 올라오는 곳곳에 성벽과 외부로 공격할 수 있게 뚫어놓은 구멍들을 봤는데, 여기가 요새의 역할을 하는구나. 이렇게 넓은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에 그나마 언덕 같은 곳이라고는 여기 하나 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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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게임에 나오는 레벨 좀 높은 캐릭터 같다


일단 언덕을 올라오느라 힘들었으니까 여기서 콜라 하나를 사 먹으면서 휴식. 또 엽서도 하나 사서 기념품으로 삼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오늘 저녁은 뭘 해먹을까를 고민했다. 오스트리아의 우리나라보다 훨씬 비싼 물가 때문에 잘 먹지도 못하고 지내왔는데, 이제 물가가 저렴한 헝가리에 왔으니 뭔가 영양 보충을 해야 할 듯 싶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까 숙소에서 나올 때 지하철 역 근처에 테스코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곳에서 장을 봐서 숙소에서 무엇인가 먹는 것이 좋은 생각 같아 보였다.  여행 내내 테스코는 이곳 저곳에 있었다. 일단은 해가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고, 더 이상을 돌아다니기 너무 피곤한 관계로 아까 올라오면서 봤던 다리를 건너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식욕, 그리고 수면욕


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해서 움직이기도 힘들었고, 노점상이나 공연 등이 있었지만 부지런히 걸어 지난 후, 보이는 상점에서 맥주를 하나 사서 마셨다. 일정 내내 맥주의 가격은 서울보다 훨씬 저렴했다. 심지어 물가가 우리나라보다 비싼 오스트리아에서도 그랬는데 덕분에 생수보다 맥주를 훨씬 더 마시게 됐다. 날씨가 더울 때 사서 마시는 맥주의 시원한 맛은 그나마 오래 걸어 다닐 수 있는 에너지가 됐다. 취기가 오른 얼굴로 대낮에 돌아다니는 것은 또 색다른 경험이었지만, 여기 사람들은 그게 일상인 듯 했다.


기분 나쁜 경험 하나가 문득 기억이 난다. 이윽고 지하철 역에 들어섰는데, 어느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나가와서는 내가 지하철 표를 잘 못 샀는데, 원래 가격의 30%를 할인해서 주겠다는 것이었다. 표를 보니, 한눈에 봐도 스캐너와 컬러프린터를 이용해 만든 조잡한 위조였다. 더욱이 잘 못 샀으면 역무원한테 환불 받으면 되지 왜 나한테 와서 이걸 싼값에 팔아 넘긴담. 아무튼 이런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사기가 여기저기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속지 않도록 조심할 것. 괜히 몇 백 원 아끼려다가 벌금만 몇 만원 내는 수가 있다.


자판기에서 파는 ‘정품’ 티켓을 구입한 후 우리가 도착했던 기차역으로 다시 돌아갔다. 여기서 숙소까지 걸어가면서 중간에 위치한 테스코에서 장을 보기로 했다. 우리나라에도 삼성-테스코에서 합작해서 만든 홈플러스가 있다. 지금은 물론 삼성이랑은 아무 관계도 없지만. 이곳 테스코에서 파는 물건 중 우리나라보다 저렴한 것들은, 육류, 치즈, 빵 같은 서양식의 기본 재료가 되는 것들은 우리나라의 반값, 1/3 정도에 불과한 것들도 있었다. 덕분에 돈이 모자라게 될 걱정 없이 환전했던 이곳 화폐를 마음껏 쓰면서 저녁식사를 푸짐하게 만들 수 있었다. 뭐, 그래 봐야 햄이랑 샌드위치 정도지만.


어제 거의 수면을 취하지 못해서인지, 산 물건들을 가득 들고 돌아가는 길이 꽤나 멀고 힘들었다. 앞에도 썼지만, 단기 여행이 아닌 이상해야 충분히 먹고, 충분히 자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여행 동안 최초의 우리만 쓰는 숙소에서 충분히 쉬고 잘 것을 다짐하면서 숙소로 들어와 하루를 마무리 했다. 내일은 짧았던 이곳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크라코프로 이동한다.

나는 왜 동유럽으로 떠나는가?

  나는 참 집 떠나기 싫어하는 사람이다. 학교와 직장들이 항상 집 주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다 짜여진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싫어하는 타입? 물론 일상을 내가 잘 정돈해서 변화시키는 것은 좋아하지만 여행처럼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 나를 내버려두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싫어한다, 성향에 맞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떠나는 것에 대한 동경은 있다. 그래서 이번 여름, 더 늦으면 가지지 못할 유일한 기회와 마주쳤을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두가지 선택지 중에서 조금 더 용기를 내서 결론을 내기로 했다. 세계 지도에서 내가 가본 곳과 안가본 곳을 색칠할 것도 아니고 또 블로그에 카테고리를 더 만들고 싶어서도 아니고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할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나의 자연스러움을 거스르고 배낭을 매고 비행기를 타게 만들었다.

  나는 그 선택을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 것인가? 잃을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젊으니까, 젊기 때문에 고작 손해보는 것은 시간과 돈 뿐이다. 얻는 것은 아직 미지의 것이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고, 경험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 인지는 순전히 나에게 달려있는 일이다. 일단 최대한 다양하고 많은 경험이라는 보따리 꾸러미를 짊어지고 돌아올 수 있기를, 또 지금의 두근거림이 여행하는 동안 꼭 그만큼의 뿌듯함으로 바뀌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