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 산업

내가 돈을 주고 사는 것 중에 생계를 위한 것은 얼마나 될까? 의식주를 살펴봐도 먹는 것, 그리고 지불한 돈의 못해도 2/3은 먹지 않아도 될 것을 식사의 분위기나 특별한 맛을 위해 사는 것이니 까탈스럽게 보면 꼭 생계를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돈은 어디에 쓰는가? 주위 사람들을 살펴보니 최근의 ‘소비’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 같다. 누군가는 재미 진 것을 좋아해서 하릴 없이 생산적이진 않지만 재미있는 무엇을 하고, 열심히 하니 썩 잘하게 되어 남들한테 자랑할만큼 되고, 옆 사람이 보니 이것이 재미있어 보이기도 하고 잘 하는 사람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게 된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재미있는 게임의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하고 동네 친구들을 불러 모으는 것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면 그 중에 이를 잘하는 사람, 그리고 대장 역할을 하는 친구는 보이지 않는 권력을 가지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최근의 소위 인터넷 상의 플랫폼 비즈니스라는 것은 생필품을 만들어 파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 보이는 것, 부러워 할만한 것을 유통하고 이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나마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비용을 지불 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 흐름을 따라가보면 없던 것이 생긴 것도 아닌 것 같고, 그저 먹고 살만하면 쫓는 놀이에 돈을 내는 것 같은데 누구는 이런 사업을 잘하고 누구는 아예 이런 사고를 못하기도 한다. 이 차이는 재미라는 무형의 가치에 돈을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엇이 멋진지, 현재는 무엇이 돈을 지불하게 만드는 것인지 순식간에 변화하는 유행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 이리라.

아들아, 너를 통해서 인생을 두번 산다

그 동안 나로만 살았기에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새롭게 발견한다. 아마 아이를 키워보지 않았으면 절대로 발견하지 못했을 관계의 빈틈, 시간의 풍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많은 순간들이 다시 선명히 떠오른다. 아들아, 너의 존재 자체가 나를 두 번 살게 만드는구나.

어머니는 당신의 어떤 노력으로 나를 키웠구나. 수십년의 세월동안 아쉬운 소리 할때마다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 살짝살짝 한탄하던 어머니의 말씀이 나에게는 너무나 가벼웠다. 그건 대단한 무게의 표현을 가볍게 하셨던 탓이다. 그 노력의 밀도, 무게를 새롭게 마주하고 고개가 숙여진다.

아버지는 나를 어떻게 대했구나. 이미 많이 희미해진 아버지의 기억이 내 행동을 통해서 재현된다. 내가 무심코하는 아이에게 하는 말투, 행동이 데자뷰 처럼 느껴진 순간, 이는 데자뷰가 아닌 진짜 과거의 재현임을 깨닫는다. 그 때 느낀 어릴 때의 내 감정을 쫓아가보지만 이미 내게는 아들은 희미하고 아버지만 남았구나.

나는 그때 어떤 생각을 했구나. 나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현재를 미래에서 보고, 과거에서 본다. 너로 인해 인생을 경주마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걷는 철학자처럼 살게 된다. 두 번은 돌아보게 만들어 주는구나.

이사

2013년의 매미소리도 잦아들던 늦여름에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매섭게 바람이 불고 추운 2021년의 겨울에 짐을 싸고 있다. 7년 5개월의 세월.

여기서 투닥 거리며 짐을 끌고 신혼여행을 떠났고, 처음 둘만의 생활을 시작하고, 가까운 학교에 다니며 팔자 좋은 세월을 보냈고, 보일러를 잠궈놓고 한달 가까운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배가 부른 아내를 회사에 데려다 주었고,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 병원으로 달려가 새로운 식구를 만났으며(심지어 그날 일생 유일한 타이어 펑크가..), 아침마다 갓난 아기를 데리고 동분서주하고, 그 아이는 어린이집, 유치원, 미술 학원, 태권도 학원을 넘나들며 이제 혼자 넷플릭스를 보며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나는 젊은 새신랑이 아니게 되었다.

곧 새로운 보금자리로 떠나지만, 남들이 그러더라, 그 뒤에 살던 집은 모르겠지만 신혼집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고. 즐거웠던, 때로는 그렇지 못했던 이 공간 속에 다시 있을 수 없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셋이 추억을 남기고, 또 오랫동안 원하던 곳으로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도 오늘 밤에는 기념사진을 잔뜩 찍게 된다.

무한히 상승하는

무한히 상승하는 느낌의 음악이 좋다.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이나 블라디미르 마르티노프의 Come in! 같은. 감정의 고조, 솔로 악기의 아름다운 선율이 반복되어 질려갈 때 쯤 끝이 나는 그런 곡들을 좋아한다. 이런 곡을 들을 때면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높아지고, 나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몇 년 전까지는 이러한 무한히 상승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휴식은 나태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고, 멈춤은 퇴보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상승에 방해가 되는 옷에 매달린 모래 주머니 같은 것들을 무수히도 던져버렸다. 하지만 여기에는 모래가 아닌 보석들도 있었을 것이다.

인생의 반환점, 그리고 ‘무한히 상승해왔다는 느낌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알기 위해 주위를 둘러본다. 아주 소소한 것들만이 남았다는 자각이 든다. 펜로즈의 계단처럼 계속 걸어 올라왔지만 결국은 출발점과 큰 차이가 없다. ‘소유’라는 측면에서는 틀림없이 얻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내 자아와 자신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영민하지 못해진 두뇌와 계단을 더 빨리 올라가지 못하는 체력을 소진하는 사이 나는 무엇이 되었는가?

이제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내려가는 일만 남아 있을 지도 모르겠다. 사회가 만들어낸 어떤 측면에서는 더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껍데기를 벗어 던진 나 자신이 더 이상 성장할 수 있을까, 상승할 수 있을까. 무한히 하강하는 느낌도 좋아질 수 있는 것일까.

행복과 공포의 양면에서

아이가 부쩍 아빠,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아이가 요즘 즐겨보는 동화책의 엄마, 아빠에서 떨어져 혼자 세상을 헤쳐나간다는 내용이 원인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 계기야 어떻든 아이는 아빠, 엄마와 헤어질 수 있다는 것, 또 그 헤어짐이 영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아침마다 출근하는 아빠를 보면서 울고, ‘아빠 엄마랑 오래오래 같이 살자’는 60살 먹은 할아버지가 할법한 말을 자주 한다. 그 아이는 현재를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하진 않겠지만, 이 따뜻함과 안온함의 시간이 영원히 계속 되기를 아주 간절히 바라는 것 같다.

사실 이것은 어른인 나에게도 아주 오래전부터 묻어둔 공포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 이후에 나의 존재는 가족과의 관계와 동일한 것이 되어 버렸다. 오직 나 혼자만이 존재하는 나는 약 40년을 거슬러 올라가 태어날때의 벌거숭이로 돌아가거나, 약 40년을 미래로 가 모든 것을 잃기 직전에나 상상이 가능하다. 이미 나는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어쩌면 혼자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는 것도 괴로운 것일 수도 있다.

가족과의 관계가 나라는 존재가 되어버린 이후, 가족을 잃는다는 상상, 혹은 이 우주에서 이 관계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현실은 나의 죽음을 넘는 두려움이 되었다. 볼을 부비고, 살을 맞대고, 같이 웃고, 사진을 찍고, 즐거운 대화를 하고, 머리카락의 냄새를 맡는 것을 ‘사랑’이라는 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위로 표현한다. 하지만 반대로 그 ‘관계’를 잃는다는 엄청난 공포를 현재, 이 순간 이나마 잠시 잊기 위한 간절한 행위이기도 하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런 것처럼 무언가를 가졌을 때의 엄청난 기쁨은 그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공포이기도 하다. 나의 삶이 생겼을 때부터, 아이가 생겼을 때부터 이러한 기쁨과 공포의 동전이 주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또 이 동전은 삶의 매 순간마다 뒤집히기를 반복한다. 어떤 면을 보고 있을때의 공포는 때때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들지만, 이는 삶이라는 것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받아들이게 된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의 선택지는 완전한 공백 밖에 없었던 것이다.